403화. 인연
이날 오후, 마침내 오늘 안에 진행시킬 공문들을 다 처리한 고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발을 움직이며 몸을 풀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음을 발견했다. 사무청의 하급 관리들만이 그의 집무실 인근 탕비실에서 그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인.”
한 하급 관리가 달려와 공손히 물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고청운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본관은 이제 집무실을 떠날 걸세. 아 참, 사내 사람들은 다 퇴근하고 없는가?”
“아직 미 대인께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미 주사가?’
고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이내 말을 이었다.
“본관 때문에 여기서 시중드느라 기다릴 것 없네, 이만 들어가 보시게.”
이 사람은 수도사 사무청 소속의 하급 관리로, 낭중과 원외랑의 시중을 들며 차를 준비해 바치는 등의 심부름을 했는데, 보통은 고삼원이 탕비 공간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오늘은 그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대기하고 있던 듯했다.
고삼원이 없는 이유는, 그가 고영량을 따라 한림원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방행(*方 : 방충의 큰아들)이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고청운은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우선 고삼원이 고영량을 한동안 따라다니도록 하여 그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하급 관리를 돌려보낸 고청운은 물건을 정리하며 기밀문서를 넣은 서랍을 꼭꼭 잘 잠가 보관한 뒤 붓을 막 씻으려 했는데, 이때 진소만(陈小满)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소만은 원래 성이 진(陈)씨였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없어서 성혼을 하고 나서야 본래의 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리,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이 소인에게 시키시면 되지, 어떻게 직접 하고 계셨습니까?”
진소만은 고청운이 직접 뒷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얼른 빠르게 몇 걸음 다가와서는 감히 손을 내밀지 못하고 애처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은 그냥 이 소인에게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만약 마님께 알려지면 이 소인이 꾸중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건 좀 표현이 너무 과장된 게 아닌가? 미아가 이런 사소한 일에 관여할 리가 없는 것을.’
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수심이 깊어, 고청운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그에게 씻어달라고 건네주는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이 붓을 넘겨주면서 물었다.
“얼음은 수령했느냐?”
지금은 8월 초였는데, 벌써부터 날씨가 매우 더웠다.
오늘은 공부에서 얼음이 발송되는 날로, 고청운의 직무상의 편의를 위하여 공부 사람들은 직접 그의 집까지 얼음을 운반해 주었다.
다만 그는 제대로 얼음을 수령했는지 이름을 적어 서명해야 했는데, 이러한 절차는 감히 생략할 수 없는 것으로 보통은 관원의 몸종이나 집사가 대리 서명하기도 했다.
“예, 말씀하신 일은 모두 다 처리했습니다. 얼음을 타러 오는 사람들 줄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더군요.”
고청운의 성향을 잘 아는 진소만은 무슨 일이든지, 할 말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자기 집 나리의 품계가 높다고 하여 새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들이 뭐라 하든 화를 나게 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고청운은 그에 대해 별말이 없었는데, 이런 일은 늘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어떤 주인이 있으면 어떤 하인이 있다는 말처럼 아주 횡포한 관리들이야 항상 있어 와서 그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 * *
일을 마친 뒤 집무실의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고청운은 막 미 주사의 사무실을 둘러보려던 참에, 마침 안에서 상대방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잘되었구나, 둘이 같이 갈 수 있겠다.’
고청운은 미 주사와 잠시 전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최근 목재 가격 인상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오늘날 배가 많이 건조되어 필요한 목재가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 앞으로 몇 년간 좋은 목재가 점점 줄어들 테니 가격이 분명 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네.”
미 주사가 대답했다.
“해외에서 가져오는 목재는 대부분 귀하다는 단목, 계수목 등인데, 이러한 목재들로도 선박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가구 제작에 쓰이는 것들이니까요.”
고청운은 무심한 듯 말하는 미 주사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도 관련 공문을 봐왔는데, 2년 동안 목재 가격이 점점 오르고 있었기에 향후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선박 제조에 사용하기 적합한 목재는 삼나무, 잣나무, 유목, 느릅나무, 녹나무 등이 있었다. 배라는 것은 사용에 따라 서로 다른 목재를 사용해야 했지만, 나무라는 것은 대부분 생장 환경에 대한 요구치가 높지 않으니 선박 공방 인근 지역 사람들을 모집하여 충분히 재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제일 좋은 상황은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이러한 나무들을 심는 것이었는데, 자신들의 가옥 안 정원, 마을 길 양측 정도에만 심는다고 해도 여러 해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였다.
증기엔진을 사용하게 될 시대가 언제 올지, 철로 만들어진 선박은 또 언제 제작될지 알 수 없으니, 그때까지 최대한 나무를 많이 확보하는 게 좋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상주문을 써서 올릴 만한 주제였는데, 이 일이 과연 진행될지 안 될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고청운은 고향으로 서신을 써서 그의 아버지에게 야산 몇 개를 사들이게 하여 그곳에 적당한 나무를 심게 독려할까 생각했다. 이 나무들을 몇십 년 후 후대에 사용 가능한 재산으로 남기면 가구 등을 제작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이렇게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가 서신을 쓰자.’
미 주사는 이 짧은 몇 걸음을 떼는 동안 고청운이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을 거듭한 사실을 모르고, 또 다른 이야기를 주제로 꺼냈다.
미 주사가 아이들의 혼사 문제로 화제를 돌리자, 고청운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아이들의 혼사는 정말 정하기 어려운 문제일세. 지금 세대는 우리 젊을 적과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는 그저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중매쟁이가 잡아준 약속을 따를 뿐이었는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자유로워져서 각종 연회에서도 서로 만나 볼 수 있으니 말일세.
또 각 집안의 안주인들이 나서서 중매를 서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 게다가 매년 상사절(*上巳节: 음력 3월 3일, 음력 정월의 첫 사일에 치르는 의식으로, 강이나 물가로 나가 액운을 쫒는 풍습)에 놀러 나가 서로를 볼 수도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부모 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아이들의 혼사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아이들이 원해야 할 수 있는 혼사가 되어 버렸군, 그래.”
이 말을 들은 미 주사는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줏대 없이 그 의견에 동조했다.
“네, 맞습니다, 최근엔 확실히 그런 풍조가 있지요.”
대답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고청운의 말뜻에 숨어 있는 암시를 알아챘는데, 그 암시에 대해서 딱히 분노하지는 않았다. 필경 이 혼사라는 것은 당사자 간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겨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의 눈에 고씨네 아들이 훌륭한 인재로 비춰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주동적으로 혼담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딸의 혼처를 걱정할 만큼 뒤쳐지지 않는 정도는 된다고 여기고 있기도 했다.
고청운은 속으로 탄식했다. 미 주사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될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간미가 그간 말해 온 바에 따르면, 고영진은 아마도 노씨 집안의 둘째 여식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미 주사의 집안은 매우 훌륭했는데, 대가족으로 삼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집안이었고, 관가에서 쌓은 기초가 그들 고씨 가문보다도 더 두터웠다. 미 주사의 맏딸 역시 적장녀로, 고청운은 간미가 그녀를 칭찬했던 것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상대방이 매우 우수한 여인인 것과 미 주사의 품계가 자신보다 낮다는 장점까지 더하면, 실은 노씨 집안보다 집안끼리는 더 맞는 혼처가 될 수도 있었다.
다만 고청운은 집안의 둘째 아들인 고영진이 유능한 처가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역시 좋은 일이라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고청운이 간미의 의견을 들어보니, 아마도 노개운(卢开云)과의 관계 때문이었는지, 많은 후보들 중 제일 먼저 혼담을 전하게 되었고 고영진과 노씨 집안의 둘째 여식 역시 서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만약 이 혼사가 성사된다면, 그의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모두 서열 2위의 딸들로 구성되는 셈이었다.
‘이런 것도 참 인연이야.’
고청운은 남몰래 감탄하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고영진의 혼사가 잘 풀린다면 이는 정말 기쁜 일이었다.
* * *
미 주사와 헤어져 반 시진(*약 한 시간)도 안 돼서 집에 도착한 고청운은 막 문을 들어서자마자 고영량과 방정심이 앞마당에서 활시위를 당겨 활을 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정심은 고영량이 내는 성적에 비하면 처참한 정도였지만, 그래도 모습을 보아하니 활쏘기가 즐거웠던지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고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다녀오셨습니까?”
방정심은 고청운을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내려놓고 곧장 그를 마중 나왔는데, 자신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아들인 고영량보다 더 세심했다.
고청운은 이마를 짚으며 손을 흔들곤 말했다.
“나는 아주 괜찮다. 심심아, 마저 하던 일을 하거라. 나는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겠구나.”
“네, 그럼 계속 량가아와 함께 있겠습니다.”
방정심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 * *
고청운이 자신의 처소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데, 간미가 먼저 전시 상황에 대해 물었다.
“당장 무슨 소식이 전해진 건 아니지만, 앞서 작은 승리를 거둔 참이라 다들 기분 좋게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오.”
고청운은 간미의 몸에서 전해져 오는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오늘은 방씨 집에 가서 그들의 혼사 준비를 거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소?”
방자명의 딸 주아와 육황자의 성혼식 시기가 올해 9월 하순으로 정해져서, 하씨는 이 혼사를 위해 일찌감치 남경 지역에서 경성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현재 방자명은 하남 낙양(洛阳)의 임지부(任知府)에 전근 가서 근무 중이었는데, 이번 전근 때문에 단번에 정4품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지금 혼자 부임지에서 근무를 하는 중이었고, 부모님과 처자식은 모두 경성으로 돌아와 다 같이 혼사 준비를 거들고 있었다.
방자명 외에 고청운이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서 방희림도 승진을 했는데, 그는 지금 정6품인 통판직을 수임하며 여전히 귀주(贵州)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원래 현령으로 있던 곳이었다.
고청운은 관직 변동이 없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그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갔다가 벌써 돌아왔지요. 다들 전쟁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통에, 혼사가 제때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간미는 조금 우려하는 기색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어, 우리 수군이 승리를 거두길 바랄 뿐이에요.”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정심에 관한 일을 물었다.
방정심이 막 퇴근하자마자 고영량을 따라 자신들의 집으로 온 것 같았던 것이다.
“그가 이미 집안에 들어왔는데, 제가 이제 와서 그를 어떻게 쫓아낼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 어린 나이에 경성에 혼자 올라와 살고 있는데, 식사라도 우리 집에서 하는 게 당연한 거지요.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요.”
간미는 그를 도와 허리에 옥패(玉覇)를 둘러주곤 웃으며 말했다.
“지금 탐화랑은 경성 내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윗감 중 한 명입니다. 오직 당신만 싫어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탐화랑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다가는 분명 굴러 들어온 복이 복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망설여진다오.”
고청운이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문벌이 높은 사람들은 옛날 사건을 떠올릴 테니, 내가 혼사를 논하기에는 망설임이 있지 않겠소? 방가(庞家)의 명성은 확실히 그 일 때문에 손상된 바가 있지 않소, 내가 지금 망설임이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