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개선 (1)
“수완이 늙는 것을 보았습니까, 쓸모만 있으면 되지요.”
고청운은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떴다.
방자명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의 뻔뻔함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 소석이는 전시(殿試)를 치렀겠지?”
방자명이 갑자기 물었다.
고청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오늘이 21일, 전시를 치르는 날입니다. 성적은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겠지요.”
고청운은 합격자 발표 일정에 맞추어 제때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적어도 아들이 큰 대로에서 말을 타고 거리 유세를 하는 자태를 꼭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안심하게. 회시에서 2등을 했으니, 보통은 1갑 안에는 들겠지.”
방자명이 그를 위로하고 다시 말했다.
“우리 서가아도 소석이처럼 방상괘명 해야 할 텐데.”
방자명은 고영량의 성적을 알게 된 이후부터 매우 기뻐했고, 언젠가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꼭 1갑이 아닐 수도 있지요. 저희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같은 동기인 종민(钟闵)이 전시를 치르고 돌연 담자례의 뒷석차를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회시의 2등 합격자에서 돌연 2갑의 3등으로 떨어진 건데, 전시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고청운은 이어 방자명과의 논쟁을 제지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서가아가 지금 갑원반으로 올랐다죠? 제가 틈을 내어 황립 서원으로 가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방 형의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깨달음도 적지 않다고 말하더군요.”
고청운은 방서가 황실 서원에 입학한 후 고영진에게 그를 잘 좀 돌봐주라고 당부한 뒤로도 서원을 자주 찾아 그의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방자명이 흉이라도 볼까 말을 꺼내려 하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말을 꺼내게 되었다.
그 아이는 방자명의 유일한 아들이니 비뚤어져서는 안 되었는데, 더군다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곁에 같이 있었지 않은가.
“그 녀석에게 어디 그런 장점이 있다고. 앞으로 소석이의 6~7할 정도만 되어도 나는 만족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자명은 여전히 웃음을 감추지 못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청운은 그의 대답에 다른 의견을 더 내놓지 못했다.
“이제는 근무지를 좀 옮겨야 할 때가 된 겁니까?”
고청운은 몇 마디 잡담을 더 나누다 말고 그에게 물었는데, 방자명 집안의 집사인 지기(知棋)가 경성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음, 지부의 자리가 있는지 찾고 있기는 하네.”
방자명은 인정한 후 그를 한 번 흘겨보았다.
“지난번에 서신에 언급하지 않았는가, 설마 내 은어를 못 알아본 건 아니겠지?”
“물론 잘 알지요, 전 그저 다시 물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청운의 입꼬리가 약간 틀어졌다. 그는 아까 술자리에서 술을 너무 마시고 음식도 많이 먹었는지, 마차가 한 번 흔들리자 참지 못하고 트림을 하고 말았다.
이에 방자명은 혐오스럽다는 듯 입을 가린 채 과장된 동작으로 그에게 눈치를 주려 곁눈질했다.
고청운은 그들 사이에 작은 찻상이 놓여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흠씬 두들겼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대놓고 혐오를 표할 필요가 있나? 모두 과거 시험을 거쳐 배출 된 사람들이니 다들 잘 알 텐데 말이야. 우리는 다 같이 변기 옆에서 밥도 먹고 했지 않은가.’
“참, 소어의 혼처는 어디로 정할 겐가?”
방자명이 늘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제를 물었다.
이 일이 언급되자 고청운은 또다시 걱정에 휩싸였다.
“소석이의 성혼만 해도 아주 어렵게 성사시켰는데, 이제 또 소어의 차례가 와버렸습니다. 그 녀석은 지금 경성에 있는 것도 아니라 그 아이에게 의견을 물어보려 해도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다행히 둘째 아들은 이미 거인의 신분이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의 실력도 우수했고, 또 출세한 형님까지 두고 있으니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다.
“혼사는 부모가 정하면 되지 않은가.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어여쁘고 좋은 여인을 잘 골라 주면 되지.”
방자명은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방 형은 한사코 성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셨습니까? 설마 그때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겠지요?”
이 말은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 모두가 한창 어렸던 그 시절의 일이었고, 소년의 속마음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방자명은 순간 큼 하고 수염만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담자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방자명이 그를 흘겨보았다.
고청운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담자례에게 여식이 하나 있는데, 간미는 그 아이가 괜찮아 보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그와의 사이가 별로라서 포기했습니다.”
그들 두 집은 여러 이유로 쉽게 마주치고는 하였는데, 안채의 일들도 그 자주 마주치는 상황에 포함되었다.
방자명은 고청운과 담자례의 관계를 생각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어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걱정되는 것은 저희 집 딸 소아입니다.”
고청운은 그간 고경의 상황에 대해 모두 말했다.
“요즘에는 가세가 좀 있는 집안이면 죄다 후대를 관리로 만들려고 하니, 적당한 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청운은 일찍이 귀족 집안의 차남이나 삼남들을 혼처로 고려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들은 매우 잘나가는 사람들이라 일찌감치 정혼자를 두고 있었다. 그가 그 사람들을 빼앗아 올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닭 쫒는 개의 형국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무슨 큰 장래성이 없는 사람을 찾아보자니 그중 어떤 이들은 또 문인이 아니라 무예를 하는 이들이라 고경과 어울리기가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의 혼인 상대로는 문인인 편이 더욱 어울렸으니 말이다.
고경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생각은 앞으로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바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부군이 지방관으로 일한다면 그녀는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참 적당한 상대를 찾기란 쉽지 않지. 하지만, 신중해야만 하네. 딸들은 한 번 시집가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으니 말일세.”
방자명은 이 상황을 통감했다.
“예전에 주아, 원아의 정혼자를 정하기 전에는 우리도 밤새도록 고민했었지.”
그의 집 여식들은 용모가 너무 뛰어나서, 비록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봉꾼과 나비를 꾀어내려는 이들이 나타나 그를 성가시게 하고는 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고청운과 방자명은 서로 눈을 마주쳤는데, 마음속으로 죽이 척척 맞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하, 예전에 우리는 만나면 늘 친구, 읽고 있는 책이나 시집, 서화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뜬소문에 대해서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는데……. 이제 만나면 자식들 이야기만 계속해서 나오는군.”
방자명은 가지런하고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중에는 만나서 손자 이야기만 나누는 건 아니겠지?”
손자 이야기를 꺼내자, 방자명은 우울해졌다. 그는 고청운보다 2살 위였으나, 하필이면 그 집은 이미 손자를 보았고, 자신의 아들은 아직도 서원을 다니며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올해 겨우 14살이라 손자를 보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어 껄껄 웃었다.
* * *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여러 이야기들을 주고받다가 곧 방자명이 사는 거처에 도착했다. 이곳은 관아에서 멀지 않은 삼중정원 형태의 사합원 형식 저택이었는데, 다만 날이 저물어 주변이 어슴푸레하여 정원의 뜰의 경치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마중 나온 하 씨와 쌍둥이 자매와 인사를 나눈 고청운은 이들이 늦게까지 기다린 것 같아 미안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와서 정말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사를 건네고 자매를 한 번 쳐다보았는데, 방자명의 여자 형제라고 생각될 정도로 미모가 극히 아리따웠다.
촛불 아래에서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자매의 미모가 발하고 있는 걸 본 고청운은 요즈음 여러 장소에서 무릇 많은 여성들을 봐왔지만, 그 많은 소녀들 중에서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자매의 용모가 단연 그들의 앞줄을 차지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 씨는 고청운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가 그의 곁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방자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저희 집으로 모실 수 있어서 다들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저희 일가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지요.”
방자명이 말했다.
“오늘 밤 우리 둘이 한 침상에서 잠을 청하는 건 어떤가?”
그는 그리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는데, 이 모습은 12년 동안 못 본 모습이기도 했다.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본 고청운은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다 하더라도 그 제안을 거절했다.
“방에 침상을 하나 더 들여 주시면 아니 됩니까?”
‘두 사내가 같은 침상에서?’
그는 이렇게 여러 해 살아오면서 아직 이쪽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방자명은 그가 조건을 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을 들어주지.”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매우 억울해하고 있었다.
‘이리 갑자기 다시 만날 수 있어 나만 기쁜 건가? 설마 내가 그와 동침이라도 하고 싶을 거라고 착각했나?’
하 씨는 입을 가린 채 웃다가 사람을 시켜 준비를 시켰다.
* * *
고청운과 방자명이 칡 해장국을 먹고 세면을 마치고 나오자, 앞마당에 위치한 객실의 침상에는 새 침구가 깔린 채 모든 준비가 마쳐져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길을 재촉해 달려온 고청운은 내일도 선박 공방을 시찰해야 해서 일찍 침상에 누웠는데, 이는 방자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박 공방 쪽의 배를 크게 개조했다고 들었는데, 결과물을 보일 자신은 있는가?”
두 사람이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고 나서, 잠시 머뭇거리던 방자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청운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생각을 정리해 말을 이었다.
“해외와의 교역이 막 시작됐을 때 우리나라의 선박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선진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는 그들 대륙의 나라 간에는 교전이 잦아 이쪽으로 더 빨리 발달이 되어 왔기 때문이고, 저희는 태평한 상태를 유지한지 오래되어서겠지요.
화기(*火器: 화약의 힘으로 탄알을 쏘는 병기)의 경우, 그 발달 수준이 아직 개국 초기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화기를 사용해 변방의 정세를 안정시킨 이래로 화포 연구는 정체되었는데, 다행히 나중에 조정에서 해외 교역을 통해 다른 나라들의 함선의 발달 수준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비로소 이를 모방하고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몇 년 전부터 관련된 일들이 진행되었죠.
그 덕에 상선들까지 덩달아 덕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운항 속도가 빨라져 우리가 고향으로 귀향할 때 드는 시간까지 단축되었으니까요.”
이런 성과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연구에 돌입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자, 고청운은 속으로 매우 기뻤다. 하 왕조는 평행시공 너머 세상의 만청(*满清: 만주인(滿洲人)이 세운 청(淸)나라. 청 왕조)이 아니었다. 이 나라는 한족이 통치하는 국가였고, 비록 여러 가지 방면에서 부족함이 있음에도 대외 교류에 관한 자세가 꽤 자신만만했다.
하 왕조는 오랜 세월 자국의 지식인들의 눈높이를 따라 함께 사고방식이 개척되면서, 이 세상 하늘 아래 많은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국의 본토에만 치중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선진 기술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로 어디를 어떻게 개조했는가?”
“전 바로 화포 부분을 개조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화포는 성을 지키거나 공격하기에는 좋지만, 야외 전투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고, 포의 무게 자체가 매우 둔중하여 신속한 조준과 사격 및 빠른 이동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양 쪽 서적들을 참 좋아했다는 걸 방 형도 아시죠? 그때 왕씨 집안의 사람들한테 무기와 관련된 서적들을 좀 챙겨달라고 부탁해서 읽어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국내에 반입시킨 여러 관련 서적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이 책들을 어떻게든 빌려봤었는데 이렇게 보람이 있네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나자, 고청운은 자기가 헛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쭐해졌다.
그는 한림원과 호부에서 근무할진 몰랐지만, 그래도 무기 방면의 발전 쪽으로 생각해둔 바가 있어 관련 서적을 봐두고 있었다.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는가. 그는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황제가 공부를 통해 무기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했을 때, 고청운은 공부의 상서(尙書)로부터 임무를 전해 받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구상을 끝내고 연구 방향을 설정했다.
‘다른 나라의 선진적인 무기가 본보기로 이리 잘 구비되어 있는데, 이 정도도 복제하지 못할까 봐?’
그는 공부 소속의 장인들에 대한 매우 큰 자부심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