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391)화 (391/504)

391화. 재시험 (1)

서재에서 고청운은 어젯밤에 낸 책론 문제에 대한 답안을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앉은 고영량을 쳐다보았는데, 마음이 참 뿌듯했다.

그의 학식을 가늠해 보기 위해 한 차례 문제를 낸 고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량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지난 2년간의 공부가 헛되지 않았구나. 고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왔어. 네가 문제를 푸는 수준이 2년 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더구나. 특히 책론 쪽으로는 발전이 매우 크다.”

고영량은 아버지의 칭찬을 듣고 검은 눈을 번뜩이며 빛냈고, 순간 고청운과 7~8할이 닮은 얼굴 위로 좋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하, 고향집이 워낙 조용하지 않습니까. 저는 틈만 나면 주변의 현, 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많은 일들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또 계획을 세워 매일 할 일은 다 짜놓고 하루하루 해 나가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고영량은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동생도 저와 똑같이 했는데, 이번 향시에서 자신의 성적이 꼴찌를 한 것을 알고 기분이 나빴는지 이후 공부를 더 열심히 하더군요.”

고청운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괜찮다, 부끄러움을 알고 나야 용기를 낼 수 있는 법이지.”

학습 계획을 세우는 건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아들들을 교육해 온 방법이었다.

합리적이고 치밀한 계획이 있어야만 자신의 생활을 질서정연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고청운에게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은 없었다.

“그래도 수정할 게 좀 있으니 여기를 좀 보거라…….”

칭찬은 이쯤 마무리하고, 고청운은 다시 단점에 대해서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용하던 서재에서는 부자가 머리를 한 곳에 맞대고 끊임없이 토론을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지막한 말소리 뒤로 사방에 켜진 화롯불만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 * *

며칠 후 11월 10일, 이날은 고청운의 휴무일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전에 이미 첩자를 보내두었던 방정심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방정심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나자, 고청운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앞에 서 있는 소년은 구름 문양이 있는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키가 크지는 않아 경성을 나서기 전의 고영진과 비슷한 정도일 것 같았다. 얼굴에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았고, 생김새는 청초한 모습에, 피부는 건강한 밀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한 쌍의 눈은 크지는 않지만, 보기에 날렵하면서도 생기발랄해 보였는데,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질이 매우 친숙한 구석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일말의 경계심도 갖지 않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용모는 방희림과 다소 비슷한 듯했지만 그래도 그의 아버지 방희림보다는 훨씬 뛰어나 보이는 것이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았는데, 방희림의 용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던 것이다.

고청운은 그를 자리에 앉히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심아, 너는 이번에 상성에서 경성으로 오는 길에 누구와 동행했느냐? 예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

방희림은 서신에서 늘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하며 ‘심심이’라는 애칭을 자주 사용했는데, 고청운은 이 애칭이 인상적이어서 무심결에 이 애칭을 부르고 말았다. 

방정심은 언뜻 이 애칭을 듣자마자 멍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지만 마음은 외려 따듯해졌다. 

그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열심히 묻는 말에 답했다.

“저는 몇몇 시험 동기들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모두가 저를 잘 돌봐 주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터라 갈수록 날씨가 추워져 간간이 걷기가 좀 힘들 때도 있었지만, 모두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너는 2살이 채 되지 않아 경성을 벗어났지. 그리고 중간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 경성의 기후에 순간 적응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천천히 좋아질 터, 만약 풍토가 맞지 않아 몸에 탈이라도 나면 재빨리 의원을 찾아야 한다.

네 아버지와 나는 절친한 친구 사이인데, 네가 상경하게 되자 네 아버지가 나에게 서신을 써서 너를 잘 돌봐 달라며 부탁을 하더구나.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된단다. 여의치 않으면 여기 내 아들 고영량에게 말해도 괜찮다.”

지금 방정심은 그의 외할아버지인 백엽 대인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워낙 출중하여 생활 전반에 크게 걱정될 점은 없어 보였다. 다만 백 씨가 서녀 출신이라는 것과 백 대인 집안의 안채는 백씨 집안의 마님이 관장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 고청운은 한 마디 더 당부했다.

또 그는 방희림의 사연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들 중 가장 앞날이 창창하고, 사람 됨됨이가 총명했던 그가 하루아침에 사건이 터져 아직도 7품 현령(縣令)직으로 허송세월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감사드립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고 대형을 뵙자마자 친근감이 들었어요.”

방정심은 정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고영량을 돌아보았다. 젖살이 오른 그의 볼에 두 개의 작은 보조개가 드러나자,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고영량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보조개를 들여다보고는 비로소 고청운에게 말했다.

“아버지, 제가 어렸을 때 심가아(*深哥儿: 방정심)를 만났었지요. 그때 전 6살이 이었는데, 우리 집에서 운하 변으로 봄나들이를 갔다가 방 아저씨와 심가아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 아이는 겨우 막 1살이 넘겼을 때로, 방 아저씨의 어깨에 걸터앉아 매우 의기양양한 모습이었지요.”

고영량은 꽤 어렸을 적 일을 잘 기억하고는 하였는데, 심지어 그때 자신이 어른들 어깨에 앉은 작은 아이들을 매우 부러워했던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나이가 많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청운은 고영량이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기억력으로 따지자면 역시 심심이 아버지가 가장 대단하지. 지금 네가 이 어린 나이에 벌써 해원으로 시험에 합격을 하다니, 과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구나. 네 아버지는 틀림없이 매우 기뻐하고 계실 것이다.”

“고 대형께서도 대단하십니다.”

방정심이 급히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청운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사실 고청운은 이상하게도 방희림이 너무 조급해한다고 느꼈다. 방정심이 올해 겨우 16살인데, 회시에 참가하라며 경성으로 보내버렸으니 말이다. 

설마 3년도 더 기다릴 수 없었단 말인가? 이러다 너무 안 좋은 석차로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조정에서는 그를 지방직으로 발령을 낼 것이었다. 그것이 싫다면 어찌 되더라도 한림원에 붙어 앉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옛말을 다시 꺼내들어 언급을 하자면, 그는 자칫 동진사에 합격해서 더 울상을 지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회시 참가자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방희림이 아들을 일찍 시험장으로 들여보낼 거라는 건 아들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혹은 그저 시험장 분위기를 한번 체험시켜 보고자 함일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청운은 그의 학문적 소양을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 

시험 문제를 낸 고청운은 방정심이 심오하게 건넨 답안지를 들여다보고 무의식적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방정심은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였다. 

‘이 어린 나이에 책론을 이렇게 수준 높게 써내다니.’ 

이 때문인지 그의 이 답안은 젊은이가 쓴 답안인 걸 전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그는 말단 방면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가 곁들인 조언도 적절했기에, 이 답안이 사소한 것까지도 주의를 기울여 쓴 답안임을 느낄 수 있었다. 고영량의 답안은 그가 쓴 것보다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방정심이 응당 받아야 할 평가였고, 또 당연한 결과였다. 

고청운은 눈앞의 소년을 보며, 그가 어린 나이에도 방희림을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밑바닥을 함께 맴돌았으니 생각이 어른스러워진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좋다! 정말 잘 썼구나!”

고청운은 한마디 칭찬하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린 나이인데도, 네 아버지가 감히 시험을 보고 오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책론 두 문제의 답안을 이 정도로 아주 훌륭하게 써내다니,”

방정심은 그 말을 듣고는 또다시 웃음을 보였는데, 이번 표정은 꽤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한쪽에 있던 고영량은 진중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의 답안지를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세 사람은 또 대화를 나누었고, 잠시 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던 고청운은 고영량에게 부탁해 방정심이 간미 등 다른 가족들과 인사를 하러 갈 수 있도록 보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방인소와 함께 장기를 두러 집을 나섰다. 엊그제 내내 눈이 내렸기에 방인소는 집에만 있기 무료해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모처럼 날씨가 맑고 바람도 불지 않으며 눈도 오지 않아 고청운과 함께 기원(*棋院: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장소와 시설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곳)을 방문하여 바둑이라도 두고자 했다. 

기원이란 고청운의 입장에서 보면 노인들의 여가 활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었는데, 장 대사나 우 대사 같은 매우 부유하고 귀한 집의 노인들도 간혹 가고는 했다. 그곳에는 가끔 흔치 않은 서적이 있을 때도 있어, 고청운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는 했다.

방인소가 무슨 눈을 밟아가며 야생 매화를 찾으러 교외로만 나가지 않는다면, 고청운이 무슨 일이든 못해드리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집안에서도 바둑을 두며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 * *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고청운은 간미와 고영량에게 방정심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잘 웃는 상이 보기 좋은 소년입니다. 그저 평범한 여행기도 어찌나 흥미롭게 잘 풀어내는지요, 제가 다 경성에서 배를 타고 고향집으로 가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간미가 진심을 담아 웃으며 말했다.

“사람도 차분한 것이 누구랑 다르게 마음을 잡고 앉아 제 잔소리를 끝까지 듣고 앉아 있더군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고영량을 손으로 가리켰다.

고영량은 하하 웃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어머니, 제가 언제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이러십니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열심히 듣고 있었는걸요. 저는 대충대충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 내가 솜옷을 하나 더 껴입으라고 했는데, 왜 따르지 않았느냐?”

간미가 그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큰아들의 애교가 그녀를 매우 기분 좋게 했다.

“춥지 않으니 입기 싫었습니다.”

고영량은 머리가 아파왔다. 막 경성으로 돌아와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이 너무 커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주마다 사사건건 관심을 가지는, 어머니의 너무 과분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고청운은 큰아들이 자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오자 서둘러 말했다.

“그럼 네 의견은 어떻느냐?”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방정심과 함께 지냈다. 

고영량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깝게 지낼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매우 성실한데다가 기억력도 정말 좋더군요. 한 번 보고 다 외워버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문장을 두세 번 읽으면 충분히 다 외울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고영량의 동창 중에서 매우 총명한 인재들이 몇 있었음에도, 방정심이 공부를 하는 효율은 그들 동창들보다 세 배 정도는 더 뛰어났다. 만약 이에 대해 일일이 다 질투가 난다면 공부를 하기 싫어질 정도일 것이다. 고영량은 이런 것들에 대해 이미 통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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