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온기
망토를 벗은 고청운은 자갈로 포장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막 매화나무 한 그루 곁을 돌아 나섰는데, 바로 앞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 앞으로 걸어간 고청운은 모퉁이를 돌자 멀지 않은 곳의 정자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고경과 간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문발의 한쪽 귀퉁이 사이로 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리.”
정자 안의 계집종이 고청운이 다가오자 얼른 그를 위해 정교하게 매화꽃이 수놓인 두꺼운 비단재질의 문발을 들어 올려 주었다.
“아버지!”
고경은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해맑은 얼굴로 웃음을 띠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매형.”
간유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청운은 빙긋 웃으며 응수하고는 곧장 정자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귤향의 은은한 훈기가 그의 온몸을 녹여 주었다.
고청운이 고경의 맞은편에 앉아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재미있게 하고 있었느냐?”
고경은 방긋 웃으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작은 외숙께 고향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방금은 임산현 교외의 도산사(桃山寺)가 아주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 외할머니께서 그곳을 자주 찾아 예불을 드리셨대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소매 안에 있던 손난로를 고청운에게 건넸다.
“아버지, 방금 밖에서 돌아오셨으니 이것으로 몸을 좀 따뜻하게 녹이세요.”
고청운은 딸이 이렇게 자상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커졌다.
그는 그녀의 배려를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좋다, 우리 소아가 진짜 효녀로구나.”
그 말에 고경은 눈을 빛냈고,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 작은 입을 오므렸다. 그녀는 이제 13살의 소녀로, 제법 소녀다운 자태가 드러났는데, 더불어 책을 많이 읽은 학자의 분위기도 짙게 났다.
간유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고청운이 그를 힐끗 한 번 보았다. 사실 이런 일은 고청운이 이미 수없이 해 오던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청운은 아이들에게 윗사람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바로 생활에서 실천했다.
예를 들어, 고영량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받은 과일을 고청운에게 먼저 건네주고 나서야 자신도 과일을 먹었다. 처음에 고청운은 반드시 자신이 먼저 과일을 먹고 나서야 아이가 눈치를 보며 한입 먹으면 칭찬을 해 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결국 아이들은 물건을 어른들에게 먼저 드려야 된다는 개념이 생겼고 이 물건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방을 둘러본 고청운은 이어 간유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분명히 네 성혼이 늦어서 그랬을 테지. 장모님께서는 할 수 없이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공양을 드렸을 게야.”
계집종이 뜨거운 물 한잔을 따라주는 것을 보고, 그는 찻잔을 곧장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매형, 그건 다 지나간 얘기가 아닙니까.”
“그나저나 장인, 장모님께서 임양부에서 지내시는 것은 익숙해지셨다고 하는가?”
고청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임산현의 현학에서 20년 가까이 교편을 잡았던 간지원은 작년에 부학(府學)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한 걸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셈이었다.
고청운은 어찌하여 간지원이 임산현에 그렇게 여러 해 머무르다 말고 갑자기 임양부로 거처를 옮겼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그가 진즉에 이를 원했었다면, 고청운은 인맥을 찾아 어떻게든 빨리 그가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이렇게 시간이 미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학으로 옮겨가서인지 간유의 혼사는 곧바로 결정이 되었는데, 그의 성혼 대상은 임양부의 정6품 통판(*通判: 지부(知府) 아래 세금으로 걷은 양곡을 운반하거나 농사일, 수리(水利), 소송(訴訟) 등의 사무를 담당. 감찰관의 기능을 겸함)직 관리의 여식이었다.
두 사람은 작년 말에 성혼식을 치렀는데, 지난 8월 고청운의 손자가 막 태어났을 때, 간유의 아내 역시 회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장모님이 아주 만족할 만한 속도였다.
이 일 때문인지 장모님이 보내온 서신에서는 그간 팽배했던 초조함은 사라지고, 기쁨과 기대감이 넘쳐흘렀다.
“잘 지내시죠, 저희 아버지께서 여전히 교편을 잡고 계시니 말이에요. 현학에서 지내실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간유가 이어 대답했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꺼운 문발이 춤을 추듯 나부끼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바람이 부는구나, 왜 따뜻한 집 안에 머무르지 않고 굳이 이리 밖에 나와 있느냐?”
정자에는 문이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바람만 불면 문발이 출렁거려 화롯불에서 뿜어져 나오던 온기가 금세 사라지고는 했다.
보통 매화꽃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고청운과 간미는 겨울에 단 한 번도 정자에 나와서 오래 앉아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날씨가 춥다고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갑갑한데, 모처럼 오후에 해가 나와서요. 작은 외숙과 함께 정자에 자리를 잡아보았습니다.”
고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청운과 함께 안채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설명했다.
상황을 보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던 간유는 그만 고청운의 부름을 듣고 행동을 멈추었다.
“처남, 내가 어젯밤에 내준 숙제를 다 마쳤으면 내 서재로 가져다 놓게.”
“……매형, 아직 답을 다 못 썼습니다.”
두 편의 책론 문제를 숙제로 내 주었기에 내용이 좀 편파적이었던 탓에 그는 자료를 더 찾아 보충해야 했는데, 어찌 그리 빨리 작성해서 줄 수 있겠는가. 그가 대충대충 답을 작성했다가는 매형한테 되레 혼이 날 것이었다.
간유는 고씨 가문 문중의 일부 친척들이 아직도 자신이 경성으로 건너가 매형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게 생각났다. 허나 그들이 매형의 엄격함을 몸소 체험해 보면, 매형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부러워하는 마음이 싹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간유는 중압감이 매우 심했다.
“하루나 지났는데도 아직 못 썼다는 말인가?”
고청운이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험장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주는 줄 아는가? 어디 곰곰이 생각하고 천천히 책을 넘길 시간이 주어질 것 같냐는 말일세. 더 속도를 내야 하거늘.”
“알았습니다, 매형.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내일까지는 다 마쳐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간유가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고청운은 그가 월성에서 돌아 온 지 이틀이 안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는 겉보기에 건강해 보였지만 그래도 아직 제대로 다 쉬지 못했을 테니, 고청운은 그를 닦달할 수가 없어 목소리를 누그러트리고 말했다.
“되었네, 천천히 쓰게. 며칠 지나면 반드시 속도가 빨라질 걸세.”
간유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밖으로 나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숲속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곧이어 고청운과 고경은 안채로 건너갔다.
* * *
간미와 연 씨는 토항(*土炕: 침상 아래 불을 때는 중국식 난방)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아, 오늘 노씨네 사람들은 잘 만났소? 노개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고청운은 토항에 오르지 않고 화로 옆에 앉았다.
사내아이는 성혼을 좀 늦출 수 있었다. 출세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내들이야 나이가 많아도 묘령의 여인을 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지만, 여인은 문제가 달랐다. 일찍 상대를 알아봐야지, 괜히 성혼이 임박하여 혼처를 알아봤다가 점찍어 놓은 사내가 이미 다른 혼처에 이끌려 가버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일생은 나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인 만큼, 고청운과 간미는 고경의 성혼 문제에 더욱 신경을 썼다.
고청운의 말을 들은 간미와 연 씨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외할머니와 마침 딱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군, 오늘은 노 시랑의 큰 마님이 노씨 집안의 막내자제를 데리고 저희 집을 방문했는데, 말씀하시기로는 우리 집 량가아가 자기 아들의 병환에 잘 보살펴 준 것에 대한 감사드리러 왔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 집안 막내자제는 얼굴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바람이 쌩하니 부는 것 같습니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말수가 적어 냉랭해 보였지요.”
간미는 고경을 옆에 앉히고, 그녀의 손을 만지며 계속 말했다.
”제가 량가아한테 물었었는데, 노씨네 막내자제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 맞고, 말수가 좀 적은 것을 빼면 다른 건 다 좋다고 합니다.”
‘설마 또 안면신경이 굳은 것 같은 자가 하나 더 나타나는 건가?’
고청운은 육택을 가장 먼저 떠올렸는데, 두 사람이 때로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경우 혹은 연회석상에서 우연히 만나더라도 그는 늘 간결하고 힘 있게 자신을 대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서로 사정만 괜찮으면 함께 식사하기도 하였는데, 한 끼 식사를 나누는 동안 그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몇 차례 계속되어 오면서 고청운과 그는 식사 후에 그대로 헤어지기도 했고, 아주 가끔씩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다.
‘말수가 적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지.’
고청운이 참지 못하고 손을 비비며 고경을 한 번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책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청운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우리 소아도 말수가 적은데, 좋지 않은 것 같구나.”
고경은 고개를 들어 그리 말하는 연 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마저 책을 읽어 내려갔는데, 꿈쩍도 안하는 모양새로 계속 책장을 넘기며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간미와 연 씨는 수줍은 기색이 없는 그녀를 보고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흐뭇해했다.
그들이 정말 실망한 것은 오늘 온 용모가 아리따운 노개운이라는 소년이었다. 그는 으레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인사를 나누기 위해 고경을 마주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고경이 성혼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해 그들을 놀라게 했다.
헛기침을 한 간미는 고청운이 귀담아듣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 노씨 집안의 부인의 말에 의하면, 노씨 집에는 우리 진가아보다 한 살 아래 친여동생이 있다고 합니다. 얼마 후 노씨 집안의 부인이 산동 지역에서 직접 그녀를 데리고 경성으로 넘어온다고 하시네요. 과거 준비를 해야 하는 노씨 집안의 막내아들을 돌보기 위해 상경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모두 동향 사람들이 아니오.”
고청운은 산동 지역의 지부직을 수임하고 있는 노 대인을 생각하며 약간 부담을 느꼈다. 자신의 관직 품계가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낮다고 느낀 것인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처럼 혼사 문제를 논하다 보면 으레 자신의 품계가 낮다는 것이 느껴지고는 했다.
“네.”
간미가 급히 응했다.
방 안 모두가 여인들인 것을 본 고청운은 고영량이 지금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물어본 후, 밖으로 그를 찾으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