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마중
이번에 고청운은 사장정을 찾지 않았는데, 이번 책은 그 혼자 집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편집자 격으로 일을 지휘한 것 외에 이 서적의 집필에 참여한 사람이 10명에 달했기에, 그들과 상의한 끝에 간행 및 인쇄 작업을 왕가준에게 맡기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왕씨 가문은 그들의 실험 및 연구를 후원하는 재력가였다. 사합원의 사람들은 항상 작은 실험들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열기구 같은 것이 그랬다. 이런 실험에는 돈이 들었는데, 왕가준이 마침 이런 일들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재력까지 대단한지라 후원의 방식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왕씨 가문 말고도 다른 두 명의 상인 집안에서도 이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기간이 왕씨 가문만큼이나 오래되지는 않았다.
“스승님, 안심하세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간행물을 완성해 내겠습니다.”
왕가준이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미 자식을 넷이나 둔 아버지가 된 그는 풍상고초를 겪은 의젓한 얼굴을 갖게 되었다. 그는 백인 여자를 첩으로 두고 있었는데, 고청운도 단 한 번밖에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 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아들이 정말 귀엽게 생겼다는 건 기억할 수 있었다.
왕가준은 수재 시험에 합격한 후부터 계속 공부를 하지 않고, 가족들의 상선을 따라 바다로 나가 여러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그가 뭍에 오를 때면 경성을 찾아 자신을 보러 올 때마다, 항상 그간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며 바깥세상의 새로운 일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귀경하면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가지 않을 것이었는데, 그의 부친인 왕박의 나이가 이미 연로하여 집안의 사업을 그에게 넘기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왕가준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자네를 믿고 있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다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지난번 서신에서 고영량은 9월 말에 출항한다고 하였는데, 그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아서 가족들 모두 초조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청운은 매일같이 부두에 사람을 보내 대기하게 하며 그들과 관련된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고, 공들인 보람이 있는지 마침내 11월 6일, 고영량 일행이 경성에 도착했다.
2년 만에 만난 고영량을 보고 가족들은 매우 감격스러워했는데, 특히 간미와 고경은 눈물까지 훔쳤다.
고향집 사정을 자세히 물어보니 모든 것이 평소와 같기에, 고청운은 잠시 안심한 후 겨우 다른 것을 물어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들이 제일 기뻐했던 것은 손자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실물과는 그리 닮지 않아 초상화를 보자마자 누구를 닮았는지 바로 알아맞힐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막대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었다.
“좋구나, 과연 아버지가 되더니 예전과는 좀 달라졌어.”
고청운은 고영량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의 턱에 돋아난 수염을 훑어보다가 고된 여정에 피곤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먼저 씻으러 가게 했다.
간유는 일찍이 연 씨에게 이끌려 옆집 방택으로 건너가 있었다.
“아버지!”
고영량이 등을 곧게 펴고 대뜸 씻으러 가라 하는 아버지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방인소는 고영량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나다니, 그간 부모님이 보고 싶었지? 노부가 보아하니 울 것 같은 모습이구나.”
그러자 고영량은 잡고 있던 고청운의 손을 놓고 와서 방인소를 껴안으며 말했다.
“저는 외증조할아버지가 더 보고 싶었는걸요, 하하.”
고청운은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방인소는 득의만면하게 웃다말고 고영량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고는 말했다.
“어쩐지 이 노부를 끌어안는다 했어, 몸에서 이 무슨 냄새냐……. 어서 빨리 씻고 오너라,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간미마저 이를 거들어 채근하자, 그제야 고영량은 자신이 기거하던 정원 쪽으로 향했다.
* * *
세수와 양치를 마친 고영량과 간유는 푸르른 채소와 함께 죽을 한 그릇 먹어 배를 채웠고, 가족들은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지켜보았다.
겨울에도 온수와 온실을 이용해 채소를 심는 기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 채소 값이 좀 비쌌기에 그들 집은 대부분 무나 배추를 먹고 콩나물 정도나 스스로 조금 키워서 먹는 정도였다.
지금 여기 상 위에 오른 채소는 특별히 간미가 사람을 시켜 사오게 한 것들이었다.
“중간에 일이 생겨서 며칠 지체되었어요.”
고영량은 그릇을 거의 다 비우고 나서야 그들이 늦게 돌아온 연유에 대해 설명했다.
고청운은 함께 배를 타고 온 거인 하나가 도중에 병이 나서, 일정에 지장이 생겼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 병이 났던 거인의 이름은 노개운(卢开云)으로, 올해 17세라 동생보다 한 살 많아요. 그는 군성 동안현(桐安县)에 호적을 둔 노씨 집안 자제인데, 동생과 같은 해 향시에 합격한 동기입니다. 그가 원시는 안수로, 향시 때는 아원으로 급제했다더군요. 제가 오는 내내 보니 사람됨이 참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느 부잣집 자제 같지 않았어요.”
고영량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네 동생과 그의 관계는 어떠하더냐?”
고청운이 이어서 물었다.
“그들은 절친한 사이입니다.”
고영량은 간유를 힐끗 보았다.
간유는 지금껏 맹렬히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나서 그제야 말을 받았다.
“매형, 안심하십시오, 노개운은 사람됨이 좋아보였습니다.”
고청운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인소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공부의 우시랑 노 대인을 떠올렸는데, 그의 고향집도 군성 동안현에 위치해 있으니 노개운과 한 집안 식구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노개운의 아버지가 산동성에서 지부로 있는 것을 생각하면, 두 노씨 모두 사촌 지간일 테니 그 기세가 대단해 보였다.
고청운은 더 생각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그는 고영량과 간유가 식사를 마치고 정원을 한 바퀴 돌게 하여 소화를 시키게 한 후, 얼른 쉬게 각자의 처소로 들여보냈다. 그들 눈 밑의 검은 자욱이 맺힌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움이 들었다.
이번에 상경한 사람은 이 두 사람 외에도 하지, 장연해가 더 있었는데, 하지는 지금 하겸죽의 집으로 갔고, 장연해는 자연히 장씨 집안으로 가 있었다.
상성에서 지내던 고청운의 사촌 형 진교는 이번에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하여 상경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그가 3년을 더 공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어 개의치 않았다.
* * *
다음 날 오전, 고영량은 국공부에 갔다. 고청운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방희림이 보내온 서신을 받았는데, 그의 큰아들 방정심(庞庭深)도 경성으로 올라와 시험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청운은 이를 알고 깜짝 놀랐다. 그의 큰아들은 고영진보다 반 살이나 어린데, 벌써 회시를 치르러 경성에 왔던 것이었다. 서신의 더 아래 내용을 내려다보던 고청운은 그 꼬마가 이미 상성의 해원(解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방희림의 대를 이을 인물이 나왔다는 사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즘은 한 세대를 거듭해 내려갈수록 아이들이 더 대단해지는 것 같구나.’
‘방정심이 방희림의 한 번 본 것을 잊지 않는다는 그 대단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걸까?’
그 대두 탐화가 지닌 대단한 능력이 떠오르자, 고청운은 너무 부러워졌다.
고청운은 자신뿐만 아니라 과거를 준비하는 온 세상의 문인들 모두가 그 능력을 부러워할 것이라고 믿었다.
옆에 있던 집사 방충이 그가 서신을 이미 다 읽고 다시 접어 정리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나리, 문지기가 노씨 가문에서 보내온 첩자(*帖子: 초대 혹은 초청하는 글)을 받았습니다만, 노 시랑 댁의 큰 마님께서 노개운 도련님과 함께 내일 저희 집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노개운?’
고청운은 노개운을 떠올리니 공부의 노 시랑이 연상되었고, 또다시 노 시랑의 큰아들도 떠올랐다.
‘그는 아직 거인의 신분이었지 아마?’
이에 고청운이 말했다.
“량가아와 부인한테 전하거라, 그들이 손님들을 접대하게 하면 될 게야.”
이 시대의 가정집 방문은 일반적으로 모두 먼저 첩자(帖子)를 건네며 약속 시간을 정한 후에 이루어졌는데, 그들 집에는 고영량이나 간미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향 출신이라는 관계 때문인지, 그간 노 시랑의 고청운에 대한 태도는 아주 친절했다. 그의 이전 상관들은 대부분 그에게 공적으로 굴고 사무적으로 대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니, 고청운은 잠시 동안 정말 익숙하지가 않았고 혹여 자신이 집무를 소홀히 처리하여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까지 되었다.
‘혹시 나는 학대를 받아야 일이 더 잘되는 성향이라도 있는 걸까?’
고청운은 자조했다.
* * *
이튿날 오후, 퇴근 시간이 되어 고청운은 책상 위에 반듯하게 업무 자료를 정리해 놓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일종의 성취감이 뒤따랐다.
‘음, 오늘은 야근할 필요 없이 제때 집에 돌아갈 수 있겠군.’
최근엔 날씨가 추워져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고, 선박을 제작하는 공방 역시 며칠 전에 주문서 발주를 마쳐 당분간 새로운 주문서가 들어오지 않아서 한가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신경을 빙고에 얼음을 채우는 준비 과정에 쏟고 있었는데, 적당한 때가 도래하면 얼음을 파서 빙고에 보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모두들 신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유가 아닌가.’
고청운은 공부의 문을 나서면서 벽 너머 집무실을 쓰고 있는 왕 원외랑과 마주쳤고,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함께 밖으로 나갔다.
고청운은 망토를 걸치고 말 위에 올라앉아 자신의 뒤편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왕 원외랑을 한번 뒤돌아보았는데,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왕 원외랑이 도수사(都水司)로 전근되어 와서 자신의 아랫사람이 된 후부터 둘의 관계에는 뭔가 미묘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신경 쓰지 말자.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 여부는 인연에 달린 거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많은 길을 걸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기도 하지 않은가.’
고청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고는 가볍게 말의 배를 차고 고삐를 당겨서 바람 속을 질주했다.
고청운은 문득 작년 초에 경성에 도착해 시험 준비를 하게 되면서 자신에게 만남을 청하는 첩자를 넣었던 조문헌을 떠올렸다. 그때 고청운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를 만났었다.
그 한 번의 만남에서 고청운은 조문헌이 몹시 깡마르게 여위고 눈과 광대가 불룩 튀어나와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까칠하고 어두워 보인다고 느꼈다.
조문헌은 끝도 없이 알랑거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겨우 자존심만 유지한 채 자신을 대했다. 고청운은 그런 조문헌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 그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다.
조문헌은 어릴 때 거만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눈앞의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는 고청운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정말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결국 고청운은 그 만남의 자리에서 냉랭한 모습을 보이며 화해의 기미를 전혀 내비치지 않게 되었고, 조문헌 역시 자신을 화나게 할까 봐 혹은 다른 어떤 연유에서인지 몰라도 그 후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하겸죽과도 왕래를 끊어버렸다.
고청운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해졌는데, 이미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찾아올 필요도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상 찾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일을 생각하던 고청운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집에 도착해 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