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381)화 (381/504)

381화. 고향 (1)

주임 시험관 혹은 부시험관으로 부임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힌 고청운은 틈틈이 책을 쓰고 있었다. 공부는 업무가 바쁘고 자주 출장을 가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재와 경험을 많이 쌓아가며 또다시 많은 것을 얻었던 것이었다.

그는 유명한 장인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고도 웬만한 공사들의 허가 여부와 공정 과정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에, 공사의 견고함과 들어간 재료가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그가 쓴 <기하상해>와 그가 번역한 <측량학>은 10월 말에 모두 원고가 완성될 정도로 진도가 빨랐다. 이에 그는 관행을 따라 다른 산술 학계 대선배들에게 보여 조언을 얻고 서문을 부탁드렸다. 

이때 월성에 있던 고영량은 고청운으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 * *

월성 임계촌에서 고영량은 문중의 족학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마음속으로 방금 전에 만난 두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족학이 설립된 지 이미 꽤 오래된 덕에 좋은 싹이 두 명이나 나온 셈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틀림없이 기뻐하실 거야.’

이런 일을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고향집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편지를 전하러 온 상인과 마주쳤고, 답례금을 드린 후 지체없이 그가 가져온 목함을 살폈다.

고영량은 목함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응접실에서 열어보았는데, 안에는 두꺼운 서신 몇 통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는 외할머니에게 드릴 것도 있었고, 그의 처에게 줄 것, 그리고 외숙에게 전할 것도 있었는데, 옆에 위치한 북산현 장씨 집안으로 보낼 것과 심지어 도화진의 하씨 집안으로 보낼 것까지 있었다. 

매번 서신을 보낼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절약을 해야 한다며 몇 집에 보낼 서신을 함께 모아서 보내고는 했다. 

고영량은 자신의 이름이 쓰인 서신도 찾아냈는데, 글씨가 온실하고 침착한 것이 자신이 잘 아는 해서체로 쓰인 서신이었다. 급히 서신을 펴서 읽으니, 음, 먼저 이곳 어른들의 안부를 물은 후, 외증조할머니와 외증조할아버지가 모두 편안히 잘 계신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고, 여동생도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다고 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것을 점점 싫어하고, 혼자서 조용히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책을 볼 때의 표정이 엄청나게 굳어져 있어서 꼭 무슨 하늘을 울릴만한 큰 철학적 사고나 인생에 있어 아주 큰 사건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는 그저 별일 없다고만 적은 후, 그저 자신들이 그립다는 말만 전했다.

‘하하, 아버지께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다니.’ 

고영량은 정말 쑥스러워, 참지 못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는 부모님이 적은, 서로 다른 필체를 보며 다른 가족에 대한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동생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보이자 뜯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이내 충동을 억누르며 목함을 들고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 * *

하인들의 잇따른 절에 고영량은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고는 성큼성큼 뒤뜰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는 초목이 무성했고, 몇 그루의 큰 나무만이 가을바람에 온통 황금빛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 정원은 새로 지은 것으로, 사중정원의 규모를 지닌 사합원 형식의 저택이었다. 청색 벽돌과 기와로 지어져 있었는데, 튼튼하고 사용된 재료도 훌륭하여, 할아버지는 백 년 동안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지었다고 말했었다.

첫 번째 정원에는 응접실, 객실, 문간방, 사랑채, 하인의 숙소가 있었고, 두 번째 정원에는 그와 동생이 사는 곳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세 번째 정원은 바로 이 저택의 안마당이었는데, 이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거처하고 있었다. 마지막 정원은 바로 후원으로, 대나무 숲을 끼고 있어 평소에 조용해서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여기서 살고 있었다.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도 이 후원의 곁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경성의 이중정원 형식으로 지어진 사합원들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고 공간을 넓게 쓸 수가 있었다.

이제 이곳은 자신의 가문이 번성하게 될 곳이었다! 고영량은 이 저택이 다 지어진 후 부모님께서 돌아와 보신 적이 없다고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순간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건강 상태도 생각이 났다.

“얘야, 네 아버지가 또 서신을 보내신 게냐?”

고영량이 안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고대하는 낯익은 목함을 보더니 두 눈이 번쩍 뜨이는지 희색이 만면하여 얼른 자신이 들고 있던 작은 괭이를 집어던졌다.

고영량은 화단의 푸른 쪽파와 무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서신이 왔어요. 별일은 없으시다고 하세요.”

“어찌 아무 일도 없을 수가 있느냐?”

고대하는 먼저 물통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 손을 깨끗이 씻고 대충 옷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 아비가 승진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느냐, 정5품인 공부낭중 직무가 분명 매우 바쁠 터인데……. 저번에도 자주 경성을 벗어나 출장을 간다더니, 우리가 있는 남쪽이야 날씨가 그런대로 따뜻하지만, 경성 쪽은 분명 추워졌을 게 아니냐. 날씨가 추워지면 밖으로 시찰을 다니기 나쁠 텐데.”

고영량은 순간 숨이 막혀서 헛기침이 삐져나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직 조정의 관직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관직과 직무에 대해서만은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계셨을까?’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현성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했을 때, 고영량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경력을 마치 가보 다루듯 구는 것을 보고 마음이 먹먹했다.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를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경성에서 온 서신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고영량이 집사 왕순(王順)을 불러 분부했다.

“왕씨 아저씨, 여기 적힌 주소에 맞게 서신들을 전해 주세요, 예전처럼 말이에요.”

왕순은 황급히 응낙하며 그 길로 바로 집을 나섰다.

잠시 뒤, 여종이 건너와 후원의 고계산과 노진씨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알려왔고, 가족들은 급히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제때 고청운의 서신을 보이지 않았다가는 두 노인분들이 화를 많이 낼 것이었다.

* * *

“전자가 또 승진을 한 게로구나. 좋아, 아주 잘했다. 잘되었어.”

머리카락이 거의 다 하얗게 세어버리고 몸이 비쩍 마른 고계산은 등받이용 베개에 비스듬히 누워 실눈을 뜨고 서신을 읽다가 얼굴의 주름이 다 펴질 듯 입을 벌리더니, 말들을 띄엄띄엄 내뱉었다.

“우리 집 전자가 크게 출세했구나. 전자 애비야, 경성에 답장을 보낼 때 잊지 말고 이 내용을 적거라. 경성에서 마저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이다. 우리 고씨 가문에서는 여태껏 이렇게 유능한 사람이 나온 적이 없었지 않으냐.”

고대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고계산의 눈이 이미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정도라는 것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몇 글자를 익히기는 했으나, 다년간 글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이미 글을 잊은 지 오래였다. 

다만 다들 언급하지 않고 그저 그가 보고 느낀 대로 내버려두었고, 그에게 제대로 내용을 정정해 드리지도 않고 있었다. 저번 서신의 언급을 통해 고청운의 승진 소식은 이미 전한 바가 있었지만, 고계산은 뇌졸중 징후가 있어 어떤 일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고 마치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은 양 기뻐했다.

고계산은 서신을 한참 동안 다시 읽다가, 바로 옆에 있던 노진씨가 성화를 하자 마지못해 건네주었다.

가족들은 두 노인을 더 잘 보살펴 드리기 위해 두 분이 한 침상에서 잠을 자지 말고 각자 다른 침상에서 자도록 했는데, 두 침상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고계산에 비해 노진씨의 상태가 훨씬 건강했으나, 일전에 풍한에 시달렸다가 회복하고 나서도 몸이 예전만큼 회복되지 못하고 약해져 있었다. 이는 나이 탓으로, 가족들은 속절없이 그들이 노쇠해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소석아, 네 아버지께 서신을 써서 전해 주겠니? 나와 네 아비의 할아버지 모두 건강하니 우리 걱정은 말고 그저 폐하를 위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네 아비의 아버지와 숙부가 돌봐 줄 테니, 그저 경성에서 제 몸과 처를 잘 건사하라고 전해 주련.”

노진씨가 단숨에 말을 끝마치시고 크게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영요가 얼른 탁자에 있던 따뜻한 물을 따라 소진씨에게 건넸다.

소진씨가 노진씨에게 물을 먹여드리고 나자, 고계산이 휘청거리며 물었다.

“소석아, 너랑 소어는 언제 시험을 치러 가느냐?”

고영량은 이 말을 듣자마자 눈시울이 뜨거워져, 얼른 마음을 진정시키며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증조할아버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내년 8월이면 소어가 향시를  보러 가는데 합격하면 거인이고, 내후년에 바로 회시 시험을 보러 가서 급제하면 진사가 됩니다.”

고계산과 노진씨는 만약 자신들이 어떻게 되면, 증손자들이 반년 동안 복상 기간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줄곧 시험 시간에 대해 물어봤다.

고영량은 마음을 추슬렀다. 처음에 그는 애매한 시간으로 답했지만 두 노인을 속일 수 없어 결국 사실대로 말해야 했는데, 고계산은 기억력이 떨어져 자주 잊어버리는 통에 자꾸 되물었다. 

“진사가 좋지, 진사는 벼슬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한참 만에야 고계산이 반응하여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비슷한 대화가 수없이 오갔지만, 고영량은 매번 진지하게 답했다.

* * *

그 후 고영량은 증조부모가 모처럼 정신이 맑은 것 같자, 부축해 나가서 햇볕을 쬐려고 했다. 지금은 마침 한낮이라 햇볕이 따사롭고 바람도 없기에 든든하게 차려입고 정원 정도는 산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고계산은 고영량과 고대하의 부축 하에 정원을 산책했고, 노진씨는 별도로 부축받지 않고 지팡이를 이용해 산책을 했다. 

하지만, 영요와 소진씨는 그녀가 걱정이 되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보통 별다른 일이 없는 경우, 가족들은 할 일을 아랫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고계산을 부축하여 대화도 나누면서 산책을 했다. 그렇게 하면 두 노인의 기분이 매우 좋아졌던 것이다.

오늘따라 고계산과 노진씨의 기분이 유달리 좋았는지, 동네 어귀까지 바람을 좀 쐬러 가자고 난리였다. 할 수 없이 가족들은 두 노인을 대문 앞 뱅골보리수 아래까지 부축해 걸어갔는데, 그쪽에는 벌써 다른 집 시어머니와 며느리들, 아저씨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눈치 빠른 하인이 마을에 가서 한가한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셔 온 분들로, 평소 대문 앞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고계산과 노진씨가 조용하게 요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고씨 가문은 동네의 명망이 두터워, 마을 사람들은 쉽게 방해를 하러 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여종들이 남아 고계산과 노진씨를 돌봐 주는 걸 보고, 그제야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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