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묵계(默契)
“……잘됐구나.”
고청운은 서신을 읽고 나서 기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소어가 15살에 수재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오. 내 바로 답장을 하여 칭찬을 해 주어야겠소.”
까딱 방심하면 어렸을 때 부르던 아명이 자꾸 튀어나왔다.
“1등은 누가 했답니까?”
간미가 급히 캐물었다.
“군성 내의 한 소년인데, 이름은 노개운(卢开云)으로 올해 16살이라고 하는군요. 음, 내 알기로 그의 부친은 지부(知府)이고, 장 형과 같은 진사 동기라오.”
고청운은 손가락으로 서신에 적힌 이름을 쓰다듬고는 웃으며 말했다.
“소어가 서신에서 쓴 내용을 보니 상대방에게 매우 탄복했나 보오. 그래도 다행이구려, 나는 그 아이가 분개할 줄 알았소.”
고청운은 아이들이 살면서 좌절을 겪어보지 않는 게 더 두려웠다.
고영진이 서신에 쓰기로는 큰형만큼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여 아쉬움이 컸다고 밝혔으나, 고청운은 이 정도면 아주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간미는 어머니가 보내온 서신을 다시 잘 접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고청운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갑자기 거두며 말했다.
“병세는 잡혔으나, 이제 계속해서 몸조리를 잘 해내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그가 밝히지 않은 것은 두 어르신이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고계산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만 누워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노진씨는 줄곧 굳세게 잘 버텨내는 것이 의외였다.
고계산이 병으로 쓰러지자 그녀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며 누가 말려도 듣지 않다가 고계산의 병세가 호전되자마자 덩달아 몸져누워 집안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하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남은 날은 길게는 1, 2년, 적게는 몇 개월 정도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청운은 관직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휴가를 신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경성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미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아니면 저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병수발을 들어드리는 건 어떨까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고청운은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도 그런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아직 경성에 남아 있는 방인소와 자신과 얽혀 있는 관계들이 생각나 잠시 그 생각을 접었다.
“집에는 량가아 형제가 있으니 되었소. 또 우리 아버지와 숙부님도 함께 계시지 않소. 게다가 당신은 경성에서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지 않았소.”
고영량이 상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고계산을 배려하기 위해서도 있었고, 임산현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덕에 독서를 하기가 좋았기 때문도 있었다.
방인소는 처음엔 고영량의 선택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2년 후면 다시 과거 시험을 봐야 하므로 차라리 귀경해서 준비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경성은 학문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하므로, 자신과 함께 있으면 더 많은 지도를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만 고계산과 노진씨의 상황을 생각해 타협했을 뿐, 더 이상 이와 관련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험이야 3년에 한 번 이뤄지니 이번에는 안 되더라도 앞으로 여러 번의 기회가 있을 테지만, 효도할 기회는 놓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고영진에게는 고영량이 함께 있으니, 개인 교사가 하나 있는 셈이었다.
“요아가 좀 억울하게 되었소, 국공부 집안의 아가씨가 시집와서 인사하러 고향에 내려간 건데, 이리 오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으니 말이오.”
간미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 결정에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 결정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질지도 모르겠어요.”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마도 별일은 없을 것이었다. 큰아들은 서신에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물론 내색하지 못하는 게 정상일 것이기는 했다.
“량가아가 잘 처리할 것이오.”
고청운은 맏아들의 처신과 맏며느리의 인품에 대해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 * *
저녁 무렵, 교외로 산책을 다녀와 귀가한 방인소와 연 씨가 고영진의 수재합격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이렇게 되면 내년 8월에 진가아와 유가아(*간유)가 함께 향시를 치르겠구나?”
연 씨는 문득 이 생각에 미쳤다.
“유가아가 작은 외숙으로서 만약에 조카 앞에서 또 낙방하게 된다면, 체면이 참…….”
그녀는 혈연관계이자 유일한 외손자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높았다. 특히 간유는 언행이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용모가 준수했고, 입에 발린 말도 곧잘 했으며, 재롱도 잘 피웠기에, 얼마간 경성에 머무르면서 신속하게 연 씨의 마음에 들어왔다.
고청운과 간미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시험에서 조카를 이기지 못했던 일이야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고경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까맣게 빛나는 눈으로 고청운과 간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방인소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오? 조카 숙부간이 아니고 부자지간에도 동시에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할아버지까지 포함해 3대가 함께 시험장에 가는 일도 있지 않소. 시험을 못 치렀으면 그냥 잘 못 본 것이지, 설마 우리 진가아가 작은 외숙의 체면을 봐주려고 일부러 떨어지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오? 그 못난 놈…….”
고청운이 그 말을 듣고 급히 입을 열었다.
“할머니, 안심하세요. 처남이 지난번 상경해서 철도 더 들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스승님께서도 직접 가르치셨고, 집에는 장인어른까지 계시니 이번엔 시험을 잘 볼 겁니다.”
간미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원시에서 큰언니네 단삼(丹参)이도 수재에 합격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석차는 꼴찌지만 소원 성취를 해, 언니들이 아주 기뻐할 것 같습니다.”
“하가네 말이냐?”
방인소의 기억력이 참 좋았다.
“노부 기억으로는 그의 올해 나이가…….”
그는 속으로 계산만 하고 한참 입을 떼지 못했다.
고청운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큰조카가 우리 큰아들보다 딱 10살 위라 올해 29살입니다. 수재가 되기가 참 쉽지 않지요.”
집안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어린 나이에 수재가 되다 보니, 쉽게 붙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금물이었다. 사실 대다수의 상황에서 일반적인 한미한 집안에서는 30세 정도에 수재에 합격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방인소는 그 말을 듣자마자 흥미가 사라진 듯 중얼거리며 말했다.
“거인은 마흔이 되기 전에 안 되면 재시험을 볼 필요가 없고, 진사는 쉰이 되기 전에는 합격해야 하지.”
고청운도 그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그는 두 번의 부시험관을 역임해 오면서 너무 나이가 들어 시험에 합격하고도 몇 년밖에 일을 할 수 없을 바에야 이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좀 젊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조카는 몇 번 더 기회가 남아 있었다. 이런 경우는 많이들 보았을 것인데, 이런 예가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몇십 년 동안이나 낙방만 하다가 한 번에 동생에서 진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다들 한 번 운수가 트이기만 하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현실은 이렇게 잔혹한 법이라, 비록 늙을 때까지 공부야 배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정말로 어느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합격할 확률이 갈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벌써 과거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산술 문항 같은 것은 정답이 정해져 있으니, 자신이 푼 문제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향시를 생각하며 내년 향시에 주임 시험관을 신청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이제 공부에서의 일도 많이 순탄하고 점입가경에 이르고 있으니, 한동안 자리를 떠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왕령지(王翎知) 원외랑을 떠올리니 안 될 것 같았다.
왕령지가 떠오르자, 그는 주임 시험관을 신청하려던 생각을 접었다.
정5품 공부낭중(工部郞中)이 된 고청운은 사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이제 그의 직속상관은 정3품의 공부 우시랑(工部右侍郞)이었다. 그만큼 교제 범위도 한 단계 더 발전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고청운은 자신이 주임 시험관으로 가 있는 동안, 왕령지가 자기 몰래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왕령지는 예전에는 축국 경기를 통해 말을 잘 섞을 수 있는 친구였지만, 관가에 새로운 관계에 놓이게 되자 그리 돈독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고청운은 왕령지가 호탕한 성격을 가져 속에 무엇을 담아두지 않는 북방의 사나이임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일에서 쉽게 손을 떼어 권한을 넘겨주진 않을 것 같았다.
현재 태자의 지위는 미묘한 위치에 처해 있어 태자와 황제 사이는 어색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둘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 황후가 나서도 소용이 없을 정도였다.
그랬다, 어렸을 때 존재감이 별로 없던 대황자가 지금은 이렇게 똑똑해졌다는 것은, 겉으로는 태자와 경쟁할 엄두가 나지 않아 하면서도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하면 될 터였다. 또 태자보다 조금 더 어린 형제들과 후궁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 사이에 관련된 풍문은 하루종일 떠들어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황제는 40세에 즉위를 했다. 이후 22년을 통치하며 올해 62살이 되었고, 대황자는 29세, 태자는 22세가 되었다. 뒤의 황자 몇 명들도 모두 이미 18세가 넘었는데, 다들 지금껏 건강관리에 힘써 왔는지 몸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장수하는 황제가 있으면, 그 아래의 태자는 매우 몸을 사려야 했다.
고청운은 자신이 황가의 일에 거리를 두는 것이 옳다고 여겼지만, 누군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면 또 아예 안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인지 최근 1년 동안 사장정은 그와 좀처럼 약속을 잡지 못했는데, 특히 그가 공부의 낭중 후보가 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지금 고청운은 자신의 또 다른 서적의 집필을 마친 것에 대해 감동하고 있었고, 며칠 후면 사장정과 제본 작업에 대한 상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인소가 내년 향시에 대해 물었고, 고청운이 시험관으로 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답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내년에 진가아가 시험을 봐야 하니 네가 아무리 같은 성에 있지 않다고는 하나, 너를 비난하고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게다. 때론 낙방한 수재 중 몇 명이 이런 문제로 딴지를 걸고 억지를 부려 추문을 만들기도 하지.”
고청운은 말이 없었다.
만약 그가 주임 시험관이 되면 월성에서 시험을 감독할 수 없겠지만, 낙방한 수재들은 그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네 아버지가 주임 시험관이기에 고영진이 부정을 저질러 미리 답안을 빼돌렸다고 모함할 것이었다. 필경 향시의 답안지에는 일부 시험 문제가 다른 성들 사이에도 똑같은 중복 출제되기 때문에, 논리적인 관계를 찾아 부정행위 가능성이 없음을 검증하기는커녕 질투가 많은 사람들로 인해 바람 잘 날 없는 상황이 야기될 것이었다.
그러나 주임, 부시험관은 모두 경성에서 파견되니, 모두가 경성의 관리들인지라 같이 일하는 동료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이름 정도는 서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부인할 수 없는 점은, 모두가 서로 간에 일종의 묵계(*默契: 암묵적인 약속)가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와 방희림의 경우,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이니, 월성에서 향시를 주관했던 방희림이 최종 순위에서 고영진의 답안지가 꼴찌로 떨어질라치면, 그를 10등 안에 두어 시험에 합격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관리들의 권력은 다른 사람이 반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방희림은 친한 동료의 조카들의 이름을 알기에, 답안지가 후순위 석차에 들더라도 당연히 합격시킬 것이고, 순위는 진짜 석차보다 당연히 조금 더 올려줄 터였다. 이것은 일종의 묵계로, 과거 제도가 생긴 이래로 이미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청운은 두 차례의 부시험관을 거치면서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 역시 묵묵히 이 암묵적인 규칙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가 지인의 조카를 뽑아주면, 지인 또한 자신에게 보답할 것이니, 분명 장래에 자신의 후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문인의 가문들이 이렇게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오죽하면 문관 가문의 인맥이 넓을수록 대대로 뛰어난 인재가 나온다고 하겠는가?
고청운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앞으로 고영진의 혼처는 최대한 문관 집안의 자제 중에서 찾아볼 요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