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인맥
“신지, 나는 초유가 부럽네.”
공봉명은 머리를 젖히고 청주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연거푸 술잔을 식탁 위에 겹겹이 올려놓았다.
“그의 조부가 이부상서직에 계시니 승진이 참 빠르더군! 3년에 한 번씩 승진이라니, 뒤로 밀리는 법이 없어. 조정의 법도가 엄격하여 파격적인 발탁도 없는데, 만약 그랬다면 그는 벌써 정3품에 올라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다 같이 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왜 나는 아직도 국자감에서 한가히 정6품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에게 술을 따라 준 고청운은 자신의 술잔을 들었고, 맑은 술잔에 잠시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한참 후에야 운을 떼었다.
“국자감은 좋은 곳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공 형의 인맥은 더욱 넓어질 겁니다.”
고청운이 위로를 건넸다. 가능하다면 그는 나이가 좀 더 들어 국자감에서 제주직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리되면 후손들을 위한 인맥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자감의 제주직은 종4품이라, 종5품에서 종4품까지 오르는 것 자체가 한계에 봉착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 공봉명과 비슷한 처지였던 방인소 역시 정5품을 몇 년이나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국자감에서는 그리 근심할 일이 많이 생기지 않았다. 제주직은 존경을 받는 직종이라 선호도가 높아 요구 조건도 매우 높은 편이었는데, 적어도 일부 학술계에서 출중한 면모를 보이고 덕망도 높아야 했다.
“인맥?”
공봉명의 눈이 빛났다.
“우리 제주님이 계신데 내가 어디 될 일이 있겠는가? 남들이 찾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 제주님이지, 내가 아닌 것을.”
고청운은 잠자코 있었다.
고청운과 공봉명은 같은 해 진사 시험에서 합격한 동기로, 함께 한림원에 들어가 6년 동안 머물렀는데, 고영량과 진교가 국자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면서 교집합이 많아져 지금은 둘이 가끔 술자리를 약속하고 한끼 식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번 식사 자리도 그랬다.
고청운은 이제 인사이동이 끝난 마당에 공봉명이 자신을 불러내어 인사이동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줄은 몰랐다.
“신지, 내가 지금 초유를 찾아가도 괜찮겠는가?”
공봉명이 술 한 잔을 더 마시며 나지막이 물었는데, 웃음기가 서린 것이 자못 무심코 지나치는 말인 것 같았다.
고청운은 어리둥절해졌다. 이전에 초유는 그들을 한곳으로 끌어들여 결탁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고청운은 이런 결탁에 대해 흥미가 없었던 반면, 공봉명은 경성 출신인 데다가 집안에 인맥도 좀 있었고 거만하여 초유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지금 다시 생각을 바꾼 듯했다.
초유의 조부는 이부상서이자, 구경(*九卿: 동아시아 국가에서 삼공에 버금가는 9명의 고관이나 그 직위) 중 한 사람인데, 임기가 앞으로 2년도 남지 않았다고는 하나 문벌의 급이 다르고, 게다가 태자와의 관계 또한 그야말로 두터워서 초유의 앞날은 걱정할 게 없었다.
고청운은 최근 2년 동안 그와 연락이 뜸했기에, 그의 태도가 변했는지까지는 잘 몰랐다.
“됐다, 이 말은 더 하지 말아야지.”
공봉명은 자신이 실언한 것을 알고 있는 듯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신지, 종민(钟闵)이라고 알지? 요즘 지방직에서 다시 경성으로 전근을 오는데, 이부로 들어가게 되어 낭중직으로 올라간다고 하네, 대단하지 않은가? 그는 누구의 도움을 얻어서 그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종민?’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관보를 통해 알았지요. 업무 인수인계가 끝나면 바로 귀경한다지요. 그때 서로 오랜만에 모여서 정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종민은 회시의 차석 합격자였는데, 전시에서는 공번충이 장원이었기 때문에 같은 산둥 사람인 그는 2갑의 3등으로 석차가 밀리며 담자례의 뒤 석차로 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
처음에 다 같이 한림원에 있을 때는 가끔 모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지방직으로 부임하게 되며 연락이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상경하게 될 수 있을지 몰랐다. 심지어 이부의 정5품 낭중이 되다니, 확실히 대단하기는 하였다.
“말해 보시게, 다른 사람들은 어찌…….”
공봉명은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으나, 눈이 몽롱한 것이 술에 취한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청운은 술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먹으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신지, 나는 가끔 자네가 정말 부럽네. 자네는 어찌 그리 복잡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가? 어느 진영에도 빌붙지 않고, 남들과 사귀느라 애쓰지 않으며, 잘나가는 이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도 않지. 그러면서도 벼슬길은 순탄하고, 생활도 규칙적이고, 책을 쓰고자 하면 그저 책을 내고 말이야.
말해 보게나. 자네 생활에 있어서 큰 즐거움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 자네는 운도 참 유달리 좋아. 늘 귀인들이 자네를 도와주는 것 같단 말이지.”
공봉명의 말투에서 시샘이 묻어났다.
경성 관원 간의 울타리는 여전히 매우 좁았다. 이들은 또 같은 해 시험에 합격한 진사 동기이기도 했으니, 서로가 각자의 생활 형편이 어떠한지, 조금만 알아보아도 훤히 다 알 수 있었다. 하물며 고청운은 명성이 자자하니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이 말에 고청운은 눈을 치켜떴다. 그도 물론 다른 대인들을 찾아다니기는 했던 것이었다. 하상 대인이나 백엽 대인 등의 인물에게 매년 꼬박꼬박 선물을 챙겨 드려야 했다. 이전에는 상성에 가서 향시를 주관하기 위해 한림원의 장원 학사를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그저 그는 이런 일들로 대인들을 찾아가는 횟수가 남들보다 적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지요. 하지만 공 형도 제가 실력을 겸비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고청운은 수긍하다가 그가 또다시 술을 마시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를 말렸다.
“그만 마시세요. 주전자 하나를 공 형께서 전부 마셨습니다. 술이란 몸을 상하게 하니 이렇게 많이 마시면 좋지 않습니다.”
그가 더 취하면 마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줘야 했는데, 고청운은 지난번처럼 남의 술주정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공봉명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그래, 그러지. 더 마시지 않겠네. 내 자네랑 있으면 이리 술도 맘껏 못 마실 줄 알았네.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하세나.”
고청운은 상황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공봉명은 요 2년 동안 많이 친숙해진 편이었지만, 어떤 말은 여전히 솔직하게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여전히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다.
집안 식구를 제외하면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지인은 방자명뿐이었고, 사장정에게는 선택적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다년간의 정치 경험이 그에게 알려주듯, 언제든지 신중하고 말을 적게 하면 반드시 탈이 없었다. 그는 이 비결을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갈고 닦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관직 생활을 해 오며 다른 이에게 큰 폐를 끼치지 않고 큰 원한을 맺지 않은 것 역시, 자신이 선택한 비결이 자신에게 맞는 길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같은 관가에서 몇 년째 머무르고 있는 공봉명 역시 겉으로 솔직함을 드러내는 유형의 성격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가 몇 년동안이나 국자감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섞여 지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이윽고 공봉명과 작별을 고한 고청운은 집으로 돌아갔다.
* * *
간미는 안채에서 마중 나와 그를 도와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마자 술 냄새를 풍기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술을 드셨습니까?”
고청운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자 급히 말했다.
“공봉명이 마신 술이오. 걸음을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마셔서 부축을 해 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술 냄새가 좀 옮겨온 것 같소.”
“그럼 다행이네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간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옷깃을 여미었다.
며칠 전 소보에 어떤 관원이 초임으로 부임했는데, 축하하는 자리에서 과음을 해 그 길로 세상을 떠난 사건이 발생해, 경사를 비극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 실렸었다. 그 기사를 본 그녀는 이후 술에 대해 경각심을 가졌다.
그녀는 비록 부군이 줄곧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음에도 우려스러워 언급을 한 번 한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던 고청운은 최근 큰아들의 성혼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간미가 어딘가 조금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갱년기가 온 걸까? 하지만 38살에 무슨 갱년기인가? 아닐 거다. 그저 혼사 준비로 바빠서 기분이 불안정해지고 화를 잘 내게 된 것이 틀림없어.’
여기까지 생각한 고청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슴에 얹으며 물었다.
“미아, 오늘은 집에서 무얼하며 보냈소? 요즘 직장에서의 일이 너무 바빠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느라, 집안일은 다 당신에게 떠맡겼구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소.”
이 말이 나오자 간미가 쑥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누군가 보고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왜 이리 말씀이 많아지셨습니까?”
고청운은 주위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 계집종들이 모두 눈치껏 물러난 것을 본 뒤 마저 말했다.
“이것은 내 진심이오만……. 요 몇 년 동안 집안이 당신 덕분에 이렇게 잘 유지가 되고 있소. 특히 당신의 안목이 아주 뛰어나 저택과 점포의 위치를 잘 선정해 구입한 덕에 임대료도 해마다 오르고 있지 않소? 아이들도 그렇지, 당신의 교육 없이 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잘 클 수 있었겠소? 어찌 혼자 그렇게 영리하고 철이 들 수 있다는 말이오? 이 집은 당신이 없으면 굴러가질 않소.”
“말로만 그저 저를 어르고 달래시는 거지요.”
간미는 머리를 들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삽시간에 사람의 기색이 밝아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서재 안으로 고경이 갑자기 들어올까 봐 정색을 하고, 손을 빼서 수건을 가져와 그에게 얼굴을 닦으라고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은 그저 평소와 같았지요. 소아가 저를 따라 라틴어를 배웠는데, 라틴어에 흥미를 꽤 느끼나 봅니다. 그 뒤 소아는 당신이 쓴 화본도 몰래 보았는데, 제가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어서 아이가 이미 화본을 다 읽은 후였습니다.”
고청운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화본을 읽었다고? 내 화본에 어린아이가 읽으면 안 되는 내용을 수록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는 언젠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애초에 진지하고 정상적인 범주의 내용들만 화본으로 엮어냈는데, 만에 하나 그런 부분이 전개되더라도 함축적으로 표현하여 넘기고는 하였다.
다행히 그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하면 배우게 하시오. 신부님께 데리고 가는 것도 좋겠소. 나중에 하루쯤은 데리고 나가 세상 물정을 많이 보게 하는 것도 좋겠군요.”
고청운은 마음이 꽤 복잡하여 간미를 보고 망설이다가 말했다.
“안심하시오, 딸아이의 나이가 아직 많지 않으니 말이오. 아이에게 남장을 할 수 있는 복장을 마련해 주시오. 최근엔 풍조가 많이 개방적이어서 여인들이 길에 많이 돌아다니니, 15살이 되기 전까진 조금씩 외출을 해도 괜찮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