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포기
고청운이 후원으로 돌아갔을 땐, 간미만이 안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청운이 묻기도 전에 간미가 말했다.
“외할머니께 그냥 들어가서 더 주무시라고 했어요. 소석이는 그저 회시 시험 한 번 보러 간 것인데, 두 분께서는 굳이 소석이를 직접 배웅하시겠다고 하시니……. 해야 할 말은 진즉에 다 건네셨는데도 말이에요.”
“직접 배웅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으시다잖소.”
고청운은 한숨을 내쉬며 간미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할 준비를 하였다.
“참, 소석이한테 인삼주를 챙겨 주었소?”
잠들기 전, 고청운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챙겨 주었죠.”
간미가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했다.
고청운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날씨는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고 있었는데, 요 며칠은 추웠다. 원래 봄이라는 계절은 질병이 많이 발생하는 계절이었기에, 고영량이 평소에 건강관리에 신경을 잘 쓰고 있었다고는 하나, 고청운은 아들이 이미 약간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의원을 불러보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말해 주었고, 고영량도 자신의 건강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청운과 간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가 챙겨간 시험장 바구니에 인삼주를 넣어 주었다. 물론 만약 정말 풍한이 든 것이라면, 그 상태에서 인삼주를 마시면 오히려 상태는 더 악화될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풍한에 걸리면 인삼을 먹을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사흘에 한 번, 세 장의 시험 중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룻밤 묵을 수 있으니…….”
고청운은 중얼중얼 한마디 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있어도 가족들이 즉시 발견하고 아이를 돌볼 수 있을 것이었다.
고청운의 얘기에 흥미가 동한 듯 간미는 그가 잠시 잠잘 생각이 없자, 이번에는 큰아들이 진사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는 당신이 결과를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았다오.”
고청운이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량이 뛰어나게 잘 발휘만 된다면 2갑, 아니면 3갑으로 합격할 것이오.”
고청운이 웃었다.
외사촌인 진교에 대해서는 좀 더 운을 따져 봐야 했다. 고청운은 그가 아직 안정적으로 합격을 바라 볼 수 있는 경지가 되기에는 아직 조금 멀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만간 불이 붙을 걸 알았다.
한편, 고영량은 천부적인 재능이야 뛰어났는데, 거기에 더해 몇 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 방심하지 않고, 착실하고 일사불란하게 공부를 해온 덕에 기초가 튼튼했다. 하지만, 만약 기출 문제가 조금 그의 성향에 어긋나게 출제가 된다면 실점이 있을 것이었다.
특히 경의와 책론 문항이 우려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평소에 많은 것을 보고 배워 지식을 쌓아야 하고,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 등 시험 과목과 범위도 천문, 지리를 두루 다루고 있어 불안 요소가 있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출제된 문제들은 모두 현실적인 과목들을 다루고 있었다. 주로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고찰하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인생 경험이 더욱 요구되고 있었다.
고청운은 큰아들의 약한 부분을 파악하여 그에 맞춰 교육을 진행했지만, 이는 탁상 위에서만 이뤄진 이론적인 탁상공론이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가 여행을 다녀온 그 석 달 동안, 만에 하나 환골탈태를 할 수 있었을진 몰라도, 이것은 운에 맡길 일이었다.
“부군,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해 보시오, 듣고 있소.”
“요 며칠 연속으로 내리는 비 때문에 다리가 많이 아파지셨는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서 자신들이 죽으면 외숙부의 아들 중 한 명을 데려와 양자로 삼아 제사를 치렀으면 한다고 슬쩍 귀띔해 주셨어요.”
간미의 낮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안 그러시지만, 외할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께 너무 미안하다고 하시더군요. 해서 자신들이 죽고 난 후, 문중에서 아이를 하나 입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집안 식구들 중 어디 고아라도 있다면 제일 좋을 듯해요. 외할아버지의 재산이나 제사 등을 모두 지킬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지난번 귀향하셨을 때 외할머니께서는 특히 문종 아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보셨는데, 마땅한 후보가 없어 양자 일은 잠시 미뤄두셨다가 이번에 몸이 불편해지시면서 혹시 병이라도 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날까 봐 제게 미리 말한다고 하시더군요.”
노인들은 한번 병치레를 하게 되면 늘 후대에 인계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매듭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 씨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않았을 것이었다.
이러한 심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고청운은 이 이야기를 듣더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 형은 요 몇 년 사이에 아들 하나밖에 얻지 못했소. 만약 두 명이 있었다고 한들, 아이를 양자로 보내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결국 누가 그런 일을 원하겠소?”
고청운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할머님의 소원이시니 그리 따라야겠지요. 나중에 우리가 아이를 하나 더 키운다고 칩시다.”
“네, 저 또한 같은 생각이에요. 그냥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알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아시면 꾸중하실 거예요.”
간미는 다시 중얼거렸다.
“외할머니께서 그러셨어요, 만약 아주 어린 아이를 데려온다면 장성할 때까지만 좀 돌보아 주고 나중에는 한몫 챙겨주어 가정을 꾸리게 하면 된다고요. 우리가 끝까지 돌볼 필요는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고청운이 수긍하며, 그 문제는 때가 되면 아이를 한번 살펴보고 정하자고 하였다.
방인소와 연 씨는 죽마고우의 관계로 시작해 부부의 연까지 맺었고, 전쟁통에서도 몇 년 동안 서로만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만약 이런 깊은 감정이 없었다면, 방인소도 언제까지나 첩을 안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또한, 방인소 자체가 활달하고 거리낌 없었으며 귀신이나 조상신 같은 것을 믿지 않는 편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 동생 방인례가 있었기 때문인데, 가문에 후계자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고청운은 방인소에게 일찍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어차피 후계를 찾고 스승님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면, 기왕이면 그의 핏줄을 가진 아이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말을 마친 뒤 고청운과 간미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는지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이내 둘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숨을 고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이후 고청운은 평소대로 출근을 했고, 고영량은 시험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행히도 고청운은 자신이 정말 까마귀 주둥이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고영량이 이 때문인지 정말 추위에 병이 나버렸던 것이었다!
시험의 첫 장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했을 때만 해도 아이는 상태가 괜찮았다. 시험장을 나올 때 조금 피곤한 정도였을 뿐이라, 자고 일어나니 정신 상태도 좋아보였다. 하지만 시험의 두 번째 장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고청운은 고영량에게 발열의 기미가 있음을 감지했는데, 아이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청운이 손을 뻗어 아들의 이마를 짚어보니, 아들의 이마에 열이 살짝 올라 있었다.
이에 온 가족이 갑자기 당황하여 급히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하였다.
과연 한 가닥의 맥이 추위 때문에 요동을 치고 있었다.
고청운이 고영량에게 시험 불가를 선언하자, 고영량은 강력히 반발하며 끝까지 시험을 치르겠다고 버텼다.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무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고청운은 그간 과거 시험을 치르다 병사들에게 실려 나간 인사 불명 상태의 응시생들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억지로 버티다가 병사하기도 했는데, 옆 사람이 아무리 그 응시생의 손목을 꼭 쥐어보아도 반응이 없어 뒤늦게야 죽었음을 깨닫곤 하였다.
인생이 무상한 것을, 그는 아들 하나를 잃게 될까 가슴이 답답해지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넌 아직 젊지 않으냐, 3년 후에 다시 시험을 보자꾸나. 네 모습을 한 번 보아라. 너는 이미 병이 난 게야. 이런 상태로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한들 얼마나 잘 볼 수 있겠느냐? 머리도 안 굴러가는데 어떻게 문제를 풀겠다는 게야? 만약 동진사라도 되어 버린다면, 앞으로 또 어떻게 벼슬길을 헤쳐 나갈 것이냐?”
마지막 말을 마칠 때 고청운의 표정은 매섭기까지 했다.
마지막 그 한마디가 와 닿은 듯, 고영량은 인상을 약간 찌푸리고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못했다.
“아들아…….”
간미는 한사코 아이의 팔을 붙잡은 채, 눈에 기대를 품고 아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거라, 시험을 더 강행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구나.”
이 소식을 들은 방인소도 옆집에서 급히 달려와 방에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잠 좀 자고 일어나서, 내일 다시 몸이 괜찮아지면요?”
고영량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의 마지막 한 장만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봄비가 내리면 네가 답안지를 작성하는 호실에 또 물이 샐 것이다. 오늘 밤에 자고 일어나 몸이 조금 좋아졌다고 한들, 시험장에 들어서면 병이 더 심해지겠지. 특히 네가 가는 시험장에는 너 하나만 풍한에 걸려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풍한이란 감염병이니, 네가 누군가에게 풍한을 옮길 수도 있고, 다시 누군가에게 옮을 수도 있다.”
고청운은 아이에게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창백한 얼굴에 간절히 자신을 보내 달라는 눈빛을 담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코앞에 닥친 실제 위기 상황이었기에, 고청운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런 일에 요행수가 따를 리 없었다. 나중에 요행을 바라고 일을 치렀다가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었다.
방인소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한마디 더 차분하게 말을 건넸고, 간미와 연 씨도 함께 가세하여 애타게 권유했다.
결국 가족들의 설득에 못 이긴 고영량은 세 번째 장의 시험을 포기했다. 이번 시험을 더 이상 치룰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실패를 선언하고 3년 후를 기다려야 했다.
아들이 침상에서 나른하게 요양하고 있는 것을 보니, 고청운은 아들을 운하 변으로 데리고 나들이라도 가서 약혼녀라도 만나보게 해 줄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의 벼슬길에 또다시 변화가 찾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좋다, 다시 한번 승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