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선택 (1)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온 고청운은 간미에게 은자 450냥 정도에 달하는 은표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먼저 이번 은표는 다른 재산으로 바꾸지 않고 비상용으로 남겨 두기로 하였다.
“소석이가 갑자기 혼사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잖소?”
고청운이 팔굽혀펴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했다.
간미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지금 몸매는 젊었을 때보다는 좀 풍만했고, 웃음을 지을 때의 눈가에는 이미 잔주름이 잡혀 세월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지금 그녀는 갓 서른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고청운이 자신의 가정에 일편단심이고 그녀를 존중하는 마음까지 보여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가짐을 매우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던 그녀는 기질이 더욱 온화해 보이게 되었다.
“네, 소석이가 돌아오면 우리 그 아이의 혼사를 논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소석이가 과거에 합격한 이후 제가 여러 집을 보고 있었거든요, 우리 집과 비슷한 집안들로요.”
간미는 머리를 빗으면서 천천히 그간의 성과에 대해 고청운에게 알렸다.
두 사람은 이전에도 같은 문제로 이미 상의해 보았는데, 그땐 고영량이 과거에 합격한 이후 다시 혼사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었다. 당연히 그 아이가 낙방을 하더라도 혼사는 논해야 했던 것이, 고영량이 이미 17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상대를 찾기 시작한 것도 이미 늦은 셈이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고영량의 나이에 있어 과거 시험의 합격 여부가 그의 혼인 상대의 수준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보통 수준 집안의 여식이 될지, 아니면 한 단계 더 높은 집안이 되는지 등의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고청운이 생각하기에도 앞으로의 성혼 문제에 있어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17세의 수재보다는 17세의 거인에게 기꺼이 딸을 시집보내고 싶을 것 같았다.
현재 그의 집안이 가진 사회적 신분은 경성의 관리 중 중하위층에 해당했기에, 기본적으로 평소 접할 수 있는 집안들은 거의 다 문관 위주로, 그들은 대부분 학자 집안과 성혼으로 맺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 문벌에 신경을 써서 그런 것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성향이 모두 그러했는데, 서로 비슷한 수준의 집안끼리 성혼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가문의 성향을 제외하고 추가로, 평소 그의 정치 이념과 맞지 않는 집안, 예를 들어 문중에 황가와 사돈을 맺거나 혹은 평소 말이 잘 통하지 않거나 사이가 나쁜 사람들 빼고 나니 딱히 마땅한 혼처가 없었다.
간미가 생각하는 집안 중 첫 번째 집은 하(夏)씨네로, 주선 상대는 하상(夏尚)의 큰아들의 적장녀였는데, 그녀 앞으로는 서녀인 이복누이가 몇 명 있었다. 하씨 집안으로 말하자면, 이 집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정3품 이부 우시랑직에 있는 하상으로, 그는 내후년에는 관직에서 내려올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방인소의 절친한 친구이자 방자명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월성에서 부시험관으로 향시를 주관해 고청운을 보결 합격자 1위로 점찍어 주었던 적도 있었는데, 방인소와 방자명의 관계까지 합치면 두 집안은 인연이 깊었다.
그는 왕당파로서 고청운의 정치적인 입장과 맥을 같이 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그는 정치적인 노선을 정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황제가 누가 되었건 그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부류였다.
물론 고청운은 자기 자신이 비왕당파임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는데, 오늘날 황제의 영민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황제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했을 것이었다. 만일 다음 황제가 아둔한 군주라면?
그와 같은 사람은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라는 사상을 보이기 매우 힘들었는데, 비교적 이쪽으로는 이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고청운은 정치적 노선이라는 건, 관청에서 누가 관직이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지를 기대해 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잘하는 일을 살려 성실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의 일에 마구 끼어드는 것도, 줄을 서는 것도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집안에는 여러 가족들이 자기 하나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해서는 안 될 일은 결단코 벌여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하씨 집안 역시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하상의 다음 세대 중에는 아들만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지금은 마흔이 넘어 외진 곳에서 정6품 통판직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그의 아이들은 경성에 남아 하 대인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씨네 집은 가풍이 바로 서 있었고, 인맥이 넓고 좋은 편이었으며, 하상의 제자 몇 명도 앞날이 밝은 편이었다.
고청운은 하상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는데, 호부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로가 컸던 것이었다. 그는 하씨 집안과 교류하며 명절에 주고받는 선물 역시 당연히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씨네 집안 아가씨는 어여쁘고 상냥한 아가씨인데, 피부가 그렇게 희지 않아서 소석이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요.”
간미는 약간 망설였는데, 이 시대에서는 흰 것을 아리따운 것으로 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을 어찌 보아도 그렇게 뛰어나 보일 수가 없었고, 세상 모든 아가씨들이 다 좋다고 해도 자기 아들과 비교하면 그래도 조금 모자란 점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생각을 부군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녀 자신도 이와 같은 생각이 스스로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를 알면서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피부가 검은 게 무슨 상관이 있소?”
고청운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건강하고 사리에 밝고 철이 들면 되지요. 시집오게 되면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가 될 터인데, 큰형수로서 소어나 소아와 잘 지내야 할 것이오. 하루 종일 티격태격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는 도량이 작은 처녀는 혼인 상대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씨 집안의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집안끼리 화합이 잘되어 오던 집안이었기 때문에, 소란을 피울 것 같은 며느리를 집으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는 골머리를 앓게 될 터였다.
간미는 그를 힐끗 한 번 보고 다음 집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집은 영 낭중 집안의 둘째 적녀였다. 영 낭중은 호부에서 정5품 낭중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고청운은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직급인 영 낭중과 축국을 통해 알게 되어 매년 몇 차례씩 공을 함께 차는 사이가 되었다.
영 낭중은 영국공(寧國公)의 적자 중 막내로, 작위를 계승하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그는 은음제도를 통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이룩한 지금의 실세는 그의 오랜 투혼의 결과였다.
고청운과 그는 말이 잘 통했기에 두 집안은 자주 왕래가 있었다. 심지어 고청운은 영 낭중이 그의 두 아들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였다.
영 낭중은 아들들을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시키려 했는데, 그의 큰아들은 진즉에 거인이라는 신분이 되었고, 다른 한 아들은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 않아 영국공 집안이 가진 인맥을 통해 군에 들어가 있었다.
“이 아가씨는 괜찮군, 국공부(国公府) 가풍은 둘째 치고, 영 낭중 한 분만 봐도 괜찮은 분이지 않소. 또한, 집안의 2남 2녀가 모두 적출이구려.”
고청운은 영 낭중이 가끔 뭔가 다른 ‘찻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집에 정을 통하는 시녀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실부인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는 적자와 서자의 다툼은 피할 수 있도록 첩실 쪽에서 아이를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웬만한 귀족 집안에서 그와 같이 행하는 이는 드물었는데, 이것이 영 부인의 공인지 아니면 그의 공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영 낭중의 집에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영 낭중과 정을 통하는 하녀들의 교체가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고삼원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영 낭중의 밤 시중을 드는 하녀는 몇 년 간격으로 시집가거나 집에서 내보낸 후에 다시 새로운 하녀를 사서 들인다고 하였다.
고청운의 칭찬을 듣고, 간미 역시 매우 기쁜 듯 말했다.
“이 집안의 아가씨가 제 마음에도 제일 들었어요. 사람도 어여쁘고 말이 많지 않으며, 사람됨이 명석하고, 대범하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능숙했거든요. 제가 알아봤더니, 이 집안의 아가씨는 공부도 잘하고, 칠현금도 잘 연주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솜씨를 몇 번인가 들어 봤는데, 실력이 아주 좋았어요.”
“그러면 그 아이가 시집와서 당신과 취미 생활을 같이 할 수도 있겠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에게 웃어 보이던 고청운은 온몸에 열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거의 매일 밤마다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꾸준히 하다 보니 한 번에 할 수 있는 팔굽혀펴기 개수도 점점 늘어났다. 그는 20살에 체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단숨에 150개도 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37살로, 수준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100개 정도는 넘길 수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일정 횟수를 달성하면 잠시 쉬어주면서 간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그쪽 집안의 신분이 너무 높지요.”
간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국공 나리가 살아계시니 분가가 이뤄지기 전이라, 아직은 국공부의 여식이니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귀족 집안에서 자란 처녀는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자라 정말이지 한 집안의 맏며느리 감으로서 훌륭했는데, 분명 세상사의 처세에 있어서도 여유로울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녀가 언급하지 않은 일은, 그 집안의 여식이 간미를 매우 각별하게 대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간미에게 아주 존중을 표했는데, 이런 존대나 대우야 간미도 다른 집안의 여인들을 통해 많이 받아 본 적은 있었으나 그녀의 대우와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감각이 날카로웠던 간미는 당사자였기 때문에, 이번 경우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마저 자신에게 매우 친절했었다.
매년 봄 그들 가족이 운하 변에 나들이를 갈 때, 호부와 다른 부서가 함께 축국 경기를 치러서 호부 관리의 가족들은 특별히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간미는 아마도 고영량과 이 처녀가 이미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다만 고영량이 이 처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 아들의 그 수려한 얼굴을 생각해 보았을 때, 간미는 이 처녀에게 아들의 얼굴이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부군을 만났을 때도 용모가 보기 좋지 않았던가.
“당신 말이 맞소. 그 아이가 국공부 출신이라 문벌이 좀 높기는 하지만, 당신이 정말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중매인을 시켜 의중을 좀 알아보라고 하겠소. 영씨 가문에서도 만약 혼인 의사를 보인다면 다음 진행을 준비해 보면 되지 않겠소.”
고청운이 제안했다. 혼사와 관련하여 남자 집안에서 먼저 혼인에 대한 의사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남자 집안에서만 먼저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청운네 역시 일전에 다른 여인의 집안에서 그들 집으로 사람을 보내와 혼사와 관련된 의견을 묻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관습에 따라 혼인 당사자가 찾아와 의견을 묻지는 않았는데, 그래야 상대가 꺼낸 혼사에 대한 의견을 거절한다고 해서 민망할 일이 없었다.
“그 집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보일 겁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를 초대하지 않았을 거예요.”
간미는 잠시 읊조린 후에 말했다. 성혼에 대해 의논하는 시기에, 보통 누군가를 집안에 초청하는 건 성혼 대상자를 모두 선별한 후 이루어졌다.
“그거 잘되었구려.”
고청운은 영 낭중이 그간 큰아들을 보고 또 살펴보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한 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