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행복 (2)
가족들도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는데, 방인소는 반드시 이 일을 제대로 축하해야 한다고 나섰다.
오랜만의 경사에 간미도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고영량이 수재에 합격했을 때 고향에서는 이미 연회를 한 바탕 치렀으나, 경성에서 그들은 고영량을 축하하되 몸을 낮추기 위해 소소하게 축배를 들었었다. 친한 지인만 몇 명 집으로 초대하여 한 끼 식사를 함께 하고 마시는 것으로 간소하게 축하 자리를 마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육택과 육훤이 방문하여 축하주를 마시러 왔고,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정용후부 댁에 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후부의 노부인이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난 것인데, 적장손인 육택은 부친이 이미 돌아가셨기에 3년 동안 상을 치러야 했고, 그 아들인 육훤은 1년을 복상을 해야 하였다.
지금은 전쟁이 없는 태평한 시절이기에 상례에 대한 순리를 따라야 했는데, 황제가 별도의 하명을 내리지 않는 이상 부모상을 당한 육택은 2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고청운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육훤이 외부로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게 되었다고 한창 흥분해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는데, 뜻밖에도 노부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인해 모든 준비가 물거품이 되었다.
고청운은 그 노부인이 살아생전에 늘 육택을 괴롭혔는데, 이제는 돌아가셔서까지도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니 정말 황당한 일이 다 있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었다.
고청운은 노부인의 죽음이 육훤의 아이의 돌잡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을 감안하여 간미에게 말했다.
“소보의 아이가 올해 9월에 돌잡이를 할 예정이었으나, 개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 집에서 보내는 축하 선물이라도 잘 골라 보내야 할 것 같소.”
그랬다. 육훤의 아이는 작년 9월 하순에 태어났다. 성별은 사내아이로, 아주 어여쁘게 생긴 아기였다.
“네, 알겠어요.”
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장부를 꺼내어 메모를 해 두고 고청운에게 마저 물었다.
“부군, 다음 달이 첨씨 집안 노부인의 62살 생신일인데, 저희 집에서 보내는 선물은 더 후하게 챙겨야 할까요?”
평소에 교제를 해야 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기에, 이렇게 장부에 기록이라도 해 두지 않는다면 아무리 계집종들이 알려 준다고는 해도 일일이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았다.
“62살 생일은 정식 피로연이 없는 생일이라고는 하지만, 첨 대인의 승진 후 처음 하는 잔치이지 않소.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고 앞으로 만날 기회가 더 많으니, 이번엔 평소보다 3할 정도 더 후하게 선물을 준비하는 게 좋겠소.”
첨 대인은 자신의 직속상관이라 더 잘 챙겨야 하였다.
고청운은 잠시 읊조리며 손에 든 서적을 계속 펼쳐 보다가, 한 구절을 보고는 재미있다고 생각하여 간미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여행기는 참 잘 썼소. 작가가 대초원에 다녀온 적이 있는지, 유목민족의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잘 써냈더군. 비록 소소하지만 작가의 문체도 좋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는 다 그 연유가 있는 것 같소.”
간미가 들고 있던 붓을 잠시 멈추고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유유자적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작가는 무전여행을 다니는 것이라 누차 위험에 처하더군요. 만약 작자가 약간의 무공이라도 없었더라면 쉽게 낭패를 봤을 겁니다. 차라리 노비와 은자를 챙겨서 다니는 것이 진짜 산수를 즐길 수 있는 유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청운은 잠시 자세히 생각해 보았는데, 자신도 역시 정말 여행을 한다면 아마도 후자의 여행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았다. 고대에서의 여행이란 교통과 안전성에 조금 더 안전을 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부동산 구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아의 혼수는 이미 서서히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목재 같은 경우는 좋은 물건을 찾기 어려우니, 미리 앞당겨 준비를 해야 해서요. 다만 이후에 소아의 혼수품에 대해서는 밭이나 장원을 내어 주는 것이 좋을까요? 아님 상가가 좋을까요?”
혼수에 대해 고민하던 간미는 얼마 전 부군이 은자 500냥이라는 화본 수입을 가져다주자 또다시 부동산을 늘릴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부군 말대로 돈이 있으면 써야지, 집에 숨겨 놓아봤자 그 값이 오르지는 않았다.
현재로서는 고경이 시집갈 때 부군이 아직 경성에 머무르며 관직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 고경이 시집갈 곳 역시 경성 어디인가일 것으로 짐작되지만, 경성의 부동산 중에서는 논밭이 가장 구하기 어려웠다.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늘 운에 맡겨야 할 정도였다.
이제 통주(*通州: 경성의 동쪽의 도시)에서조차 마땅한 밭을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더 먼 곳들은 경성에서 멀리 떨어져 며칠씩이나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는데, 그들 집안에는 가솔들도 적어 관리를 시키려고 해도 적합지 않았다. 고삼원의 다섯 식구를 제외하면 그들 집안의 하인은 겨우 12명뿐이고, 그중 4명은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이웃해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는 하인이 그들 집보다 더 많았지만, 자신의 집안 사정은 부군이 고집하는 것이므로, 쉽사리 그 수를 늘릴 수는 없었다. 그는 하인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와 아들들 역시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만한 일은 스스로 직접 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미는 자신들의 집에도 사람을 몇 명 더 늘려야겠다고 궁리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고경이 시집을 가게 되면, 분명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청운은 간미가 이 일을 언급하자 자기도 모르게 책을 꽉 움켜쥐었다. 아이고, 딸은 이제 겨우 8살인데 벌써 이후에 시집갈 일을 생각해야 한다니 정말 기분이 불쾌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고청운은 간미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답했다.
“일단 상가를 먼저 사들이고 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밭을 더 사는 것이 좋겠소.”
고청운은 자신의 명의로 1,000묘의 전답에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직 이 1,000묘를 다 채우지 못했으니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 덕에 고향집 식구들의 전답들을 모두 그의 명의로 돌려 함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간미는 호부에서 밭 경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직급도 한 단계 올랐으니, 매입할 수 있는 전답의 총액도 그만큼 더 늘어난 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는 고경과 방인소가 밖에서 산책을 마치고 온 것을 알았다.
방인소가 퇴직한 이후 하루 종일 밖으로 뛰쳐나가 고경을 데리고 다녔기에, 간미는 장부를 챙기면서 입으로는 불평불만을 했지만, 웃는 얼굴은 밝아 보였다.
고청운도 그랬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고경은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방인소와 연 씨와 함께 보냈다. 어린 시절에도 그 아이는 방인소와 자주 밖으로 놀러 다녔었는데, 올해 들어서서는 그 횟수가 조금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고청운과 간미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고경이 엇나가지 않도록 중심만 잘 잡으면 되었던 것이다. 유일한 옥에 티는 이제 고경이 좀 더 자랐다고 애교가 많이 줄어든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즐거움도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 * *
정용후부가 복상으로 인해 문을 걸어 닫은 후에도 고씨 가문의 생활은 계속 되었다. 사교 활동은 고청운의 품계가 또다시 한 단계 상승하면서 함께 확대되었다. 품계가 종5품에 이르면 중급 관리라고 말하는데, 예전이었던 정6품 때와는 달리 그들을 초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예전보다 더 바빠진 것을 단번에 체감할 수 있었다.
업무상으로도 고청운이 담당하던 구체적인 업무가 줄어들어 있었다. 이전에는 운남사의 매년 예산과 계산을 고청운이 한 무리의 인원들을 이끌고 진행했었는데, 특히 연말정산도 그렇게 진행했었다.
운남의 예산 집행 관리와 장부를 대조하는 작업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무리 해도 몇 가지 항목에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사로부터 추궁 받지 않도록 하려면 중간에서 여러 번 수를 맞추고, 맞추고, 또 맞춰보아야 했는데, 여기서 정력이 엄청나게 소모되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몇 번이고 수정을 가해야지만 장부를 ‘합리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 운남사에서 한림원에서 여(黎)씨 성을 가진 서길사를 주사로 불러와 일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이런 구체적인 업무가 그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고청운은 나중에 내용을 심사하는 책임만 지면 되었는데, 조세, 인구, 토지 등이 그 범위였다.
고청운은 자신이 이제는 말단 관리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말단이었을 때에 비해 유지해야 하는 교제가 많아진 일이 오히려 그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 때로 그는 자리를 박차고 차라리 일을 하러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접대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첨 낭중도 그래보였다. 자신의 신임 상관도 그러하니, 이 사교계를 탈출할 능력이 없었던 고청운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역시 이 단계를 넘어서야 좀 나아질 것 같았다. 관계가 더 친숙해 지면, 그때는 이렇게 자주 만남을 가질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 외에도 그의 진사 동기들 중 몇몇의 관직에 변동 사항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방안 초유는 3년마다 한 품계씩 승진을 거듭하여 착실하게 일보일보 나아가 지금은 첨사부의 정5품 대학사가 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를 관운이 대통했다라고 얘기하는데, 순풍에 돛단배처럼 안정적으로 착실한 승진을 거듭하여 같은 진사 동기들 중에서는 단연 비할 사람이 없었고, 암암리에 핵심 세력으로 추대되고 있었다.
매번 초청을 하면 모두가 거의 다 참석을 하러 오는 편이었고, 태자의 지위 역시 현재로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장원 공번충의 경우, 한림원에 머물며 계속 둥지를 틀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 그는 종5품 시독학사직에 있었는데, 자주 입궁하여 당직을 서고 있었기에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잦아 성심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고청운은 그의 성향 때문에 그가 한림원에서 늙을 때까지 계속 잔류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장서루에 가서 책을 빌리러 가면 열 번 중 여섯 번은 그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역시 두발 달린 인간 책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했다.
공봉명은 국자감으로 전근되어 정6품 사업(*司业: 국자감의 교수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위에 있으니 국자감의 제일 높은 직위인 제주(祭酒) 다음의 위치였다. 고영량과 진교가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평소에 자못 그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고청운의 예상과는 다르게 뜻밖에도 담자례는 승진하지 못했고, 누구한테 미움을 샀는지 도감원(*都察院: 행정 기관을 감찰하는 관청)으로 평전되어 정6품으로 자리를 옮긴 경력이 생기게 되었다.
도감원의 옛 이름은 어사대(御史臺)인데,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언젠가 그가 도감원에 갈지도 모른다고 여겼건만, 고청운은 이번에 그가 정말로 그곳으로 갈지는 몰랐다.
그와는 춘절 명절에나 덕담을 건네며 안부를 묻는 사이였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별로 없었다. 고청운이 처음 그와 있었던 일을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의 일은 이미 넘긴지 오래였으나 둘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라서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었기에 둘의 사이는 언제나 담담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