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비통
가을이 지나가고, 고경의 구구소한도(*九九所寒图: 동지(冬至)로부터 81일째 되는 날이면 추위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여 각 가정에서 동지에 81송이의 매화(梅花)가 그려진 그림을 준비하여 동짓날부터 매일 한 송이씩 색을 칠하며 지워 나가면서 봄이 오는 것을 반기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 81송이의 매화가 그려진 그림을 ‘九九消寒图’라 함)의 모든 꽃에도 붉은 염료가 칠해졌다.
겨울이 끝나 2월로 들어서면서, 고청운과 간미는 아이들의 시험 합격을 염원하기 위해 절을 다니기 시작했다. 간미는 고경을 데리고 경성을 빠져나가 시외의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리며, 멀리 있는 큰아들의 합격을 기원했다.
고청운은 고영량의 실력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지만, 만 번이 두려운 것이 아닌 만일의 상황이 두렵다는 말처럼 무슨 의외의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이었다. 이번은 아이가 처음 과거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시험 때문에 아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앞으로도 그 아이에게 좋은 점이 많을 것이었다.
조바심이 난 간미는 여느 부인들처럼 불공에 온 정신을 쏟았다.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힘들었는데, 5월 말이 되자 고향으로부터 드디어 서신이 도착했다. 고청운은 그제야 고영량, 고영동, 간유 세 사람이 모두 무사히 현시와 부시를 통과하여 동생의 신분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중 고영량은 심지어 현시의 1등인 현안수(县案首)와 부시의 1등인 부안수(府案首)로 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번 시험으로 인해 얼굴을 한 번 크게 드러낸 격이 되어 임산현에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방인소가 보잘 것 없는 성적이라는 듯이 서신을 간결하게 써서 보낸 것 같았지만, 고청운은 스승님이 내심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청운과 간미는 너무 기뻐한 나머지 8월 원시에 대한 기대감도 더 커지게 되었다.
경사는 이 뿐만이 아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자명의 서신도 전해 받은 고청운은 그가 무사히 지주직으로 승격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흥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작년에 방자명은 그와 마찬가지로 관직 상으로는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얼마 전에 옆 주의 지주 하나가 병으로 벼슬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그 지역 지주가 공석이 되자, 조정에서 바로 가까운 곳에 있던 그가 해당 주의 지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방자명은 이번 승계 때문에 단번에 정6품의 통판직에서 종5품의 지주로 승격되었다.
고청운은 방자명이 이렇게 순풍에 돛을 올린 배처럼 승진을 거듭하는 것은 분명 그의 장인인 하 대인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부의 관원이 아닌가, 물 가까이 있는 누대가 달빛을 먼저 받는다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이득을 볼 수 있는 법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실한 결정이 나기 전이었으나 이제는 승진이 확정되었으니 방자명이 이렇게 서신을 보낸 듯했다. 고청운은 매우 기뻤지만, 아쉽게도 멀리 떨어져 있어 함께 축하할 수는 없었다.
* * *
고청운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현재 운남사의 대표적 업무의 태반은 그가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 8월이 되면 운남의 기반시설 건설이 거의 완성이 될 것 같았다. 함께 발주된 사업 중 몇몇, 특히 염광에서도 이미 이윤을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저잣거리를 구경하다가 뜻밖에도 운남의 고급 소금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광고가 하나같이 과장되어 이것만 먹으면 꼭 장수하는 것처럼 소개가 되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그도 자연스레 소금을 사게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광고에 세뇌되어 구입하기야 했지만 실제로 맛본 품질은 정말 괜찮았는데, 비싼 값어치를 하였다.
고청운은 이를 보고 이후의 운남의 세금 수입이 반드시 예년보다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이는 운남 지역 사람들에게는 큰 경사이자 그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운남 사람들은 한동안 웃는 얼굴로 다닐 수 있었고, 완 낭중 역시 이전과는 달리 운남성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고청운은 다시 방희림의 서신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의 작황이 풍작이고 모든 것이 잘 번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더욱 기쁨에 차올랐다.
이런 기쁜 나날은 9월 중순까지 이어지면서, 이 시기에 고청운은 다시금 고향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 * *
간미는 고청운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급히 편지를 그의 손에서 가져와 읽어보았다.
처음 부분에는 고영량이 원시에서도 1등인 원안수(院案首)를 거머쥐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연속으로 세 번의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수재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고영동 역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아직 간유와 고청안은 합격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소식을 읽어 내려가니…….
“부군…….”
간미는 멍해 있는 고청운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큰할아버지께서는 연세가 많으셨으니 그나마 호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고청운은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간미의 말에 반응했다. 그는 눈을 들어 간미를 한 번 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아, 내 마음으로는 알겠으나, 지금은 잠시 혼자 조용히 있고 싶소.”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간미는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고청운의 정신 상태가 너무 힘들어 보이자,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큰할아버지께서는 원시 성적이 나온 후에야 비로소 눈을 감으셨다고 합니다. 동동이가 수재로 합격한 걸 아시고 분명 기뻐하셨을 거예요.”
간미는 고청운이 큰할아버지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지금 얼마나 힘들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왔다.
고청운은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의 문이 닫히고, 고청운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다시 서신을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읽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재작년 그가 귀향했을 때만 해도 분명 큰할아버지는 건강해 보였었다. 물론 머리는 거의 다 백발이 되고 식사량도 많지 않았으나, 이야기할 때 생각이나 문장의 맥락이 아직 또렷했는데,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채 안 되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날 줄이야!
그는 작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하 수재까지 생각이 났다. 이렇게 올해 또 한 명의 노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하필 이렇게 떠난 사람이 고백산이라는 것을 고청운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성적으로만 말하자면 지금의 시대에서는 팔순의 노인이란 이미 매우 장수했다고 할 수 있었기에 이 나이에 돌아가신 것은 호상으로 볼 수 있었으나, 그는 친족으로서 큰할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랐다.
고청운은 왼손으로 책상을 지탱하고 선 채로 눈을 꾹 눌렀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고 이내 자신의 손바닥까지 축축해졌다.
큰할아버지 고백산은 그의 마음속에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만약 큰할아버지가 자신이 공부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지 않았더라면, 고청운은 혼자서 부모님과 집안 친족들을 설득하여 공부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또한, 큰할아버지가 그동안 문중의 수장으로서 친족들을 잘 관리한 덕분에, 고청운은 가족들이 남아 있는 고향, 후방의 문제를 단 한 번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큰할아버지는 그에게 지대한 사랑을 주었다. 늘 자신의 뒤에서 끊임없이 도와주며 지켜주던 분이 이제는 더 이상 계시지 않아, 이후로는 더는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니! 그리고 정작 마지막 가시던 모습도 지켜봐 드리지 못했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청운의 눈물이 사정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아버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무문이 가볍게 열리면서 문득 작은 옹알거림이 서재에 울려 퍼졌다.
고청운이 퍼뜩 고개를 들어 밖을 쳐다보니 시간이 부지불식간에 한참이나 지났는지 창밖의 하늘빛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수건이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버지, 배고파요, 밥 먹을래요.”
문밖의 불빛에 어린 작은 그림자 하나가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왔다.
고청운은 아이가 잘 안보여서 넘어질까 봐 걱정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다리가 저렸다.
“아버지, 슬퍼하지 마세요.”
고경이 다가와 고청운의 허벅지를 껴안으며 옹알거렸다.
“아버지가 슬프면 저도 슬퍼요.”
고청운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소아야, 밥 안 먹었니?”
고청운의 목소리가 심하게 메어 있었다.
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 있던 간미가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군, 상복으로 갈아입으셔야죠.”
“그래, 들어오시오.”
고청운이 소리를 약간 높여 말했다.
곧이어 간미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고, 그녀가 들고 오는 촛불의 빛이 서재를 비추었다. 그녀의 뒤로 춘분과 곡우가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고청운은 세수를 하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상복은 성긴 삼베로 만들었는데, 그와 고백산의 관계를 따지면 3개월간 이런 상복을 입고 다녀야 하였다. 이처럼 상복을 입는 3개월간은 육식이나 입맛을 돋우는 채소를 섭취하는 것을 금해야 했고, 성혼을 치르거나 잔치에 가는 행동 등도 금해야 했으며, 당연히 집에 손님을 맞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집사에게 대문에 마 한 폭을 가로로 걸어 못으로 박아두라고 하였습니다.”
간미는 그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같은 행위를 통해 남들에게 지금 자신의 집안은 복상 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간미와 고경이 몸에 걸치고 있던 장신구를 모두 떼어내고 소박한 나무 비녀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뭉클해졌다.
“미아, 수고가 많소.”
고청운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집안의 상복 등은 이 짧은 시간 동안 모두 그녀가 급히 만들어 낸 것들이겠지.’
간미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에게 겉옷을 입혀 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아가 당신이 식사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밥도 먹으려 하지 않았어요.”
고청운은 고개를 숙이고 고경을 바라보았고, 꼼짝없이 뚫어지게 아버지를 쳐다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눈이 부었는데, 우셨나요?”
이 말이 나오자 방 안에 있던 춘분과 곡우는 구석에 숨고 싶어졌다.
고청운은 헛기침을 한 번 하긴 했지만, 오히려 민망해하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고 식당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아버지의 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다. 아버지는 너무 슬퍼서 당연히 울었지.”
고경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간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더 묻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발산되던 그의 슬픔과 비통함이 오후가 되니 갑작스럽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고청운은 앞마당의 서재로 갔다. 그곳에는 침실이 하나 딸려 있어, 때때로 그는 거기에서 쉬곤 하였다. 지금은 상중이라 간미와 함께 잘 수 없었다. 그 앞마당 서재는 그가 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저녁이 되자, 고청운은 붓을 휘둘러 조문을 작성했다. ‘가슴이 찢어지듯 슬프고 눈물이 범람합니다. 슬피 통곡하며 고인을 추도하고, 이 얼마나 애통한지 글로는 그 감정을 감히 다 쓸 수가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써 내려 갈 때, 그는 붓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존경해마지 않는 큰할아버지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다시 들자, 고청운은 다시금 눈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나려는 듯해서 황급히 눈을 찡그려 가며 겨우 눈물을 억눌렀다.
옆에서 고삼원이 서신 말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역시 이 비보에 함께 애통에 젖었기에 서재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숙부, 내일 서신을 부치러 가겠습니다.”
“그래, 네 숙모에게 은표를 받아 챙겨 가는 것을 잊지 말거라. 나는 멀리 경성에 있으니 달리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구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