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재산 (2)
간미가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얼마를 더 투자해야 할까요?”
왕씨 가문에서는 부군이 왕가준을 계속 가르쳤으면 하는 생각에 절절한 태도로 계속 함께 돈을 넣어 투자하자고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700냥이 적당하오. 남들의 이익을 너무 많이 편취할 수도 없지 않소. 우리 집에서 이쪽으로 출세하여 이득을 나눠 줄 것도 아니고.”
잠시 머뭇거리던 고청운은 다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방 형에게 다시 물어봐야겠소. 그가 안 하면 나도 하지 않을 예정이오.”
지난번 방자명은 자신보다 더 많은 밑천을 내서 해상 무역에 돈을 들였으니, 서신으로 물어보면 분명 아마 다시 돈을 투자하겠다고 하겠지만, 고청운은 그래도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우리 집은 다른 큰 부잣집과 달리 아직 여유 있는 밑천이 없으니, 단번에 너무 많이 투자해서 혹여 이 밑천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좀 조심해야하오.”
간미는 고청운이 여전히 이지적인 모습을 보이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남은 돈으로는 상가를 사서 세를 놓아볼까요?”
그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벌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집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고 자신 또한 그쪽으로는 생각이 없다고 덧붙였다.
현재는 기존의 임대료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처지였기에, 아이들이 장성해서 들어가야 할 혼수 비용 말고는 걱정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라 지금은 수익에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간미 역시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같이 지내는 동안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비교적 잘 이해하게 되었으며, 어떤 일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어 두 사람은 하겸죽이 점택무로 이사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형이 그쪽에서 지내면 아무래도 여기저기 손이 많이 갈 텐데, 곧 출근준비도 해야 하고. 당신이 시간이 나면 잠깐 들러 도움을 좀 줄 수 있겠소? 최소한 우리는 경성에서 더 오래 머물렀으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고청운이 제의했다.
하겸죽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님께 제사를 지낸 후 바로 처자식과 함께 상경하여 출근 준비를 서둘렀는데, 지금은 조정에서 제공한 셋방인 점택무에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위치가 그들 고택과 멀어 마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반 시진이 걸렸고, 대리사까지 거리 역시 그와 비슷하게 반 시진 정도가 소요되었다.
“좋아요.”
간미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두 집 사이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와 하겸죽의 아내는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이기에 그녀는 당연히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었다.
* * *
8월 25일은 황실 서원의 입학 시험일이었다. 고청운은 업무가 있어 간미가 고영진을 데리고 서원을 방문해 시험을 치르기로 하였다.
사흘 뒤, 그들은 서원 입학 통지를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예전 고영량이 서원에 가지 않으려 울며불며하던 모습과 달리, 고영진은 시험을 치른 뒤부터 오히려 긴장감이 높아지고 더욱 근면해진 모습을 보였으며 심지어 얌전해지기까지 하였다.
“황립 서원에 가기 싫지는 않고?”
고청운의 물음에 꼬맹이는 오히려 이렇게 씩씩하게 답했다.
“저는 사실 오래전부터 황립 서원에 가고 싶었어요. 형아가 거기서 배웠기 때문에 저도 따라가고 싶었거든요.”
“그럼 원래 다니던 서원의 동창들과 헤어질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또 서원에서 기숙을 해야 하는데, 두렵지는 않으냐?”
“아이고, 하나도 무섭지 않죠!”
고영진은 입을 실쭉 내밀더니, 이내 가슴을 펴고 답했다.
“매달 5, 10일마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예전 서원 친구들과 다시 노는 것은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겠어요? 아버지, 서원 휴일에 잊지 말고 꼭 마중 나와 주세요.”
‘잘 되었구나.’
고영진의 신명나는 모습에 고청운은 울먹이는 꼬마를 한 명 더 상대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가 겨우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는 큰아들이 서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겨우 6살이었고, 지금의 작은아들은 8살이 되어 서원에 들어가는 것이니 원인이 바로 여기 있겠거니 싶었다.
황립 서원은 8월 말에 개강했는데, 고영진 같은 신입생들은 그때에 맞추어 입학하기만 하면 되었다.
고영진을 서원으로 보내고 나니 큼지막한 정원에는 고청운과 간미, 고경 세 명의 집주인만 남아 있어 잠시 허전하게 느껴졌다.
하인들도 잘 떠들지 않는데다 고경 역시 평소에도 조용한 성격이라 친구들 없이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하루 종일이라도 놀 수 있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안이 더욱 조용하게 느껴졌다.
원기 왕성한 두 아들 모두 곁에 없으니, 고청운과 간미는 순간적으로 어색함을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움은 필수적이나 홀가분함도 뒤따라, 두 사람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간미가 라틴어를 배우는 진도 역시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고청운도 말을 연습할 수 있는 상대가 하나 더 생기니 회화가 이전보다 유창해지면서 덩달아 발전도 가속화되었다.
이외에도 그들은 거리에 물건을 사러 다니기도 하고,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오는 등 각종 나들이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9월 9일에는 매입한 장원에도 또 한 번 다녀오면서 그곳에서 한 끼 식사를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 * *
사장정은 말에서 내려 고삐를 문간방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길을 가면서 인사하는 종들도 외면한 채 품속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곧장 후원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주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안락공주의 몸종 시녀가 그를 맞이하자, 사장정이 대뜸 물었다.
“부마께 아룁니다. 공주 전하께서는 연무장에 계십니다.”
그러자 사장정은 얼굴색이 변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흥, 도대체 저 연무장에 무슨 매력이 있길래 자꾸 머무르시는지.”
그가 다시 물었다.
“아들은?”
“도련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왕 잠들어 있을 때 한 번 가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 사장정은 아들의 방으로 가보았는데, 역시나 사지를 펴고 단잠을 자고 있는 아들의 입가에는 맑은 침이 흐르고 있었다.
사장정은 오랫동안 잠자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하인이 와서 안락공주가 돌아왔다고 말을 전해 줄 때까지 줄곧 그곳에 있었다.
“부마, 오늘은 여느 때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일상복 차림에 머리를 축축하게 풀어헤친 안락공주는 방금 막 씻고 나온 듯했다.
안락공주가 사장정에게 또다시 물었다.
“천보(天保)는 일어났나요?”
그러자 사장정이 외쳤다.
“그 녀석은 아직도 자고 있습니다!”
웃음기가 가신 사장정은 ‘일이 있어 서재로 가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옷소매를 펄럭여 나갔다.
사장정이 소매를 뿌리치며 방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 남은 하인은 숨을 죽이고 말없이 구석에 서서 자신의 존재감을 떨어뜨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녀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표정만은 여느 때와 같아 그녀들이 그리 크게 긴장한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안락공주는 눈을 잠시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뜨고 나서,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려는 하녀에게 물러나라는 뜻으로 나지막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서재로 난 문으로 들어갔다.
그가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매우 진지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사장정의 뒤로 다가가 자신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어 얹고, 고개를 돌린 채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왜 또 화가 나셨을까요? 당신은 왜 늘 화를 내시는 건가요? 자주 이러시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실 텐데요.”
사장정은 그녀를 외면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에 쥔 책을 더 꽉 거머쥐었다.
“이건 무슨 책인가요?”
안락공주가 책상을 바라보니 노르스름한 종이 위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해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그녀는 다시금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당신의 아들이잖아요. 어째서 늘 그를 시샘하고 계신 거죠? 그가 장성하면 틀림없이 아버지께서 그렇게 구시고도 무슨 아버지 노릇을 하셨냐며 비웃을 거예요.”
이 말이 나오자, 사장정은 드디어 반응을 했고,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 저는 당신이 날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그저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도구 같은 것이었습니까?”
말을 마친 그는 너무 세게 깨문 나머지 입술이 빨갛다 못해 검붉어진 채 요염한 눈매에 물빛이 비쳐 있는 모습을 하고는, 아직 펼쳐져 있는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그녀를 직접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안락공주는 어리둥절하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대체 어디서 나온 생각일까요? 아이를 낳는 도구는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다 큰 성인인 사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생각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부마, 본궁의 마음은 남들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설마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난 잘 모르겠습니다! 난 아들이 태어난 뒤 하루가 다르게 내 지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일전에는 내가 당신과 딸들의 마음속에서 제일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꼴찌가 아닙니까!”
길고 늘씬한 몸매로 올곧게 서 있는 그는 기세가 매우 좋았다.
안락공주는 그런 그의 모습에 다시 웃으면서 그의 몸을 돌리더니, 그의 요염한 눈을 열심히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야말로 평생 함께 할 사람입니다. 본궁의 마음속에는 부마, 당신이 가장 중요해요!”
“정말입니까?”
사장정이 돌연 가냘프게 물었고, 눈시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눈의 깜빡임을 따라 마침내 뽀얀 얼굴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안락공주는 눈을 감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울지 마세요. 그렇게 우시면 본궁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안심하세요, 앞으로는 반드시 당신을 최우선으로 여기겠습니다! 반드시 이 말을 지키겠어요!”
“전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사장정은 허리를 살짝 숙여 안락공주의 품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의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허리를 꼭 껴안고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영원히 나를 외면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나를 무시하셔도 아니 됩니다. 언제나 나를 최우선으로 삼아주시고, 아들에게마저 내 자리를 내어주지 마세요. 나는 마음이 너무 약한 사내인데, 전하께서 나를 외면하실 때마다 마음이 어찌나 아프던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락공주는 자신의 가슴께에서 옴지락대는 사장정을 보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뒤이어 그녀는 눈으로 그의 손이 옷자락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밖이 아직 환하게 흩어지는 햇빛으로 가득한 것이 보이자 낮은 소리로 외쳤다.
“부마, 그만! 본궁이 참을 수가 없군요. 이건 또 언제 본 화본의 장면을 따라 하시는 겁니까? 이런 건 또 누가 쓴 대사죠? 정말이지 너무 비정상적이라 본궁이 가서 꼭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을 때, 그녀는 살기등등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사장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이 막혔고, 못내 아쉽게 손을 거둬들이며 탄식하듯 말했다.
“내 서점의 어느 문인이 쓴 화본인데, 작가가 아마도 여인일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지요. 하지만 딱히 깊이 파고들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거든요. 도망가면 다시 잡으러 가고, 때리고 욕하기도 하고, 울고불고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남자 주인공은 돈 많고 권력이 있는데다가 준수하기까지 해서 서점에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공주 전하, 어서 읽어 보십시오. 제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안락공주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본궁은 그런 보들보들한 내용들은 싫어합니다.”
그녀가 다시 사장정을 향해 탐문하듯 물었다.
“다시 연기가 하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그녀는 속으로 자신의 부군이 연기가 하고 싶어서 이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연기를 하고 싶어 하면 그녀는 정말 힘들어졌는데, 호흡이 안 맞으면 밤까지도 그의 투덜거림을 들어주어야 하였던 것이다. 또 부군이 좋아하는 그 대사들은 듣기만 해도 두피가 저려왔다. 방금 말한 내용들만 보아도, 그녀는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일종의 수치감마저 들었다.
아무도 그 내용을 듣지 못한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