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풍파
향시 부시험관으로 한 번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고청운은 석차 결정의 마지막 단계에 있어, 기존에 얻은 평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작년 상성에서 해원(解元)을 거머쥔 두군걸(杜君杰)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마지막에는 그의 실력이 압도적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그의 명성에 기인하여 얻은 가산점도 한 몫 했던 것이었다.
행관에서 머무르면서, 진 학사와 고청운은 책방 근처로 특별히 사람을 보내 현지 수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지역 유명인들에 대한 정보도 함께 수집했었다. 마음이 옹색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고청운과 진 학사는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난 걸 보고, 두군걸이 온갖 수작질로 명예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의 석차를 1위로 올리는 것에 대해 조금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이번에 하겸죽이 쓴 책론 답안을 본 고청운은 확실히 예전보다 내용면이나 문예적으로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 하겸죽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앞으로 나이가 많을수록 시험 합격이 어려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올해로 이미 37살이니, 다음에 다시 시험을 보면 40살일 것이고, 이는 절대 젊은 편이 아니었다.
“알겠네.”
하겸죽이 얼굴을 약간 붉히며 응낙했다. 어찌된 일인지 그는 고청운과 분명 오랜 벗 사이를 유지하며 친하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고청운이 얼굴을 굳히면 대하기가 좀 어려웠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벼슬아치의 기세라는 걸까?’
혼이 마치 하늘 높이 붕 떠 있는 듯 하겸죽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새로 가져온 관보를 그에게 건네다가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고 그에게 어서 방으로 돌아가 휴식하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하겸죽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청운이, 자네에게 서신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겐가? 그 사람들이 귀찮지는 않은가?”
책상에 늘어져 있는 서신들을 발견한 하겸죽은 착잡해 보였다. 그는 시선을 돌려 고청운의 뒤편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니, 술 마신 머리가 다시 아파오는 것 같았다.
“음, 일전과 같은 문제이지요, 저를 욕하는 자도 있고, 칭찬하는 자도 있습니다. 전 희극으로 각색이 되었던 <매화 반지> 사건을 거치면서 좀 익숙해진 듯, 이런 것에는 이미 내성이 생겼지요.”
고청운이 하하 웃는데 마침 소만이 찻잔을 받쳐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빨리 드세요, 사형. 해장탕입니다.”
고청운은 탕이 담긴 잔을 살짝 밀어서 그에게 건네고, 자신은 김이 나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요즘 고청운은 앞서 출판했던 산술 서적 두 권을 아라비아 숫자를 인용해 다시 쓰고 있었는데, 하는 김에 내용도 가감하여 손보고 있었다. 그런데 호부의 일까지 겹쳐 늘 야근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조만간 기력이 달릴 것 같아 요즘엔 상성의 외숙부 댁에서 선물로 준 찻잎으로 우려낸 차를 즐겨 마시는 중이었다.
하겸죽은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곧장 탕이 담긴 잔을 들어 마셨다.
“청운이, 자네 생각에는 이번 시험에서 산술 문제가 어렵게 출제될 것 같은가?”
하겸죽이 물으며 시선을 다시 한번 책장으로 돌려 책들을 흩어 보았다.
그는 늘 마음에 좀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자신이 너무 친구 덕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친우가 이 두 권의 산술 서적을 출판한 이후 그는 바로 이 책을 따라 배웠는데, 다행히도 고청운만큼이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학습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 책으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 그는 책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책의 원작자가 곁에 있어 직접 가르침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 이렇게 덕을 볼 수 있는 자가 자신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해를 거듭할수록 시험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지난번 시험의 문항들과 비슷한 난이도로 문제를 낼 수는 없을 테니 올해도 지난번에 비해 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고청운이 짐작해서 대답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 하나는, 어떤 관리들이 낸 통계에 따르면 그간 하 왕조에서 최근 20년 동안 배출된 진사들이 예전에 선발되었던 진사들보다 더 실속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최근 본 왕조에서 한 번 방상괘명(*金榜题名: 전시에 급제하다)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책만 파는 책벌레들만으로는 합격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합격한 사람들은 누가 이런 우스갯소리를 퍼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관직 생활에 대한 적응력도 더 강인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황제의 뛰어난 영민함과 통찰력을 증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황제가 직접 과거 시험 내용을 개혁하고 실제 행정에 맞는 내용들로 구성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이러한 과거 시험 개혁은 국가가 더욱더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었다며 조정에서도 황제를 치켜세웠다.
올해로 55세가 된 황제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시대에서는 이 나이까지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장수한 셈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신하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더욱 관대해져서, 원칙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잘못은 다른 신하들이 감히 같은 실수를 범하지 못할 정도로 징계하여 이후에 일어날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그는 원칙을 어기며 신하의 편의를 봐주는 등의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적자를 중시하고 전적으로 태자의 양성에 집중했는데, 태자 외의 다른 황자들은 모두 군왕(郡王)에 봉하여, 일찍이 황태자로써의 지위가 흔들림 없는 확고한 자리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상황이 이러 하자 또 다른 기회를 노리는 불손한 세력들을 제외하고, 다른 관료들은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본디 새로운 제왕의 창조에 일조해 얻을 수 있는 공적이라는 것은 매우 매혹적인 것이었으나,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는 그저 도박과도 같았다.
지금의 황제는 태자 한 명만을 이렇게 확고하게 지지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처럼 차기 제왕이 일찌감치 정해지면 줄 서고 눈치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고, 오롯이 자신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필경 황가의 사건에 잘못 휘말리는 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고청운은 더욱 기뻐했는데, 말로만 듣던 황자의 난 같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되게 되어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황제가 이처럼 관대하고 인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향시의 부시험관으로 근무했다가 바로 휴가를 내고 귀향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였다. 황제가 잘하다가 갑자기 어떻게 생각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얼마 전에 다른 황자를 정치에 참여토록 하명하고 대황자를 호부에 보내어 업무를 보고 배우도록 했던 것이었다.
그는 단지 정6품의 주사였을 뿐인데, 품계가 낮아 아직 대황자의 눈에 들 일은 없었지만, 호부에 이런 거물이 오니 아무래도 다들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마주친 영 낭중이 눈빛을 대황자에게 마구 난사하는 것을 본 고청운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대황자가 오게 된 일로, 모두의 심신에 동요가 일었다.
“어렵다고?”
하겸죽이 갑자기 웃기 시작하더니 손을 뻗어 고청운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청운이, 그럼 어떤 종류의 산술 문제가 출제될지 한 번 예측해 주지 않겠나? 하하, 모두들 자네가 이쪽 방면에 고수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오늘도 어떤 이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네.
자네가 상성 향시에서 기출한 문제를 보고 사람들이 기가 막혀 한 건 아는가? 그 문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던지, 자네가 문제 속에 파 놓은 함정이 매우 교묘하더군.
그리고 두군걸이라는 해원은 자네를 매우 숭배하고 있다네. 그가 나중에 나와 자네의 사이를 알게 되고서는 얼마나 나에게까지 깍듯하게 굴던지, 자꾸 나를 찾아와 한담을 나누자고 하지 뭔가.”
하겸죽의 말이 하늘 끝까지 멀리 달아나 있던 상념을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고청운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하겸죽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좋습니다, 며칠 안으로 몇 문제 내보지요. 시험 준비를 도와주는 셈 치겠습니다. 막상 회시에서 어떤 문항들이 기출 될지는 제 짐작만으로 맞출 수 없다는 건 사형도 당연히 아시지요?”
고청운은 스스로를 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로 앞서 두 권의 산술 서적을 집필하기 위해 한림원에서 많은 기성 산술 서적을 읽었었다. 아주 주의 깊게 탐독했기에, 많은 내용들이 그의 기억에 잘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는 계속해서 수학이라는 학문에 깊게 연관된 발자취를 남기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얼마 전까지도 줄곧 회시와 향시의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기에 모의 산술 문항 몇 문제를 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청운은 비록 앞서 일련의 과정들은 대부분 미래의 아들들의 시험을 위해서 준비해 온 것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친우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는 언제고 자신이 관직 생활을 벗어날 기회가 있으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 그런 상황이 그렇게 되더라도 어찌 되었건 줄곧 이 시험이라는 테두리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사형이 원하기만 하신다면, 제가 책론 몇 문항도 만들어 보겠습니다. 답안을 써 보시고 제게 주시면 좀 봐드릴게요.”
고청운은 이 말을 마친 뒤 하겸죽의 눈치를 살폈고, 그가 희색만면한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하겸죽이 그의 사형이라고 해도 예전에야 신분이 같지 않았던가. 현재 둘은 신분 차이가 있기에 고청운은 혹여 그가 기분이 상할까 봐 걱정을 했던 것이었다.
“좋지, 아주 좋네! 안 그래도 내가 부탁해도 모자랄 마당이네!”
하겸죽은 그동안 고청운이 <기하학> 파문에 휩싸여 워낙 일이 많았기에 자신까지 합세해 고청운을 귀찮게 할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것인데, 이렇게 고청운이 스스로 말을 꺼내주니 당연히 기뻤다.
이에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 쳐다보며 웃었고, 이어서 또 화제로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가기 시작했다.
* * *
하겸죽이 집에서 문제를 푸느라 심사숙고하고 있을 때, 고청운은 마침 사장정을 만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산술 서적의 추가 인쇄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기하학>에 대한 여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뭐라고? 소보에서 <기하학>을 주제로 벌어진 논쟁이 다 자네가 일으킨 사단이라는 겐가?”
이 말을 들은 고청운은 마침 입안에 있던 계화떡 때문에 목이 막혀 죽을 뻔했다.
“천천히 좀 먹게, 체하겠어.”
사장정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앞에 있던 차 한 잔을 얼른 건넸다.
충격을 받은 고청운은 우선 차를 마셔 기침을 가라앉힌 후,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어쩐지 논쟁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자신들 편에 저격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네. 한번 보시게, 자네 책이 지금 얼마나 많이 팔려나가고 있는지. 자네 명성이 더 올라간 것은 어떻고?”
사장정은 ‘빨리 칭찬해 줘!’ 하는 모양으로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