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325)화 (325/504)

325화. 원소 (2)

고청운은 산술 서적을 살펴보던 중, 또 다른 타임슬립자 황제가 이 세계로 오는 바람에 전 왕조에는 ‘서광계’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 왕조의 말기에는 쇄국정책도, 서광계의 번역 작품들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여 고청운이 이 서적 번역을 시도해 보게 된 것이었다. 비록 이 <기하학>이 하 왕조에 단번에 무슨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가 한꺼번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는 자신이 이 세계에까지 와서 빈둥빈둥 놀거나 너무 무능하여 아무것도 이룩해 해놓은 것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여러모로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무슨 의외의 사건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은 정식 인쇄되어 출판이 될 텐데, 과연 이 책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결단을 내려서 일을 행해보기로 하였다.

“전통이라는 것은 깊게 뿌리박혀 있기 마련이지.”

장수원은 고청운이 마치 실성해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위로하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네는 명성이 이미 드높지 않은가. 그들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 말고는, 자네가 그들에 비해 뒤떨어질 게 뭐가 있는가? 게다가 앞서 발간한 자네의 산술 서적 두 권이 대단하니 그들도 자네를 어찌하지는 못할 걸세. 조금 이따가 자네 책이 출판되면 내 분명 자네를 응원함세!”

하지만 장수원은 이렇게 그를 응원하기 전에, 스스로가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수원은 다시 원망스러운 듯 고청운을 쳐다보았다. 모두 이놈 탓이었다. 많은 수재나 거인들이 그에게 3차, 4차 방정식의 풀이에 대해 묻고는 하였는데, 그 자신도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지 몰랐던 것이다. 지금 장수원은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몰래 고청운의 책을 사서 연구하는 수고를 겪고 있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는 항주에 있는 방자명이 거론되었다. 그들은 춘절 명절 선물로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보내온 것을 비난했는데, 이렇게 모양이 화려한 것을 이 두 사내가 어찌 쓰라는 것인가?

“아버지, 우리가 이겼어요!”

바로 이때, 고영량이 인파를 헤집고 나타났다. 고영진과 장연해는 얼굴 가득 흥분한 기색으로 손에 화등을 들고 자랑스러운 듯 서 있었다.

고청운과 장수원은 한담을 멈추었다. 장수원이 고영량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누가 이겨서 받은 등이냐?” 

“저희 형이 수수께끼를 맞추고 받은 등이에요!”

고영진이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큰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맞추지 못했는데, 우리 형이 알아맞혔어요!”

옆에 있던 장연해도 바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나이는 고영진보다 한 살 많았지만, 두 사람의 키는 비슷했다.

고영량은 곁에서 빙그레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고청운과 장수원은 허허 웃었다. 

이후 두 집 사람들은 각자 헤어졌는데, 장수원이 이미 장원루에서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두었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 밤 장원루에서 원소절 시 경연회를 열기로 했네. 자네가 와 준다면 뭇 거인과 수재들이 기뻐할 텐데.”

장수원이 초청했다.

하지만 고청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 형이 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제가 지을 수 있는 시문이라고는 그저 그런 시문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곳에 끼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친우인 하겸죽 사형이 그곳에 가기로 했습니다.”

매년 원소절에 장원루에서는 비슷한 시 경연 대회가 열렸는데, 문인 화객들이 모여 시를 읊고 대작을 해서 고청운도 일찍이 몇 차례 참가해 보았으나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장수원은 그 말을 듣고는 무슨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장수원과 헤어진 뒤, 고청운 가족은 계속해서 거리를 거닐었다. 그들이 진입한 또 다른 거리에는 아까보다도 사람들이 더 많았다. 위쪽으로는 황족이나 귀족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아래로는 평민이나 시민들이 가득했는데, 마치 경성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나와서 화등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고청운네는 어디든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인파에 휩쓸려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2살의 고영량은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또래보다 키가 큰 덕에 겨우 화등 구경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영진은 어른들의 긴 다리 뒤쪽으로 파묻혀 아무리 발뒤꿈치를 높이 들어도 화등 몇 개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저 좀 안아 주세요.”

고영진은 고청운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나왔을 때는 아버지가 나만 안고 계셨는데.’ 

고청운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여 말했다. 

“소어야,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니. 또 그렇게 뚱뚱해서 아버지가 이제는 너를 안아 줄 수가 없구나.”

품속에 안겨있던 고경은 오라버니를 보고 위기의식이 생긴 듯 갑자기 고청운의 목을 더 힘껏 껴안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아빠는 나를 안아주셔야 해요. 둘째 오라버니가 나보다 더 크잖아요, 나는 아직 작단 말이에요.”

고영진은 눈을 크게 뜨고 여동생을 보고, 또 아버지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배를 움켜쥐며 한참을 소리 내지 못했다. 

고청운은 간미가 자신의 허리춤을 꼬집는 것을 느끼고는 웃음을 멈추고 두 사내 하인에게 고영진을 번갈아 가며 안고 구경시켜 주도록 하였다. 

화등 행사는 연속 3일간 열렸는데, 요 사흘간은 통금도 없어, 경성의 백성들은 밤늦게까지 더할 나위 없이 흥겹게 이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저녁, 고청운과 사장정이 만나기로 한 시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었기에 그간의 감흥을 나눈 후, 만난 김에 출판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번은 아내도, 아이도 곁에 없이 고청운 혼자 따로 시간을 들여 찬찬히 원소절의 풍경을 살펴보았는데, 하 왕조의 백성들은 십수 년 전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화등과 거리 행인들의 옷차림만 봐도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장정을 만난 후 한 달, 고청운-톰 신부가 공동 번역한 <기하학>이 정식으로 출판되었고, 이 책은 예상외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 * *

이날 오후, 퇴근을 한 고청운은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온 후 평소처럼 서재에 들렀다가 서신 한 묶음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필통 높이만큼이나 가지런히 잘 쌓아 놓은 솜씨를 보아하니 틀림없이 고삼원이 문간방에서 가져다 놓은 듯했다. 

그는 서신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번역한 <기하학> 책이 출간된 후, 한 달간 그가 받은 서신과 초청이 크게 증가하여, 그 양이 춘절 때와 비견될 정도였고, 그를 연회에 초대하고자 하는 배첩들 역시 당연히 더 늘어났다. 

책의 내용 중 모두의 관심사는 바로 완전히 새로운 ‘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숫자 표기 방식이 매우 유용하고 생각했기에, 해외의 문물이지만 들여와 하 왕조에서 인용하는 것이 괜찮겠다고 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본국에서 이렇게나 좋은 주마(*筹码: 수를 세거나 계산하는 데 쓰는 산가지)라는 문물을 이미 잘만 사용 중이었는데 하필 오랑캐의 것을 가져다 쓸 필요가 있냐고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금으로 만든 밥그릇을 들고도 동냥 다니는 꼴이 아니냐며 주변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현재로서는 후자의 의견이 전자의 의견보다는 강세였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기하학의 번역에 대한 의견은 대부분이 잘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는데, 본 왕조의 공사 설계, 건축 등에 있어서 매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하 왕조에서는 해외 교류에 대해서 아직도 여전히 천조상국(*天朝上国: 중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서 중화문화가 제일이라는 배외사상)이라는 사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날의 하 왕조의 세력은 확실히 매우 강했는데, 하 왕조 밖에 있는 해외 국가들의 세력이 그들보다 강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국가 문물이 가장 좋다고 여기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자라도 그 음식을 먹고 자라난 사람은 제각기 천태만상으로 자라나는 법이니 말이다. 

이 시절의 하 왕조에는 그래도 외국의 사상, 기술, 세시풍속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일전에 출판했던 <출해모험기>라는 책이 그렇게까지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넓은 마음으로 외국의 지식과 문명을 거울로 삼아 그들의 장점을 취하여 우리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상이야말로 학문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하였다.

고청운은 주마의 사용이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이 더 잘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당초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려 고민했을 때도 밥 한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자신이 아무리 기세 좋게 아라비아 숫자 도입을 제창해도 사람들이 순순히 잘 따라 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이 일을 시작했었다. 

아니면 아직 적당한 시기가 되지 않아서, 하 왕조의 풍토에 아라비아 숫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는데, 그것은 본 왕조의 수학 발전 상황이 더 우세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고청운은 논쟁이 있어야 관심도 올라가는 법이라 생각했기에, 본디 관심도를 올리기 위해서 경화소보에서 사람들과 논쟁이라도 일으켜야 할까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가 또 다른 필명이라는 감투를 쓰고 나서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먼저 이를 드러내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지명도도 점점 더 상승했고, 지금 소보를 읽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요즘 들어 길을 걸어 다니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생겨났을 정도였다.

똑똑.

고청운이 마침 서신들을 열심히 읽으며 답장을 쓰고 있을 때, 문 앞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입구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시오.” 

고영진이 아니면 하겸죽일 것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들어오려 했다면, 문 앞을 지키던 소만이 막아섰을 테니 말이다.

간미의 경우, 앞마당에 위치한 이쪽 서재로 오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하인을 보내 모셔오라고 청했을 것이었다.

과연 문이 살짝 열리면서, 하겸죽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형, 다녀오셨습니까?”

고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둘은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 잡았다.

하겸죽이 고개를 끄덕이며 트림을 하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짓도 오래는 못해 먹겠네. 매일 같이 학문 토론이나 지식 교류를 하자며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한 초대에 응해 보면, 결국엔 주점에 가서 술 마시고 밥 먹는 게 다지. 아니 되겠어, 요즘 들어 너무 타락한 나날을 보냈네. 한 달 후면 시험장에 들어야 하는데, 이젠 문을 걸어 닫고 책만 봐야 할 것 같아.”

고청운은 그의 몸에서 전해 오는 술 냄새에 손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맞습니다. 사형, 이번에는 모처럼 이렇게 일찍 경성에 당도하셨으니, 집에서 기운을 차리고 정신을 갈고 닦아 문 닫고 책만 보세요. 나가서 사람들과 교류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너무 잦은 모임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원소절 시 경연 대회에서 하겸죽은 그간의 해박한 학문적 경지를 잘 드러냈었다. 그가 지은 시 한 수가 매우 호평을 받고 그의 그림 역시 특징적이라 일부 문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자, 원소절 이후 하겸죽을 초청하는 자리가 많아졌는데, 이는 하겸죽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는 걸 말해 주었다.

고청운은 이번에 큰 이변이 없는 한, 그의 진사 시험 합격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높다고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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