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원소 (1)
다음 날, 고청운은 호부로 가서 도착 보고를 진행했다. 반 년 동안 외부에 나갔다 왔기 때문에, 고청운은 매 주사의 도움을 얻어 그간 있었던 일을 주로 파악하고 반년 동안의 업무를 숙지해 연말쯤 본업에 다시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이 밖에 한림원으로부터 진 학사의 향시 관련 업무의 마무리가 잘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문의도 받았다. 정식 주임 시험관인 진 학사가 있었던 덕분에 고청운은 부시험관으로서 맡은 책임이 많이 줄었다. 일부는 모두 진 학사 손에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그들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게 된 데는 진 학사의 풍부한 경험 덕이 컸다.
고청운은 밖에 나가 근무해 본 경험 덕분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참여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그는 계속 주임 시험관을 신청해 보려 했는데, 두 번을 참가할 수 있게 되면 정식 주임 시험관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다시 귀경하면 단독으로 황제를 만나 보고를 드릴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마지막에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그의 주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사실 중점을 두는 것은 공공비용으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는 이 훌륭한 산수 경치를 많이 둘러보고 싶었다. 이전에 방문한 담주부의 경우엔 현지의 명승고적을 여러 군데 둘러봤는데, 이 시대의 담주부 풍경은 후대에 비해 전혀 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머지않아, 신년 연휴가 다가와 모든 관아의 업무가 잠시 중단되었다. 금년에도 여전히 그가 연휴 기간의 당직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었다.
춘절에 당직을 서고 정월 초에 관아 업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고청운의 번역 일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춘절에 이어 원소절도 함께 다가왔다.
* * *
‘정월 대보름 등불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과 꽃과 같고, 어지러이 내리는 빗줄기 같기도 하구나. 호화스러운 마차가 길 가득 메우고 아리땁고 우아한 피리소리는 사방에 울려 퍼지네……(*宝马雕车香满路, 凤箫声动, 玉壶光转,一夜鱼龙舞: 남송시대의 시인, 신기질의 시사 작품 중에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고청운은 송나라 시인 신기질(辛弃疾)이 지은 원소절의 풍경을 떠올렸다.
마침 그도 이 시에 나오는 한 구절처럼 가족을 데리고 대낮의 큰길을 거닐고 있었다.
인파가 넘실대는 큰길의 가게들에는 저마다 문 앞에 등을 매어 놓았는데, 높게 걸린 등불들은 하나 건너 하나가 더 아리땁고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 주변으로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간간히 사람들의 듣기 좋은 함성소리도 들려왔다.
“아버지, 정말 시끌벅적해요!”
고영진은 두 눈을 반짝이며 한 손으로 고청운의 옷자락을 꽉 쥐고 걸으면서 경탄해 마지않았다.
고청운은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원소절에 그는 보통 당직을 서거나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았었다. 이 명절에는 큰 거리에 사람들이 유달리 너무나도 많이 몰려들었기에 사고가 발생하기 쉬웠다. 게다가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렸던 터라 아무리 하인들을 대동하고 나온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원소절에는 아이들과 밖을 나서 본 것이 몇 번 되지 않았다.
올해 원소절에는 당직을 서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이 난 덕분에, 고청운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바깥을 구경했다. 방인소 부부는 각자 행동을 하기로 했는데, 옛 친우들과 모임을 갖는다고 하였다.
연한 청색 비단 피풍의를 입은 고청운은 겉에는 흰색의 외투를 걸치고, 머리에는 옥관을 두른 채, 어깨에는 고경을 앉히고 있었다. 그런 고청운의 곁에는 고영진과 간미, 고영량이 있었고, 전후좌우는 하인들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활동 공간은 좁았다. 아무리 1년에 한 번 있는 정월 대보름 나들이라고는 하나,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공기 중에서 풍겨오는 다양한 음식의 향도 맡을 수 있었는데, 특히 꼬치구이 냄새가 짙게 났다. 고청운은 진즉에 집에서 탕원(*汤圆: 찹쌀가루 반죽에 소를 넣어 새알 모양으로 빚은 중국요리. 주로 원소절에 먹는 전통음식으로 가족이 화목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다)을 먹고 왔음에도 지금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자 배가 좀 고프긴 하였다. 그가 이럴 진데, 다른 세 아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리에서 할 말을 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고청운과 간미는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부군, 저희가 너무 일찍 주루에 가는 것은 아닐까요?”
간미는 고개를 들어 고청운을 바라보았다. 이미 며칠 전에 나들이를 나가기로 정한 후 그들은 미리 가격이 중간 정도인 주루에 자리를 예약해 둬서, 지금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량가아, 소어야, 너희들은 등불 수수께끼(*猜灯谜: 음력 정월 보름이나 중추절 밤, 초롱에 수수께끼의 문답을 써넣고 답을 맞추는 놀이) 구경하러 갈래, 아니면 지금 식사를 하러 갈래?”
고청운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고영진의 오동통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답답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형을 보면서 눈만 깜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영량은 눈앞의 등불들을 보다가 솜옷을 입고도 감출 수 없는 동생의 동글동글한 아랫배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저희 그냥 등불 구경이나 가요. 모처럼만에 나왔는걸요. 아직 배고프지도 않고요. 동생아, 네 의견은 어때?”
“좋아, 형 말대로 할게요.”
고영진은 당연히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고영진은 수수께끼를 맞추러가는 것에 매우 의욕적이었는데, 이번이 첫 등불 수수께끼 축제 참가였기 때문이었다. 예년에 그 아이는 옆에서 구경만 했었다.
둘 다 이렇게 말하니, 고청운과 간미도 다른 이견이 없었다. 물론 그의 목을 잡고 있던 고경의 의견은 무시당했다.
꼬맹이는 높은 곳에 앉아서 형형색색으로 밝게 빛나는 등불들을 눈으로 쫒느라 바빴다. 특히 각양각색의 꽃문양의 등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고경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고청운의 귀밑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 등불 수수께끼 맞히기를 할 때, 고청운은 아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단지 간미와 옆에 서서 그들 형제가 다른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그들이 답을 맞추지 못해도 그만이었다.
아이들은 낙담한 것도 잠시, 다시 다음 수수께끼로 뛰어들었다. 이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 * *
얼마 뒤 한 가게 앞에서 고청운은 지인들을 마주치기도 하였다.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장 형.”
고청운은 그리 부르고 공수하여 예를 갖춰 인사를 하려다 불편함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신지!”
장수원은 이들을 발견하고서 매우 기뻐했다. 그는 큰아들인 장연해와 두 명의 하인을 대동하고 있었다.
장연해는 방 누이를 따라 자주 고택에 놀러왔었기에 고영량 형제와도 아주 잘 알고 지냈는데, 아이들은 만나면 인사를 하고서는 바로 자기들끼리 한데 모여서 이야기하러 가곤 하였다.
간미는 상황을 보고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장수원은 고청운의 목에 올라탄 고경을 보고 표정이 이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귓가에 다가와 물었다.
“신지, 또 책 출간을 준비한다고 들었네만.”
고청운은 주변 경치를 살피던 작은 손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느끼며 잠시 생각하고는 얼른 딸아이를 안아 품속에 넣었다. 솔직히 말해서 비록 지금은 딸이 바지에 실례하는 고질병은 고쳤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정말 또다시 이 꼬맹이가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실례라도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음, 어떻게 아셨죠?”
고청운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가슴에 안은 고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아이가 여전히 각양각색의 화려한 꽃등에 시선이 쏠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가 번역한 <기하학>은 모두 15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번역은 이미 전부 완성되었다. 그는 이번 책 앞부분에 아라비아 숫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놓아, 아라비아 숫자에 관해서 일찍이 사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초고를 완성한 후 관례에 따라 먼저 산술 학계에서 유명한 선배 몇 명에게 보내 평론을 부탁한 고청운은 선배들의 반응과 의견에 따라 사람들의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반응이 어떠할 지 한 번 추측해 보고 싶었다.
장수원은 쥘부채를 펴서 흔들며 한껏 자신 있게 웃으면서 충만한 풍류의 기운을 내뿜었는데, 이에 넘어간 젊은 색시가 지나가다 말고 이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고청운이 어이없어 하며 옆쪽으로 한 발짝 떨어져 나갔다.
‘이놈은 또 무슨 수작으로 나비를 유인하겠다고 이 추운 날씨에 부채질하고 있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이쪽으로는 정말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나만의 정보를 얻는 방법이 따로 있다네.”
장수원이 다시 그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자네는 자네가 제시한 그 새로운 숫자 표기법이 사람들에게 통하리라고 보는가? 몇몇 선배들은 자네가 헛수고하느라 난리가 났다던데.”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서 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쓰고 있는 숫자 표기 방법보다는 이게 더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청운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장수원의 소식통이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가 원고를 보낸 지 이틀도 안 되었는데, 장수원이 벌써 내용까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도 다른 문인들과 자주 왕래하고, 경성의 문단계가 꽤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소식에 늘 정통하고 정보 입수가 남들보다 빠른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기도 하였다.
주마(筹码)라는 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숫자의 일종이었는데, 쓰기에는 비교적 편리한 편이었다. 다만 고청운이 가진 선입견으로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현하는 게 여러 사람이 보기에 더 직관적이고 간편해 보였다.
고청운은 수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왔던 과거의 자신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했다. 비록 많은 지식은 잊었어도 다시 보게 되면, 배웠던 것이 기억이 좀 났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번역이 이렇게까지 순조롭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톰 신부는 표준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그렇다고 수학 방면으로 정통한 건 아니어서, 수학에 관한 내용을 표준어로 표현해내는 걸 힘들어했다.
그것은 수학만을 전공하지 않았던 고청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번역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입체 기하와 수론을 다루기도 했던지라 자신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번역을 해야 했을 때에는 결국 또 다른 외국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기에 번역 과정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번 책 번역 작업을 완성한 후, 고청운은 또 다른 평행 시공 세계의 명나라 말기 서광계 (*徐光启: 명나라의 과학자로 상해 출신이며 이탈리아인 마테오 리치로부터 천문 역법 등 근대 과학 지식을 배웠으며 몇 권의 책을 집필하기도 함)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번역 조건은 자신보다 나을 게 없었을 텐데, 그는 단 1년 만에 6권의 번역을 완성했고, 자기 자신은 몇 년이나 걸려 겨우 책 번역을 완성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