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323)화 (323/504)

323화. 성장

“이제야 이야기를 좀 할 수 있겠구나.”

고청운이 고영량의 손을 만져보니 오래 기다렸던 듯 아이의 손이 차가워서 가슴이 아파왔다. 

“밖이 이리 추운데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어찌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게야? 여러 날 내내 기다리고 있던 게냐?”

고영량은 바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버지의 손이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두 사람은 화롯불에 손을 쬐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서신을 보내주셔서 오늘쯤 오실 것 같기에 이제야 나와 본 거예요. 앞에 며칠간은 집사님들만 나와서 기다리셨어요.”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아들이 날마다 부두에 와서 멍하니 자신들을 기다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외증조할아버지께서 그간 몸이 안 좋으셨었는데…….”

고영량은 아버지의의 조급한 기색을 보고 바로 말을 이어 꺼냈다.

“이제는 다시 괜찮아지셨어요.”

고영량은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고청운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에 경성에 큰 눈이 내렸을 때, 벼슬을 내려놓은 후 여유시간이 크게 늘어난 방인소가 교외에 홍매화 몇 그루의 자태가 유난히 예스럽고 고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이 동해 연 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눈이 그치자마자 하인 두 사람을 대동하고 직접 당나귀를 타고 절경이라는 매화나무를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매년 겨울 이런 매화 구경에 나섰지만, 올해는 특히 재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꽃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을 뻔해 그날 저녁 제때에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집에서 방인소를 기다리던 연 씨와 고영량이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두 사람은 밤새도록 마음을 졸이다 어쩔 수 없이 오늘 밤 하루 정도는 어디서 하루 묵고 오시겠거니 했다고 하였다. 이런 일은 그간에도 간간히 발생했던 일이었기에, 조용히 집에서 방인소를 기다리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결국 이튿날 정오까지 방인소의 소식이 없자, 다급해진 고영량이 하인을 데리고 방인소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운이 좋아서 교외의 어느 마을에서 마침 약을 사러 나온 하인을 만나 순조롭게 방인소가 있는 곳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방인소는 평소 건강관리에 주의하여 몸이 줄곧 좋은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눈보라 속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에 감기에 들어 버렸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온 방인소에게 전염이 된 것인지 연 씨까지 덩달아 몸져눕게 된 것이다.

집안 어른들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자, 고영량은 처음에는 조급해하고 당황했는데, 다행히 집안에는 경험이 풍부한 나이든 집사가 있었다. 고영량은 침착함을 되찾은 후 오히려 집안을 전두지휘를 하였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이내 방택과 고택은 금세 안정을 찾았다.

“그러고 나서는 서원에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외증조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봐드렸죠.”

고영량이 지난달에 겪은 고초를 이야기하는데, 마치 방금 일어났던 일인 듯 아주 생생했다. 

“하루는 어느 날 저녁에 외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열이 너무 심하셔서 낭중(*郎中: 관직의 이름, 상서랑(尙書郎)) 한 분을 집으로 청해 하룻밤 머물러 달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너무 무서웠거든요.”

말을 마친 고영량의 얼굴은 불에 익은 것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발그레했다.

“다음 날 외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바로 열이 떨어지셨고, 지금은 완전히 나으셨어요.”

고청운은 만감이 교차해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쩐지 이번에 고영량이 자신을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힌다 하였다. 고영량은 워낙 순탄한 환경에서 자라서 이런 경험이 많지 않았는데, 심지어 이 시대에서 풍한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질병이던가. 고청운은 아이가 느꼈을 마음속의 근심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아들 잘했구나! 아주 잘했어.”

고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고영량의 얼굴을 들어 뺨에 여러 번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주 사내다웠다. 이 집안을 건사할 만해!”

“아버지!” 

고영량은 아버지의 반응에 잠시 놀라더니 얼굴색이 더욱 붉어지며 수줍게 말했다.

“저는 이제 새해가 되면 12살이 된다고요. 어린아이가 아닌데, 이렇게 뽀뽀를 하시다니요!”

그 말에 고청운이 하하 웃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큰아들은 아직도 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껴안고 있던 그 시절의 어린아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들이 이렇게 커버렸는데, 고청운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렇게까지 잘 성장했다는 것에 가슴이 시큰거려오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번에 외증조할아버지께서 아프시는 바람에 고향에 내려갈 기회를 놓치셔서 아직도 집에서 낙담하고 계세요.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아픈 곳을 찌르시면 안 돼요.”

고영량은 고청운을 돌아보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과는 너무 추울 때 고향으로 내려가는 수고를 피하기 위해서 좀 일찍 경성에서 내려오기로 약조해 두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병이 나서 귀향이 지체되고 있으니, 그는 스승님이 이 일로 매우 가책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이전보다는 선박의 운항 속도가 빨라졌고, 바다에는 얼음이 잘 얼지 않는다고 해도 겨울에 장거리 여정을 떠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를 들어, 이번에 그들은 겨울에 경성으로 올라오느라 보온을 위해 돈이 꽤 많이 들었었다. 보온을 위해 계속해서 숯에 불을 붙여가며 왔기에, 얼마나 많은 숯이 들었는지 몰랐다. 다행인 것은 아들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는데, 보다 따뜻한 곳에 위치한 고향으로 내려가기에 조금 더 사정이 나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두 부자는 계속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청운은 조용히 고영량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지난 반년 동안 경성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서원에서 겪은 일 등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고청운은 이에 대해 아이와 함께 사건을 분석하여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발단, 과정을 함께 논하며, 결국 어떤 일이 우연인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전되어 왔는지 이야기하고는 하였다. 

이런 식으로 세상사를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아 시작한 것인데, 적어도 큰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신이 나서 정보를 수집해 오고는 하였다.

둘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반 정도 다 왔을 때였다. 그때 고영진이 고청운이 있는 마차를 타고 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형제가 함께 모여 두런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따금씩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다.

“형, 형이 보기에 나 살 빠진 것 같지 않아?” 

고영진이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얼굴 좀 자세히 봐, 예전만큼 살이 없지?”

아이는 말을 마치자 또다시 자신을 추켜세우는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영량은 솜옷에 싸여 여전히 동글동글한 고영진의 몸매를 보다가 다시 얼굴을 쳐다보았다. 음, 확실히 예전보다 말랐지만, 볼살만은 여전히 불룩해서 아래로 쳐지지를 않았다. 

고영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숙하게 물었다.

“살이 빠졌구나! 오는 길에 너무 힘들지는 않았니?”

“힘들었지, 잘 먹지도 못하고, 늘 생선만 먹었거든. 그나마 다행히 우리가 바닷길로 와서 망정이지, 육로로 왔으면 더 안 좋았을 것 같아.”

고영진은 머리를 매섭게 끄덕였다. 

“난 앞으로 크면, 가장 빠른 배를 만들 거야. 그러면 경성에서 월성까지 아주 빨리 갈 수 있게 되겠지!”

“좋은 뜻을 품고 있구나!” 

고영량이 칭찬해 주었다.

“생선은 확실히 맛이 없지. 나도 일전에 배 타고 갔을 때 생선을 너무 먹어서 그때 질려버렸어.”

동생과 열렬히 토론하던 고영량은 당초 임계촌으로 갈 때 아버지에게 한번 반항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방인소도 언짢아했던 그 사건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고청운은 뜨거운 물을 한 잔 따라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고, 형제가 다시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다. 

‘양신(*良辰: ‘좋은 날’이라는 뜻의 중국어로, 고영랑과 고영진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이 ‘良辰’이라는 단어에서 따옴)이로구나, 양신이야.’ 

그는 두 형제의 우애가 앞으로도 이렇게 돈독하기를 빌었다. 

다만 그는 막내아들의 예전보다 커 보이는 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들이 예전보다 살이 빠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그만큼 긴 여정이 고단했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들딸들의 몸은 튼튼한 편이라서 도중에 병치레를 하지는 않았다. 

세 부자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한 시진 여 만에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 * *

방인소 부부는 고청운의 가족들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는데, 방인소는 고청운과 간미의 표정을 살피며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스승님, 외할머님, 건강은 어떠세요? 의원이 뭐라고 하던가요?”

고청운이 관심을 갖고 물었다. 

방인소는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완전히 나았지, 다 나았어.”

연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청운은 이제 괜찮다는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스승님, 벌써 예순이 넘으셨습니다. 한창 때인 30살이 아니세요. 앞으로 그렇게 감정에 따라 함부로 행동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눈밭을 다니며 매화를 즐기는 것은 우아하고 고상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 날씨도 좀 보세요. 건강에 유념하셔야지요. 눈이 온다는 것은 아무리 날이 좋아봤자 한겨울이라는 것인데, 사람들은 감히 집밖으로 나올 엄두도 못내는 날씨에 어찌 스승님께서는 밖으로 뛰쳐나오시는지, 이건 좀…….”

뒤에 남은 말은 아꼈다.

“노부도 중간에 그런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지.”

방인소가 중얼댔다.

“노부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간미도 불만스러웠다.

“외할아버지, 다음에 또 그러시면 이번에는 부모님께 서신으로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께서 한 말씀을 하시겠지요.”

방인소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경우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했다.

옆에 있던 연 씨도 분을 다 삭이지 못했는지, 이참에 밀린 설교와 빈정거림을 늘어놓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고청운과 간미는 그저 단정히 눈을 내리깔고 앉아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그들 두 노인이 실랑이를 멈춘 후에야 모두들 고영량의 귀향과 관련된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고청운과 간미는 두 노인의 병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바로 귀향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 이번에 아들을 귀향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고영량의 시험은 다음 해로 미룰 수 있었는데, 아이가 아직 어리니 1년 정도 더 늦는 것은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내년 시험에 대해 더 자신이 붙을지도 몰랐다. 

다만 방인소는 이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며칠만 더 있다가 고향으로 출발하자며, 남쪽으로 가면 더 이상 춥지 않고, 따뜻한 곳으로 도착할 때 까지만 충분한 방비를 하면 된다고 하였고, 또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있어 문제가 없다고 우겼다. 

양측은 첨예하게 의견을 대립했다. 고청운은 결국 앞으로의 기후가 어떻게 변하는지 추이를 좀 보고 다시 말하자며 논쟁을 마무리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사실 이미 결단을 내린 후였다. 시험을 1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이 추운 겨울에 길을 재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고청운은 또다시 바빠졌다. 그는 고향에서 챙겨온 특산물을 공주부와 후부를 포함하여 몇몇 지인들의 집으로 보내려 하였는데, 이번에 방인소가 병이 났을 때 그들이 약재를 보내거나 의원을 보내 경성을 비운 그들 대신 집안의 어른을 돌보아 주었으니 반드시 서신을 보내고 정중히 감사를 표해야 하였다. 

특히 장씨네의 덕을 크게 보았는데, 북산현에서까지 서신과 은전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니 하루 빨리 장씨네 선물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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