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상행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 10월 중순이 되었다. 고청운이 고향집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집안 어른들도 서운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저희와 함께 경성으로 가시겠습니까?”
고청운은 의중을 알아볼 겸 말을 꺼냈다.
소진씨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 어미는 가지 못한다.”
그녀의 약간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던 고청운은 오늘 아침 자신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던 노진씨를 떠올리며 혼자 한숨을 쉬었다.
매번 이별할 때마다 너무나도 슬프지만, 또 이별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제가 먼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몇 년 함께 살까요?”
고청운은 웃으며 물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해 왔던 그는 기회를 봐서 지방으로 외근 나갈 일을 탐색했는데, 고향에 인접한 성에서 할 수 있는 임무라면 더 좋아했다. 다만 이런 기회는 원한다고 해서 찾아지지 않았다.
설령 그가 정말로 지방의 다른 성으로 옮겨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람됨으로 보아 그가 지방관으로 부임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역시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내려가 부임을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제자리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새로운 곳에 가서 생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계촌을 유일한 집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다른 곳에 가서 살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만약 그가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때 고청운이 그런 말을 꺼내자, 소진씨가 그의 팔을 토닥이며 짐짓 화난 체 말했다.
“너, 또 그런 말을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너를 흠씬 두들겨 패실 수도 있다.”
고청운은 하하 웃었다.
“못 때리시면서요.”
“두 분은 맘이 아파서 못 때리시더라도, 네 의견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단식이라도 하실 게야.”
소진씨가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고청운은 투항의 표시로 코를 만졌다. 며칠 전에도 그는 농담처럼 벼슬을 그만 두겠다는 말을 했다가 어른들에게 두 시진 동안 호되게 한 말씀을 들어야 하였다. 그들은 그가 절대로 일을 관둘 생각이 없다는 말을 그의 입으로 할 때까지 꾸중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런 결과를 일찌감치 예상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그가 관직 생활을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고청운이 가족들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 비록 저는 경성으로 돌아가지만, 소석이가 다시 고향집으로 내려올 거예요. 소석이는 8월까지는 이곳에 머물 겁니다.”
물론 고영량이 현시와 부시에서 낙방을 하게 되면 8월에 거행되는 원시는 당연히 참가할 수 없게 될 테지만, 우선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하였다.
이 말이 확실히 위로가 된 듯, 소진씨는 다시 진씨 집안에 대해 중얼중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청운은 열심히 경청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분명 그녀는 이런 자신의 의중을 알아챌 것이었다.
소진씨가 보아하니, 그녀 어머니의 생각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들은 이전에도 사촌 지간과 절대 사돈을 맺지 않겠다는 말을 하긴 했었다. 그녀는 지금 단지 그냥 의향을 확인할 겸 말을 꺼낸 것뿐이었는데, 아마도 이쪽으로는 의견이 타진될 가능성이 아득히 멀어 보였다. 큰딸과 작은딸 역시 이쪽 집과 혼인을 맺어 볼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어차피 아들이 수락하지 않으면 친척간의 혼사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당연히 친정과 자신의 딸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녀였지만, 소진씨에게 더 중요하고 제일 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들이었다. 만약 아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그에게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 * *
어른들이 아무리 아쉬워한다고 한들, 결국 집을 떠날 날이 다가왔다.
가족들과 부두에서 눈물의 이별을 한 뒤, 고청운 일가는 다시 귀경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올 때와는 다르게 하겸죽이 함께 상경했다. 그는 내년 3월 회시에 응시할 예정이었다.
“원래는 다시 3년 후에나 시험에 응시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번처럼 자네와 같이 상경 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오지 않을 테니 지금 같이 올라가세.”
하겸죽은 고청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자네에게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는 일이로군. 날 귀찮아하지는 말게나.”
“아주 고대하던 바입니다.”
고청운은 마지못해 웃었다.
두 사람은 곧 침묵을 지키며 약속이나 한 듯 방금의 이별 장면을 떠올렸다. 잠시 동안 말도 섞지 않았기에, 강물 소리만 귓가에 찰랑찰랑 울려 퍼질 뿐이었다.
이어 고청운이 선실로 돌아와 보니, 아들과 딸이 창가 쪽에 엎드려 빠른 속도로 뒤로 지나가는 청산녹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척 시무룩해 보였다.
고청운과 간미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요 몇 달 동안 두 아이는 고향집에서 한 무리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심지어는 사람을 상대하기 싫어하던 고경조차도 친척 자매들과 유쾌하게 잘 어울려 놀았다. 지금 이렇듯 갑자기 어린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이 둘은 당연히 슬픔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방금 부두에서 두 사람이 어찌나 처량하게 울던지, 고청운은 그 모습에 가슴이 다 아팠다.
“자, 소어야, 소아야. 우리 재미있는 놀이를 할까? 아버지가 지면 말 타기를 할 수 있게 해 주마.”
고청운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아이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고영진이 고개를 돌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는 놀이를 할 기분은 아니지만, 만약 아버지께서 하고 싶으시다면 억지로라도 잠깐 놀아드릴 수는 있어요.”
“아빠, 놀고 싶지 않아요.”
고경은 통통한 뺨을 불룩 내밀며 심각한 얼굴로 거절했다.
고청운은 두 손을 비비다 말고 자신을 위해 묵념했다.
‘자녀들 사이에서 내 지위가 많이 낮아졌구나.’
“자, 그럼 엄마가 시 암송하는 것을 가르쳐 주마.”
간미가 살포시 웃으며 고경을 안아 들고 말했다.
“그래요, 시는 외울게요.”
고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량안원성제부추, 경주이과만중산(*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 강기슭의 잔나비들은 울어대고, 쪽배는 어느덧 만겹산을 지나버렸네. 이백의 시 <조발백제성(早发白帝城)>의 구절).”
곧이어 좁은 선실 안에서 고경의 옹알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즘 꼬맹이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는 것을 곧잘 좋아했는데, 집중력이 강해서 배움이 빠르고, 또 쉽게 잊지 않았다.
딸아이의 학습 능력은 고영량과 맞먹었는데, 집중력 면에서는 어렸을 적의 고영량보다도 더 뛰어났다. 물론 고영진이 그들에 비해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고영진은 성격이 더 털털하여 다른 일들에 집중력이 쉽게 흩어졌었다.
고청운은 딸이 집중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 아이는 커서 더 뛰어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그들이 몇 백 년 후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면, 고청운은 딸이 아마도 우수한 학문적 성취를 이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 아이에게는 이후의 인생을 스스로 통제하고, 무엇을 하고 싶던지 다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텐데 말이다.
‘조금 더 크면 황립 여자 서원에 다니게 해야 할까?’
고청운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올해부터 황립 여자 서원의 입학 규정에 변동이 있었다. 앞으로는 관료의 딸이 입학하려면 입학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성적이 좋아야만 입학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만약 시험결과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입학하기 어려웠다.
고청운은 이 새로운 규정이 매우 좋다고 여겼다. 현재 여성들의 학습 풍토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같은 낮은 품계의 관리들에게도 좋은 점이 돌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자신의 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황립 여자 서원에 입학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다.
몇 년 전에 경화소보에서는 황립 여자 서원이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개방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한 기회가 돌아간다고 비평한 글을 실었었다. 그 글을 보고 깊이 공감한 고청운은 입학시험을 그 해결법으로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가 시험을 통한 입학기준의 옳고 그른 점 역시 일목요연하게 잘 뒷받침하자, 아무도 그를 비평할 수가 없었다.
당시 많은 관료들은 그를 성원했고, 너도나도 입학 선발 기준을 짜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여론이 진행되는 동안, 소보들은 이 일을 가지고 정말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결국 사람들은 입학 기준으로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나, 아쉽게도 황립 여자 서원에서는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가 되서야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그는 황립 여자 서원이 경화소보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조언이 어떤 거물의 눈에 들었는지까지는 잘 몰랐지만, 어쨌든 결과가 그에게 유리하게 나오니 그만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 후, 고청운과 간미는 의식적으로 고경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녀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잠시 공부에 대한 흥미를 키우는 걸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물론 그녀가 7~8살이 된 후, 서원에 가기 싫다고 할 경우엔 무리하게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녀가 좋아할 정도로만 공부를 시킬 예정이었다.
어쨌든 고청운은 학교를 다닌 여성이 학교를 안 다닌 여성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딸이 서원 내에서 또래와 지내며 친구라도 사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고경은 집에서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고향에서는 다른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함께 노는 걸 본 고청운은 그녀가 속마음으로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 지내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배 위에서 한 달이나 흔들림에 시달려 12월 20일이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다시 경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두에는 반년 만에 만난 고영량이 달려 나와 눈물을 삼키고 있자, 고청운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살짝 놀랬다.
고영량은 고청운 등 일행을 보고는 매우 기쁜 듯 달려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는데,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간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고영량의 옷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으로 헤집어 가며 찬찬히 살피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고청운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우선은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날씨가 추워져서 아이들이 밖에 오래 있다가 감기가 들지도 모르오.”
간미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후 손수건으로 눈을 닦으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그녀는 서둘러 하인들을 지휘하여 짐을 나르도록 하였다.
“도대체 어쩐 일로 이렇게 나와 있었느냐?”
고청운이 고영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관심을 갖고 다정하게 물었다.
“혹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냐.”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들을 따라 나선 사람은 방택의 둘째 집사였다.
고영량은 반가운 마음에 고청운의 큰 손에 머리를 문지르다가, 문득 자신이 이미 많이 컸기에 이런 행동이 보기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멈추고 얼굴색을 약간 붉혔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고청운은 그 말에 의아했지만, 부두에 사람들이 너무 붐벼서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먼저 가족들을 마차에 올라 태우고 난 후 다시 묻기로 하였다.
고영진은 형을 보고 매우 기뻐했고, 고경은 간미의 품속에서 몰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커다란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번쩍였다.
고영량이 그런 고경을 보고 낙담하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겨우 반 년 못 보았을 뿐인데, 여동생이 저를 몰라보네요.”
“아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게야. 나중에 여동생과 말을 많이 해 주렴. 그러면 다시 너를 알아볼 게다.”
고영진은 ‘자신은 형을 잊지 않고 있다’는 듯 형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그만의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형, 나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서 진짜 재미있게 놀았어. 내가 이야기 들려줄게. 형에게 줄 선물도 가져왔는데, 내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다 가져왔어.”
고청운은 방충(方忠)과 하인들의 채비가 다 끝난 것을 보고, 간미에게 딸과 고영진을 데리고 먼저 마차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고영량과 함께 또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에 그는 말을 아주 잘 탔지만, 부두에서 집까지는 여기서 아직 한 시진 넘는 거리를 달려야 했기에, 날씨가 너무 추워 마차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