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상봉 (2)
곧이어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고청운은 아이들에 대해 물었고, 소어가 그저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래도 매일같이 공부해야 하는 과업을 잊지 않고 늘 할 일을 다 한 후 나가 놀았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과연 그의 학업이 퇴보했는지, 아니며 진보가 있었는지는 저녁에 시험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서 그 아이에 대한 태도를 어찌 취할지 결정하면 되었다.
그는 다시 고경을 보았는데, 고경은 그에게 뽀뽀를 몇 번 해주고 나서 언니 동생들과 놀러 갔다. 걷는 모양이 예전처럼 가끔 비틀거리는 것도 없이 오히려 아주 빨리 달리고 있었다.
고청운은 이 모습이 꽤나 낯설게 느껴졌는데, 이전에 경성에 있을 때부터 고경은 남들과 잘 붙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두 달 만에 만났는데 왜 딸이 나를 더 반겨주지 않았을까? 단지 몇 번의 뽀뽀라니, 너무 무성의한 것이 아닌가?’
그가 고경을 주시하고 있자 간미가 말했다.
“소아가 집으로 오니 어머님께서 매우 좋으셨는지 어디를 가시던 꼭 데리고 다니셨어요. 소아는 집에서 다른 자매들과 어울려 놀다 보니, 예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졌어요.”
그렇게 보여서 고청운도 매우 기뻤다.
그들이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에도 가족들은 계속해서 울고 있자, 고청운도 얼굴을 엄숙하게 바꾸었다. 이내 그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역시 전문가가 나서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과연 그가 나서서 위로하자 모두들 결국 울음을 멈추고 집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집안으로 한 명씩 들어갔다.
고씨 집안사람들은 진씨 집안의 친척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자 극히 감동한 나머지, 이틀 연속이나 끊임없이 각자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누었다.
한편, 고청운은 쏟아지는 배첩들 때문에 또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간략하게 회답을 남기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얼굴을 한 번 비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런 교제나 접대들에 대해서는 별로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하긴 그의 임산현에서 지닌 신분과 사회적 지위는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해도 될 만큼 높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건 고청운은 가족과 벗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돌아온 다음 날, 간미의 집으로 장인 장모님을 찾아 인사를 드린 고청운은 하 수재를 찾아갔다.
하 수재의 집에 도착한 고청운은 하림을 통해 자신의 산술 서적이 월성과 상성에서 모두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 수재가 병색이 깊어 이미 반년 동안 병상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허탈함과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생명을 겨우겨우 연장하고 있을 뿐,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고청운이 그를 보러 갔을 때, 하 수재는 이미 정신마저 혼미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당연히 고청운도 알아보지 못했다.
침상 앞에서 하 수재를 정성껏 모시고 있던 하림과 하지가 외려 고청운을 위로하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는 올해 여든이 다 되시는데, 병이 나셨을 때만 해도 농담을 하시며 자신은 이미 장수한 노인이라 할 수 있다며, 이렇게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호상이니 저희더러 힘들어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습니다.”
“왜 일찍 서신으로 알려주지 않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약재 정도는 갖다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원래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모두 항상 자신의 뒤에 있어 줄 것만 같았는데, 세상사가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 돌아오더라도 그들이 아직 건재하여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애석하게도 시간이 가장 무정했다. 고청운은 늙어서 노인들이 먼저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난 뒤에야 이 상황이 익숙해질 터였다.
생로병사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고청운도 이 이치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이에 대해 초연해지지 못할 것이며 여전히 이 때문에 슬퍼할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저희한테 서신을 부치지 못하게 하셨어요. 자신의 병은 자신이 제일 잘 아신다며,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하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아버지의 평생에 걸친 자랑인 사람이었다. 고청운의 이름을 자주 거론할 수 있던 것은 그에게 평생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그가 비록 제일 초반에만 고청운을 가르쳤을지라도 진사 한 명을 가르쳐 냈다는 건, 이 임산현은 물론, 임양부 전체를 통틀어도 단연 백에 하나 있을 만한 일이었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와 하 수재는 정식 사제 간은 아니었지만, 그가 서당에 있을 때 하 수재가 잘 대해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자신은 그렇게 빨리 동생에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결국 그 덕분에 자신은 현학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하 수재는 처음엔 고청운네 집안이 가지고 있던 선착장 인근 땅에 대한 남들의 야욕을 막아내 주었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었다. 두 집 사이는 줄곧 좋았으며, 맏누이와 하겸죽의 관계까지 걸쳐 있었으니, 고청운은 정말이지 이 노인의 일로 크게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참, 아직 거인에 합격하신 일을 축하하지 못했군. 우리 집 주소는 알고 있을 테니, 내년이나 혹은 언제든 경성에 시험을 보러 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고청운은 하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직 임산현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그는 고삼원에게 부탁하며 올해 합격자 명단을 사 오라고 했는데, 하지의 이름이 중간 정도의 석차에 올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고청운은 그의 큰사촌형과 둘째 사촌동생이 낙방한 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는 할아버지를 모셔야 해서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림 부부는 일 년 내내 밖에 있었고, 그와 여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키웠기에 가장 사이가 두터웠다.
고청운은 그가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선생님의 사모님인 조 씨를 찾아뵈었는데, 요 며칠간 하 수재의 병세가 심해져 며칠 동안 바빴다가 부주의로 감기에 걸려 몸져누워 있었다.
간미와 하지의 여동생인 하 낭자는 모두 안에 있었기에, 고청운은 안에 오래 함께 있기가 어려워 병풍 밖에서 여러 마디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녀가 이미 약을 복용했는지 지금은 점차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좀 느긋해졌다.
* * *
약재 등 선물을 하씨 집안에 남긴 채 돌아 나온 고청운의 발길은 여전히 무거웠다.
간미가 그런 그를 위로했다.
고청운은 간미의 손등을 토닥이며 탄식하듯 말했다.
“미아, 나는 정말이지 나무는 고요하게 있고 싶어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 이 상황이, 모든 일이 희망대로 되지 않는 것이 두렵소.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가 많아지셨지. 할머니만 보아도 그렇지 않소? 조금 부주의해서 넘어진 것뿐인데, 바로 옆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이 있는데도 뼈까지 접질리셔서. 예전 같으면 절대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오. 결국 역시 어른들이 연로하신 탓이오.
미아, 나는 혹시라도 경성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될까 봐 두렵소……. 그때는 내가 관직 생활 때문에 집안 어른들을 등한시하고 살아왔다고 큰 후회를 하게 되지 않을지 모르겠소.”
그런 장면만 생각하면, 고청운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의 자신이 그런 한을 품을지 어떨지는 정말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고청운은 자신의 소위 전생에 대해 갑자기 생각하게 되었는데, 일전의 그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해마다 장학금을 받았으며, 졸업이 임박했을 때 석사 연구원으로 학교를 더 다닐 기회가 있었다. 다만 외할머니를 생각해 공부를 더 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도리어 읍내에 위치한 관공서에 말단 공무원으로 시험을 보아 들어가게 되었었다. 당시 그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았었는데, 그 이후로 외할머니를 돌보면서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닥친 상황이 전생의 그때와 얼마나 비슷한지! 그는 어젯밤에 다시 <송사>를 보면서 포증(*包拯: 북송의 명신)이 진사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했다는 사례를 떠올렸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다시 관직에 나갔다.
간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휴, 어르신들께서 우리를 따라 함께 상경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서로에게 좋았을 테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당신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결국 간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마차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잠시 마차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간미는 고청운이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 주제를 돌려 흥미롭게 물었다.
“부군, 진씨 집안이 정말 우리가 있는 곳으로 이주하실 계획이라고 하세요?”
간미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고청운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거요. 만약 진씨네 표형이 수재 시험에 떨어졌더라면 이주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오. 7년 전 표형이 시험에 합격한 후부터 그들의 생활이 예전과는 달라졌을 테니 말이오. 일단 이주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 걸쳐서 다 고민을 해볼 문제지요. 온 식솔들을 죄다…….”
집안에 수재 하나만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현지에서 그들이 업신여김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할 일은 없어질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생겼다. 하물며 그도 있지 않은가.
고청운은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한 현에서 6품 관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물며…….”
고청운은 간미의 손을 가져와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불그스름한 손톱에 뽀뽀를 하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에 이주해 오신다면, 진씨 집안은 고씨 집안의 진두지휘에 따라야 하게 될 텐데, 외할아버지 측에서 그리하실 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으실 거요. 이전에 그렇게 어려운 시절도 모두 견디어 냈는데, 더욱이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소.”
비록 서로 십여 일 정도밖에 함께 지내보지 않았지만, 고청운은 여전히 명석한 진씨 가문 사람들의 두뇌와 일가족의 단결력으로, 앞으로 차례대로 다음 세대를 계속해서 양성해 내기만 하면 언제고 천천히 그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찬성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 간미가 이번엔 반대로 고청운의 손을 잡고 자세히 훑어보다가, 그의 늘씬한 손가락에 붓을 쥐느라 생긴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부군, 정말 소어를 데리고 밭 경작을 하실 셈이신가요?”
남들 앞에서만 아들들 이름을 부를 뿐, 그들 부부 둘만 함께 있을 때는 보통 아이들의 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음, 기왕이면 왕성한 기력을 가졌으니, 그 아이에게 농활을 시켜볼 셈이요. 그래야 매일같이 밖에 나가 놀 생각만 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고청운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영진은 산을 오르내리고 나무를 타는 것 등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을 새까맣게 태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하필이면 몸매가 여전히 뚱뚱해서, 고청운은 아이의 운동량과 식욕이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이에게 농촌의 일을 시키려는 가장 큰 이유는 고영진의 학업에 크게 진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미 일행이 고향 땅을 밟기 전에, 고청운은 사촌형인 고청명에게 서신을 보내어 고영진의 학업 진척도와 앞으로 공부해야 할 내용 등을 상세히 적어 아이의 교육을 좀 도와달라는 말을 전했었다.
그런데 고청운이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밤, 고영진의 학습 상황을 점검해 보니 아이의 학업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고청명이 아이의 공부를 돌보면서 잘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영진의 학업을 매우 중시했으나 아이의 기존 학업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던 듯싶었다. 그는 고영진을 족학의 아이들과 함께 대했는데, 족학 내에서 나가는 진도는 고영진이 하고 있는 공부보다 진척이 늦은 내용들이라 고영진은 공부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여유 있게 경성에서보다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고영진은 학업이 아닌 다른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