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301)화 (301/504)

301화. 시험 (1)

“좋다.”

고청운은 문득 이런 부탁은 입이 열 개라도 핑계를 대고 안 할 수가 없겠다고 깨달았다. 

후부의 그 할머님은 고청운의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았는데 여전히 건재하신 듯, 육택과 육훤 부자를 시켜 자주 차남 집을 돕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그 편애가 어찌나 심한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전 경성이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어했다. 

“스승님, 곶감이 참 맛있습니다. 보송보송하니 건조도 잘 되어있고, 단맛도 정말 좋네요. 정원에 있던 그 두 그루의 감나무에서 딴 감으로 만드신 겁니까?”

육훤은 몇 입 만에 곶감 하나를 다 베어 먹고도 아직 모자란 듯 보였다. 

“몇 년 전 내 고향에서 만났을 적에도 포도가 맛있었다고 하더니. 이것은 우리 아내가 직접 만든 것인데, 맛이 좋지? 너도 나무를 잘 한번 키워 보거라.”

육훤은 그들 앞에서 후작 가문의 세자로서의 까탈스러움 혹은 교만함을 내비치지 않았는데, 이는 어쩌면 육훤의 또 다른 본모습일지도 몰랐다. 

고청운은 한 번은 장원루 3층에 있다가 육훤이 한 무리의 친구들을 이끌고 큰길가에서 말을 타고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대동한 채 거리에서 축국 기예를 겨루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어린 친구들로부터 빼곡히 둘러싸여 있던 그때의 육훤은 기개가 강하고, 꽤나 멋져서 방탕한 기질까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남들 눈에나 그런 풍류를 즐기는 사내로 보일 뿐, 사실 그는 그쪽으로는 여느 귀족 자제들과는 다르게 거의 매일같이 황립 서원에 갇혀 있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쐴 기회가 아주 적었다.

“이게 정말 맛있기는 합니다.”

육훤은 곶감 하나를 더 먹고 나서 마저 말을 이어 갔다. 

“……스승님, 저 곧 정혼하게 될 것 같아요.”

고청운은 어리둥절했다. 고영진마저 곶감을 먹는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육훤은 거의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하며 하하 웃고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정혼 상대는 영백부의 조카딸입니다. 음, 바로 영국공(*国公: 중국의 작위명 중 하나로, 봉호로는 세 번째로 높고, 작위로는 첫 번째로 높은 작위였다) 세자의 적장녀입니다. 앞서 아버지께서 결정해 주신 일이에요.”

여기까지 말한 육훤은 잘생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 안의 밀빛 피부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영국공?’ 

고청운은 신속하게 상대방과 관련된 정보를 회상해 보았다. 비록 국공 본인은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어떤 직책도 맡고 있지 않았지만, 일전에 전장에서 세운 공이 혁혁하여 여전히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에 매년 춘절을 지낼 때 황궁에서 보내오는 하사품을 받고 있었다. 

영국공의 아들은 아직 세자 신분이며, 바로 호부 영 낭중의 맏형이자 무인으로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한 명은 국공부의 세자이고, 또 한쪽은 후부의 세자이니, 세대 차이가 나기야 하지만, 같은 항렬이니 두 집안의 성혼은 완벽하게 걸맞는 집안끼리의 혼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정혼 상대를 본 적은 있느냐?”

고청운은 육훤의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으나, 웃음을 꾹 참으며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보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육훤의 얼굴에 홍조가 더 짙어지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 혼인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거 참 잘 되었구나. 아버지께서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공부와의 혼인 관계를 맺게 되면, 육훤의 세자로서의 자리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었다. 

이 일 년 동안 육훤의 남동생의 명성은 자신의 큰아들만큼이나 꽤 좋았다. 그가 어린 나이에 효성이 지극하고, 천성이 총명하며, 귀엽고 잘생긴 외모에 유명한 대유(*大儒: 대학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기에, 고청운은 육훤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육훤이 일 년 내내 황립 서원에서 기숙을 하느라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적어, 육택의 감정에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리께서 정하신 혼사겠지?”

고청운이 다시 한번 물었다. 육훤은 올해 16살이었는데, 이 시대에 정혼을 하는 나이로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고 딱 적당한 셈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육훤이 곧 성혼을 할 것을 생각하니, 고청운은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5살 때 이 아이를 처음 만났는데, 어느덧 16살이 되다니.’ 

육훤이 고개를 끄덕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고청운은 마음이 더욱 느긋해졌다. 육씨 가문의 두 형제는 일문일무(一文一武)로 진로를 정한 모양이었다. 고청운이 보기에 육택의 머리는 여전히 비상했고, 환난을 미연에 방지할 줄 아는 빼어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긴, 그는 늘 전쟁터에서도 그런 혁혁한 공을 세워왔던 사람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유효한 책략을 세울 수 있었기에, 황제의 심복이 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그가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종횡무진하며 더 높은 직책을 향해 유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집안일에 대한 관리 역시 무난할 것이라고 여겼다.

“아버지는 제게 잘해 주십니다.”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던 육훤이 고영진을 힐끗 쳐다보고 갑자기 웃더니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스승님, 소어가 어찌나 맛있게 먹고 있는지 좀 보세요. 벌써 세 개째예요!”

이 말을 듣자마자 고청운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고영진을 보고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

”소어야, 네가 어렸을 적에 눈이 얼마나 크고 둥글었는지 아느냐. 그 검은 눈이 어찌나 영민해 보이던지, 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허나 안타깝게도 지금 네 얼굴에 살이 너무 많이 올라서 눈이 살에 밀려 작아져 버렸구나. 이 얼마나 아까운 일이더냐!”

고영진은 말을 듣자마자 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 꼿꼿이 앉아 더 이상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 * *

육훤은 고청운네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그 전에 고영량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다시 모인 아이들은 낮잠도 안 자고, 한참 동안 수군수군 모여서 떠들어 댔다. 

한참을 헤헤 웃다가 오문이 들어와 현재 시간을 알리고 나서야 육훤은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육훤이 떠난 뒤, 고청운은 두 아들을 붙들어 두고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학문은 근면함으로 그 조예가 깊어지고 게으름을 피우면 뒤떨어지기 마련이었기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아이들의 학업을 직접 독려해야 했다. 

큰아들은 좋은 공부 습관을 가지고 있어 아직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막내아들은 아직까지 장난기가 비교적 심한 편이라 조금 뒤떨어졌다.

* * *

복습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 버렸다. 고청운이 일전에 작성해 둔 필기 내용들을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다 가버렸던 것이다. 

4월 15일, 향시 부시험관을 뽑는 고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험 장소는 보화전으로, 이곳은 이미 고청운에게 친숙한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이곳에서 공사(*贡士: 회시 합격자를 지칭하는 말)가 되고 난 후 이곳에서 치러진 복시, 전시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또한, 한림원에서 근무할 적에 다른 사람들의 시험 준비를 도운 적도 있었기에 현재로서는 이곳에 당도했다는 것만으로는 긴장감이 생기지 않았다.

하 왕조는 13개 성(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번에 임용되는 주임 시험관이 26명인 것에 비해 부시험관의 신청자는 100여 명이나 되었다. 

다들 전에 살던 고향을 다시 방문한 듯 시험 장소에서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폐하께서 이미 그중 몇 사람을 주임 시험관으로 흠정(*钦定: 황제의 명으로 제정하다)하셨다고 하네. 이 시험은 그저 형식을 차리는 것뿐이라지.”

장수원이 고청운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한마디했다.

고청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정상적이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는 모든 시험관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부 대형 성(省)의 시험관으로 파견 갈 인선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좋은 자리는 황제의 승낙 하에 황제의 심복들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그도 나쁘지만은 아닌 것이, 그나마 우리에게 기회라도 주어질 수 있었지 않은가. 6년 전만 해도 이런 자리를 위해서는 대인 나리들 댁의 문을 두드리고 다녔어야 했을 것이네.”

장수원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이런 고차 제도는 사실 단 한 번 거행된 적이 있었을 뿐이라, 이번이 두 번째로 열리는 것이었다. 

고청운도 동의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이전에 이 장소에 모이기만 하면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더 이상 관청의 신참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화전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다만 담소를 나누는 소리만은 자연히 조금 낮추고 있을 뿐이었다.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사람들이 함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더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니, 담자례, 공봉명, 왕 주사 등 몇 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외 다른 사람들 중에는 각양각색의 젊거나 나이 든 사람이 두루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60대 후반으로 매우 생소한 낯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고청운은 그의 이번 고차 성적이 특별히 좋거나 관직이 높지 않다고 하면 아마도 채용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시험관으로 지방 발령을 가게 되면 장거리 여행을 하느라 체력 소모가 심한 데다 시험 문제도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성에서 주최하는 향시에 지원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었다. 다만 경성에서 열리는 향시의 시험관 선발의 요구 조건은 더욱 까다로웠다. 

“듣자 하니 3년 전 선발되었던 부시험관 중 어떤 사람은 향시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황제의 지시로 그대로 다른 성의 학정(*学政: 청대(清代) 각 성(省)의 교육 행정 장관)을 맡았다고 하더군요.”

고청운은 장수원에게 이렇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지방관 역임을 바란다는 것은 아니었다.

장수원은 눈살을 약간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 

고청운은 그런 그를 보고 웃었다. 

현재 방자명은 항주에서 일을 잘하고 있었는데, 위아래 관료들과 관계가 좋았다. 지금 그는 식량 운송, 수리(水利) 소송 등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쪽 근무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난 뒤, 소송 및 재판 쪽으로 손을 뻗어 아주 한층, 한층 공을 들여 몇 가지 오래된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했으니, 해당 지부 관아 내에서 정식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 감독관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고청운이 잘 알고 있는 사람들로, 한림원의 오 학사 그리고 두 명의 이부 및 예부의 관원이었다. 

이번 고차는 이부, 예부, 한림원이 공동 주관하는 것으로, 예부에서 시험 자격을 심사하고, 한림원이 문제를 출제했으며 이부가 관원을 파견하는 일을 도맡았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시험지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머리를 살짝살짝 돌려가며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무척 신기한 것이 그들은 이미 시험장을 떠난 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시험장에 다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다시 감돌았다는 것이었다.

고청운도 마찬가지였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설레는 것일까? 혹은 그리웠던 것일까? 그 이유는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좌우를 둘러보니, 모두들 기분이 좀 이상한 듯 보였다. 예를 들면 오른쪽 담자례의 경우, 등을 너무 곧게 펴고 있는 데다 턱마저 지나치게 꼿꼿하게 추켜올리고 있어 부자연스러워 보였으며, 왼쪽의 공봉명은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청운은 더 이상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주의력을 다시 시험에만 집중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위치에 단정히 자세를 고쳐 앉아, 맑은 물을 벼루에 붓고 손에 먹을 가는 도구를 들더니 천천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얼마 후 시험장을 다시 돌아보니 모두 같은 동작으로 먹을 갈고 있었고, 동작들도 꽤 가지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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