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복습
“어찌 되었건, 나는 자네가 부럽다네.”
왕 주사는 의기양양하게 손에 든 신청서를 흔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들이 잘 안되면 기댈 곳이라고는 아버지밖에 없겠지. 만약 아비가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신을 은음으로라도 벼슬에 올릴 수 있으니 말일세. 뭐 아무리 상황이 나쁘다고 한들, 내가 고향에 양질의 전답도 보유하고 있으니 어찌 되어도 아이를 굶겨 죽일 일은 없을 테지만.”
고청운은 예전의 기억들을 되짚어 보았는데, 그의 집안에서 몇천 묘에 해당하는 양질의 전답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는 고향 현지의 대지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됐다, 여기 돈 걱정 없는 나리 한 분이 더 있었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마침내 예부에 도착했다. 신청서를 내고 나니 이제 시험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시험 날짜가 정해지면, 내가 바로 알려드리리다.”
예부에서 일하는 장수원이 신청서를 받아들고, 고청운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덧붙여 말했다.
“나도 지원하기는 했지.”
“천리(*千里: 장수원의 자(字)) 형도 당연히 되실 겁니다.”
왕 주사와 장수원은 진사 동기라 자연히 그의 실력을 뛰어넘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장수원은 장원루에서 수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기 때문에 학식 면에서는 틀림없이 크게 뒤처질 일이 없을 것이었다.
장수원은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는데, 꽤나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다가 신청서를 내러 오는 사람들이 계속 들이닥치자, 세 사람은 더 이상 한담을 나눌 수가 없었다.
예부를 나온 고청운은 왕 주사와 작별을 고했고, 바삐 호부로 돌아와 근무를 계속했다.
* * *
오후 퇴근 시간이 되자, 고청운은 어젯밤에 간미가 자신에게 모임이 있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 생각나, 말머리를 돌려 한림원 오 학사(吴学士)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오 학사의 집과 그들의 집은 같은 구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말을 타고 이동하면 2분 정도의 거리였다. 고청운이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는지, 문밖에 마차들이 긴 줄을 이루고 대기하고 있었다.
고청운이 자신의 집 마차를 찾아가자, 소만이 그곳에서 말의 갈기를 빗겨주고 있었다.
고청운을 본 소만이 서둘러 절을 했다.
“마님은 언제 나오실 것 같으냐?”
고청운이 바삐 물었다.
“나으리, 방금 춘분이가 나와서 말을 전해 주었는데, 마님께서 곧 나오실 채비를 하시는 중이라 하였습니다. 아마 주인댁에서 이미 손님들을 배웅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소만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는 작년에 간미의 몸종인 곡우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기름진 물은 외부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고, 집안에 좋은 사람들끼리 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이전의 춘분의 경우, 집에서 사람이 찾아와 속량(*赎身: 노비, 기생 등이 돈이나 다른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 것)해 주어서 이미 고택에서 나가고 없었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씨 저택의 문지기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요청을 완곡히 거절하였다. 오늘 연회에 온 사람들은 모두 부녀자들뿐 인데, 다 큰 성인 사내가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소만과 막 몇 마디 잡담을 나누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봉명도 도착했다.
두 사람은 모두 예를 갖추면서 인사를 나누고 크게 반가워했다.
“공 형도 부인을 모시러 오셨습니까?”
공봉명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 오늘 연회 자리가 길어질 줄 알고 냅다 모시러 왔다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 마님이 집으로 돌아와 계속 불평했을 테지. 이게 다 자네 탓일세. 매번 자네가 자네 집 마님을 데리러 오는 바람에, 내가 봉변을 당하고 있지 않나.”
고청운은 코를 문지르며, 힘주어 그를 토닥이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책임을 저에게 전가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날이 좀 저물었기에, 또 마침 집에 가는 길이라 마중 나온 것뿐입니다.”
고청운은 원래 간미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낮에는 출근을 해야 했고, 저녁에 돌아가면 혼자 해결할 일들이 남아 있어서 서재에 머물러야 했으며, 중간에 아이 셋과 노인 둘까지 있어서 부부 둘이 유일하게 귓속말이라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바로 밤에 침상에 누웠을 때뿐이었다.
고청운은 오늘부터는 이전에 배웠던 사서오경의 복습까지 시작해야 하니 밤에 자는 시간이 더 늦어질 것이기에 서둘러 간미를 데리러 넘어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간미는 칠흑 같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꽃 모양 자개 장식을 꽂고 있었고, 둥근 깃 모양의 꽃무늬가 있는 연한 황갈색 긴 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마차 옆에 있던 날렵하고 큰 키의 고청운을 본 간미는 눈을 저절로 빛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부군, 오셨습니까.”
간미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인사에 화답한 고청운은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안아달라고 손을 뻗고 있던 고경을 혜향의 품으로부터 건네받고는 웃으며 말했다.
“퇴근하고 마침 가는 길이라 들렀소.”
그때 방 누이도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고청운은 장수원의 막내딸을 한 번 얼러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런 듯 아닌 듯 그들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느낌이 들자, 고청운은 비록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라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이번에 고청운은 말을 타지 않고 간미 모녀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 * *
“소아야, 오늘은 바지에 오줌을 싸지는 않았니?”
고청운이 고경에게 물었다.
“없어요. 그렇게 하는 사람 없었어요.”
고경은 작은 얼굴로 근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청운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턱을 만지며 말했다.
“소아가 사람에 따라 대접을 달리하는 법을 아는 듯한데, 이런 자리에서는 실례를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아나보오. 미아, 나중에 소아가 또다시 바지에 실례를 하고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거든, 바지를 갈아 입혀주지 말아 보시오. 아주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꼬맹이가 되면 사람들이 다 꺼려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그는 아이의 이 나쁜 습관을 꼭 고칠 거라 결심했다. 이 꼬맹이는 무슨 생각에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으나, 한마디 말을 하는 것조차 귀찮은 것인지 도통 입을 떼지 않았다.
간미도 뭔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딸을 한 번 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경을 보니, 아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기어가 머리를 간미의 품에 파묻고 통통한 엉덩이를 고청운 쪽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고청운과 간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후 간미는 마음을 다잡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겨 두어 번 시도해 보았는데, 고경은 그 이후로 다시는 말하는 것에 게으름을 피우지 못했고, 바지에도 실례하지 않게 되었다. 하여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회자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두 사람의 연회석상 이야기로 돌아와, 고청운이 비록 호부에 갔다고 하지만, 이전에 몸담고 있던 부서의 전 상사의 연회석까지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부녀자들끼리의 모임은 더욱 그러했다.
연회라고는 하지만 평소에 보통 일반적으로 만나면 꽃을 감상하고, 나비를 잡거나, 강아지들을 구경하고, 시를 짓거나 학을 감상하는 활동하는 모임들을 주로 가졌는데, 다들 여러 해 동안 친분을 쌓아서인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게다가 오늘은 오(吴) 공인(*恭人: 4품 관리 부인의 호칭)의 생일이기도 했으니 이런 날에 모임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 모임은 한림원에서 일했던 남편들을 둔 부인들이 모인 자리였다.
간미는 이 부인들을 알고 지내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가끔은 고청운이 모르던 정보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도 또 첫째 아들에게 중매를 서려는 사람이 있어 얼른 화제를 돌려 버렸어요.”
간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아들은 이제 겨우 11살이고, 아직 앞날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그 부인들은 뭘 그리 서두르는 걸까요? 게다가 우리 쪽에서도 며느릿감을 잘 살펴봐야 하는데 말이에요. 저는 우리 아들이 너무 일찍 약혼하는 건 싫습니다.”
불평 섞인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선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고청운은 이마를 짚으며 그 말에 동의했다.
“량가아가 열다섯, 열여섯 정도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급할 것이 없지 않소. 만약 아이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또 어찌하오?”
그의 마음속에서 아들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지금 성혼이라는 큰일을 벌써 결정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적어도 적정 나이는 넘겨서 논해야 했다.
간미는 고청운의 말을 듣자마자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 또 허튼소리를 하시는군요, 그 아이가 어디 가서 남의 집 여식을 알고 지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당신, 량가아에게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그 아이가 어울리지 않는 며느릿감을 데려온다고 하면 저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서로에게 걸맞는 수준의 집안의 여식을 고집할 생각이었다.
“좋소. 량가아와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소.”
고청운은 급히 투항했는데, 간미의 며느리 선택 기준에 대해 마음속으로 아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고청운은 그간 이런 화제만 나오면 한쪽 가슴이 찡해지는 것 같고, 우울하기도 하였다.
‘아들이 곧 성혼을 하게 될 것이고 몇 년 후에는 나도 할아버지가 될 텐데, 이는 내가 곧 늙을 거라는 걸 뜻하는 걸까?’
* * *
저녁 때, 고청운은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이 오후에 내렸던 결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앞서 공번충이 그에게 언질을 주었을 때 고청운은 가족들에게 이 일을 가지고 함께 상의했었기에, 다들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시험 때 폐하께서 답안지를 열람하시니, 답안만 잘 작성해서 낸다면 반드시 가능할 것이다.”
방인소가 말하자, 고청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스승님, 고차 시험은 단 하루면 끝나는 시험입니다. 명색이 황제 폐하께서 답안을 열람하시어 결정하신다고는 하나, 결국은 한림원과 내각 사람들이 채점하고 폐하께서는 제일 우수한 답안만을 골라서 열람하게 되실 거예요.
또 제가 보니까 규칙상 호명(*糊名: 과거 응시자의 시험지에 쓴 성명을 풀칠하여 봉함) 방식으로 답안지를 작성한다고 해도, 예전에 향시나 회시를 치렀을 때처럼 서로의 글씨를 알아볼 수 없도록 별도로 사람을 두어 답안을 베껴 채점하는 등사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들 그대로 답안을 검토하다 보니, 내각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냈던 사람들이라면 글씨체를 보고 누가 쓴 답안인지 한눈에 알 수 있어 이 또한 결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큽니다.”
방인소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시 물었다.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어느 성이더냐?”
고청운 생각에는 다들 같은 진사 출신이니 예전에 비해 확실히 학업 수준이 확연하게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들 서로 비슷한 조건 하에 시험을 치를 테고, 답안지를 열람하는 사람과 누가 친분이 있느냐에 따라서 유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성에 배치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의 결정에 따라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향에서 좀 가까운 성이었으면 합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답안지를 다 훑어보실 것이다. 네 글솜씨는 조정에서도 어느 정도 명성이 있으니 누가 되었든 네 글씨라는 것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야. 폐하에 관해서는, 폐하께서 네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다면, 네가 어떤 답안을 작성했더라도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게다. 아무쪼록 마음 편히 시험을 보거라. 문제가 생길 리 없다.”
방인소가 수염을 들썩이더니 그를 한 번 응시했다.
그 말에 고청운은 난감했다. 그가 예전에 한림원에 있을 때만 해도 황제가 가끔 한림원에 출몰하긴 했지만, 지금은 호부로 옮겨온 데다 조정에 출입하는 대신도 아니었던 것이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 경성의 모든 관료들이 광장에서 세배를 드릴 때 외에는 심지어 황제의 모습을 볼 기회조차 전혀 없었다.
‘이미 이렇게 몇 년을 지내 왔는데, 스승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폐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 걸까? 혹시 얼마 전에 자신이 올린 상주문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