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93)화 (293/504)

293화. 서신 (1)

두꺼운 방명록을 받아 든 고청운이 표지를 보고는 아무렇게나 한쪽에 놓아두었을 뿐 바로 뒤적거릴 뜻이 없어 보이자, 사장정은 몹시 실망했다.

그 안의 내용이 얼마나 기이한 것들인지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언제나 담담하던 고청운의 얼굴에 수치스럽고 화난 표정이 나타나는 것이 보고 싶었다.

“참, 장정이, 경화소보 쪽에 정보 하나를 흘려 줄 수 있겠는가? 내가 외국 산학서를 번역하는 김에 새로운 화본을 구상 중이라고 말일세. 그래야 내가 바빠서 <백사전>을 쓸 겨를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곰곰이 생각해 본 고청운은 역시 여론을 돌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시들해질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될 것이네.”

그는 정말 이 화본 때문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고, 자신의 생활이 남에게 방해받는 것이 싫었다.

얼마 전의 축국 시합은 그의 인기를 좀 더 상승시켰는데, 오랫동안 그쳤던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향낭 비가 다시 정원 안쪽으로 분분히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가 대문 앞에 경고장을 써 붙여 놓아서야 그 비가 그쳤다. 

이도 조금은 이상한 것이, 고청운은 명성이 오르기를 바랐으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건 싫어했다. 그의 자조적인 말을 빌려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는 역시 다소 모순이 있었다.

“정말인가?” 

사장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네, 또 다른 구상을 한 겐가? 무슨 내용을 다룰 예정인가?”

사장정이 되물었다. 그는 비록 <백사전>을 즐겨 보았지만, 고청운의 다음 편을 왠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해상 모험에 관한 일인데, 음, 주로 개척 방면에 관한 일이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해외에서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개척에 나서고, 또 어떻게 해서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곳을 도시로 만들 수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이지.”

고청운은 몇 마디 설명을 곁들였다. 

이것은 확실히 그가 구상 중인 신간 내용으로, 농경과 도시 건설에 대한 책이 될 것이었다. 어떻게 그곳에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것인가, 어떻게 원주민과 접촉할 것인가와 더불어 신대륙의 환경에 대해서도 담아볼 예정인데, 특히 열대지방의 말라리아 등이 어떻게 나쁜지 등도 흥미 있는 요소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신대륙의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 등을 함께 녹여 낼 예정인데……. 천천히 자료를 찾아 현실에 부합하도록 이야기를 구성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은 그의 구상일 뿐이었고, 구체적인 내용은 그가 천천히 채워 나가야 했다. 그 외의 다른 부분도 고려해야 했는데, 출판하기에 지금 사정이 적합한지를 잘 살펴야 했다. 금지된 내용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장정은 자세히는 이해가지 않았으나 대략적으로 그 구상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는 ‘한 도시가 자기 손으로 천천히 건설되어 가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유혹이 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그는 더 많은 내용을 캐물으려 했지만 고청운이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사장정은 고청운이 새로 쓴 5만 자의 초고를 챙기고 곧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다.

고청운은 떠나려는 그를 만류하지 못하고 배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간 뒤 고청운은 방명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충 한 번 훑어보았는데, 그를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할 내용들이었다.

협박 아니면 저주들이 가득하였는데, 물론 칭찬과 찬사도 간간히 있었다. 

더욱 기발한 것은 그에게 돈을 빌리려 하거나 은연중에 사랑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사내도 여인도 있었는데, 그는 그런 글들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대답을 적어주는 것은 문제에 대해 물어보는 글들이었다.  특히 산학 문제에 관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답을 적어주었다.

고청운은 이들의 문제를 풀어주고 나서 방명록을 닫고, 고삼원에게 송죽서재에 반납하도록 시켰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이미 이렇게 방명록들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매우 숙달되어 있어 처리가 빨랐다. 방명록에 적혀 있는 좋지 않은 말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내버려 뒀기에, 그런 글들에 대해서는 마음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 * *

항주.

고청운이 미리 보내온 중추절 선물을 받은 방자명은 다른 것을 꺼내지 않고, 서신부터 꺼내어 읽었다.

하 씨 역시 선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 발간된 <백사전>을 맨 처음 꺼내 들었다. 그녀가 책을 꺼내 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항주 시내 책방에도 <백사전>을 팔고는 있으나, 콕 짚어 말하자면 경성 사람들이 새 책을 더 빨리 볼 수 있는 게 부러웠는데, 미아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예요. 제가 여기 사람들보다는 한발 빨리 새로운 내용을 볼 수 있어 다른 부인들이 부러워합니다.”

방자명은 그 말을 듣고는 준수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사장정은 말한 바대로 정말로 항주에 있는 서점과 합작에 성공을 이루어냈다. 고청운의 화본을 여기까지 와서 팔았으니 말이다. 

예상대로 예전의 몇 권의 화본은 이변 없이 항주에서도 매우 잘 팔리기는 했지만, <백사전>만큼은 잘 팔리지 않았다. 이 민간 설화는 본디 항주 지역의 민간 설화로, 이 화본에 대해 항주 지역 사람들은 매우 큰 열정을 보였다. 정과 사랑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즐겨 읽지 않는 사내들조차 이 화본에 대한 호기심에 젖어 있었다.

방자명의 경우, 이번 <백사전>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쓴 책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싫었던 것이었다. 

방자명은 고청운이 서신으로 차기 화본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정말 기대가 되었다. 다음 책이 사내의 관점에서 써진다면 정말 그도 좋아하는 책이 나올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조정과 경성에 있었던 새로운 일들에 대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월성 임양부 임계촌.

여름 햇살이 가득한 아래, 밭의 벼는 묵직하게 살이 올라 익어가고 있었고, 눈을 들어 논을 바라보면 온통 황금빛이었다. 미풍이 지나갈 때마다 잘 익어가는 벼의 물결이 굽이치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때 고대하는 마침 뒷짐을 진 채 논두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특히 자기 논에서 거의 다 익어가는 벼를 보고 있자니 한 줄기 농후한 자부심이 더욱더 샘솟았다.

이제 겨우 십여 년밖에 안 되었는데, 자신의 집은 임계촌 내에 100묘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이웃 두 마을에 총 150묘를 더 마련했다. 게다가 현에 마련한 상점과 저택까지. 고대하는 자신의 집안이 이 몇 년간 이룩한 수익을 돌아보며, 여기에 50묘의 토지를 더 장만하면 마침 전체 300묘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상가보다 논밭을 소유하는 것이 조금 더 믿음직하다고 느꼈다.

고대하는 나중에 벼슬을 관두고 나서 반드시 임계촌으로 내려와 살겠다고 한 아들의 말을 생각하면서 마을 쪽을 돌아보았다. 

푸른 수풀 속에 가려진 마을은 보일 듯 말 듯했다. 길게 둘러쳐진 흰 담장과 검은 기와와 함께 가지런히 지어진 집들이 아리따운 미관을 자아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마을에서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역시 마을 입구에 높이 세워진 진사 패방인 것 같았다. 그는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비석에 멈춰 서서 보고 또 보며, 며칠마다 한 번씩 물과 행주를 들고 가서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는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아이들은 과거에 응시하러 갈 때면 모두 비석 밑에서 절하고 향을 피우며 오래도록 비석 앞에 머물렀고, 그 앞을 지나다닐 때도 모두 발걸음을 늦춰 특별히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는 했다.

고대하는 비석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앞에 아들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이 비석을 보고, 또 저물어 가는 해와 둥지로 돌아와 졸고 있는 새를 보니, 고대하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른 품 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 손수건도 아들 며느리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들을 생각하면 그는 자기 집이 떠올랐다. 요즘 들어 임계촌 전체의 생활 형편은 좋아졌는데, 조정에서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마을에 엄연히 아들의 존재가 버티고 있으니, 관아의 관료들이 들이닥쳐서 세금을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없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도 임계촌 사람들을 쉽게 대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집세를 다른 지주들과 동일하게 매겼지만, 다른 소작인에게 농지를 빌려줘 부릴 수 있게 했다. 물레방아 수차가 설치되어 있어 물을 대는 일도 수월했기에, 그들이 논을 빌려준 사람들은 곡식을 더 많이 걷을 수가 있었다. 

재작년에 고향집에 돌아온 고대하는 아들이 마을에 물레방아 몇 대를 더 만들어 설치하라고 당부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더욱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또한 그들 족학의 학비는 비싸지 않아서, 가난해서 끼니를 거를 정도가 아니라면, 꾀죄죄한 아이들을 보내 글자를 익히게 했다. 그들이 더 자랐을 때 공부에 자질이 없는 자는 견공이나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러 갔고, 자질이 있는 아이들은 전문적으로 회계를 배우게 하였다. 여기서 더 타고난 자질이 확인되거나 집에 여유가 있어서 더 지원을 할 수 있으면 계속 공부를 해나갔다. 

만약 문중의 아이들이라면, 학문적 재능만 충분하면 문중에서 돈을 일부 부담했다. 심지어 그 집안의 경제적인 것까지 지원했기에, 문중의 친지들이 뭉칠수록 더욱 힘이 되었다. 

지금 여기, 집들을 돌아보던 고대하는 문득 자신의 집 정원이 너무 낡았다고 느껴졌다. 이것은 아들이 12살 수재 신분이었을 때 지은 집으로, 요 몇 년 동안 보수해 오며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다른 집 사람들도 보통은 한 집에 몇십 년씩 거주하고는 했지만, 어디 자신의 집이 다른 집과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가문이 다른 것을!

고대하는 역시 집이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손자는 올해 10살이고, 몇 년 지나면 수재 시험을 보기 위해 이 집으로 돌아와 지내야 했다. 

지금은 손자 둘, 손녀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나중에 아이들이 성혼하면 또다시 집안에 식구들이 더 많이 늘어날 것이었다. 동생네만 봐도 사람이 점차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다 같이 살 공간마저 부족해지지 않았는가. 

‘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한다? 동생네와 떨어져 한 사람당 각자 한 채씩 큰 집을 짓고 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급한 일은 아니야. 아들은 이제 30살이니 말이야. 그리고 집에 부모님도 계시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대하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올랐고, 왕 집사와 서둘러 수확 시기에 맞춰 사람을 채용하기로 한 일을 의논하기로 한 것까지 생각이 났다. 

* * *

고대하와 왕 집사, 두 사람이 막 상의를 마쳤을 때, 큰길 쪽에서 우마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우마차에는 하 이장의 집사가 타고 있었다. 

물론 이번 하 이장은 새로 부임한 이장이었다. 하씨 집에는 하겸죽이라는 거인이 있었는데, 신임 하 이장도 수재 신분이라 부업(父業)을 이어받은 셈이었다.

“춘부장 어른, 댁의 고 대인께서 또 서신을 보내오셨습니다.”

하 이장이 논두렁에 있는 고대하를 보자마자 바삐 소리쳤다.

고대하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기뻐하며, 급히 발걸음을 놀려 길가로 돌진해 올라와 다급히 물었다.

“어디 있는가?”

하 이장은 환하게 웃으며 우마차를 몰던 사내종에게 마차를 잘 세우게 하고, 뒤쪽 짐차 지붕에서 작지 않은 나무상자 하나를 끌어안으며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고 웃었다.

고대하가 더욱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번에는 편지뿐 아니라 다른 물건도 함께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 이장은 날이 저물었다는 핑계로 고대하의 초대를 완곡하게 거절한 뒤 고대하와 왕순만 우마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상자도 내려준 후 문도 못 열게 하고는 부리나케 떠났다.

사실 그도 들어가고 싶었다, 다른 것은 말하지 않고 그쪽 집안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급히 편지를 보고 싶어 하는 고대하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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