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사장정의 지지
다음 날은 휴무일이었고,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흩날리던 눈송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드디어 잦아들었고, 온 세상은 소복이 쌓인 눈들로 인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방인소는 끝없이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걸 보더니, 고아한 흥취에 이끌려 굳이 집에 있는 나귀를 타고 나가 유명한 고시에 나오는 고아한 그 글귀처럼 직접 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으러 나서겠다고 했다.
고청운은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우리 집 정원에 피어 있는 것은 매화가 아니란 말인가? 뭘 굳이 야외로 나가 야생 매화를 보겠다고 하시는 거지? 스승님은 자신이 이미 고령이라는 걸 전혀 개의치 않으시는구나.’
고청운은 하는 수 없이 불안한 마음에 스승님과 동행하기로 하였다. 스승님이 홀로 밖에 나섰다가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로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승님이 자신의 동행을 허하지 않을 거라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방인소는 하인 두 명을 함께 데려가면 될 일이라며, 고청운이 따라가지 않는 게 더 낫다고 했다.
“넌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에는 숫자만 가득 차 있지 않으냐. 고아한 운치를 즐길 줄을 모르니……. 야생 매화가 집에서 키우는 매화와 어찌 같을 수 있다는 게냐? 험한 밖에서 독자적으로 자생한 매화만이 가진 그런 오기라는 것이 있단다. 노부는 벗과 약속이 있어, 오늘은 경성 밖 교외로 나가 좀 보고 올 것이니라. 안심하거라, 멀리 가지는 않을 거라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방인소가 그를 위로했다.
고청운은 무표정하게 그를 보았다.
‘스승님은 호부에서 십몇 년을 근무하시다가 이제 막 예부로 넘어오시지 않았던가. 이제 막 호부를 벗어나셔서 이마에 아직도 동전 쇠 냄새가 가시지도 않으신 분이, 어째 이리도 입장 전환이 빠르신 건지 모르겠구나. 어찌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하신지……. 그리고 말씀하신 벗도 분명 하 대인일 게 분명해.’
결국 방인소의 고집을 꺾지 못한 고청운과 가족들은 그가 두 명의 하인을 대동하고 나귀에 올라 작은 화로와 목탄, 먹, 종이, 벼루 등을 챙겨서 떠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은 문득 자신이 고대에 온 지 참 오래되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소위 말하는 ‘고아한 정취’라는 것이 생기지 않다니.’
그에게 이렇게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자박자박 눈을 밟고 매화를 찾아다니며 설경을 감상한다는 것은, ‘어디 밥 배불리 먹고 할 짓이 없어 그런 행동을 하는지?’ 정도에 해당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책을 몇 장이라도 더 읽고 화본을 몇 자라도 더 쓰면서 부인과 몇 마디라도 더 나누는 것이 좋았다.
오늘 마침 사장정과 만나기로 약조했던 날인 것이 생각이 난 고청운은 고삼원과 함께 말을 타고 송죽서재로 달려갔다.
* * *
큰길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춘절을 앞둔 명절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장정은 이미 2층 방에 도착하여 차를 끓이고 술을 마시며, 반찬 몇 가지를 더 내오게 시키고 있었다. 고청운은 방 안이 훈훈한 것이, 오면서 느낀 한기가 싹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고삼원의 경우는 지금 건너편에 있는 사 사장님과 함께 장부를 계산하고 있었다. 화본과 산술 서적의 수입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원래 고청운은 계산하지 않고 바로 건네주는 수익금만 받고 싶었다. 그는 사장정의 사람됨을 잘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장정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형제라도 계산은 제대로 해야 한다며, 반드시 사람을 시켜 계산을 확실히 확인하게 하고는 했다.
그리하여 고청운은 이 일을 고삼원에게 일임했다.
지금 그가 쓰고 있는 <백사전>은 이미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섬세한 감정 묘사와 인간과 요괴의 금지된 사랑, 그리고 정체를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여자 주인공과의 갈등이 전개되기 시작하며 독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방금 그가 서점에 들어섰을 때도 누군가가 이 책을 사러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 안에서 사장정은 술을 마셨고, 고청운은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각자 선택한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며 음미했고, 서로에게 권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 부인께서 오늘 사찰로 매화를 감상하러 가셨다네. 한 무더기의 다른 집 부인들과 약속을 해서 말일세. 정말 재미없지 않은가, 매화가 뭐 볼 것이 있다는 말인가?”
사장정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매화보다 차라리 자기를 보는 게 낫지 않느냐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고청운은 “그래.” 하고 대답해 주고는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사장정은 자신의 푸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할 뿐이라, 고청운은 그의 말에 대꾸해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 머리 탐화에 대해서 뭐 들은 것 없는가?”
그가 푸념을 다 쏟아내기를 기다려 고청운이 물었다.
사장정은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은 것이 없네. 사건이 아직 수사 중에 있지 않은가.”
그도 이 사건의 소식 정도는 들어 알고 있었다. 주로 소보에서 대서특필해서 매우 소란스레 떠들어 대고 있기도 하였고, 큰 머리 탐화라는 자가 고청운의 벗이었기에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장정은 관직 사회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으나, 부마로서 그런 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물어나 본 것이었고, 크게 기대를 걸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아 참, 자네의 두 번째 산술 서적도 역시나 잘 팔린다네. 많은 수재들과 거인들이 와서 사기도 했고, 몇몇은 다른 지방, 다른 성에서 온 사람들도 사 갔다네. 동생 신분인 자들까지도 와서 사 가기도 했지. 그들 생각에 과거 시험 준비에 자네 책이 도움이 되니 그랬겠지. 그 다음 책에는 어떤 내용을 실을 예정이냐는 질문을 하는 자도 있었다네.”
사장정이 그간의 상황을 전해 주며 질문을 했는데, 그 자신도 궁금하기는 하였다.
“다른 성의 서점들과 합작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 자네의 책이 더 많은 지역에서 팔려나가게 될 것이야.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될 테니, 자네한테 좋은 점이 있을 걸세.”
사장정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꽤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기는 하겠지.”
고청운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나는 요즘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있는데, 그들의 나라에 <기하학(几何)>이라는 서적이 있어서 이 책을 번역해 볼 생각이네. 그러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류의 숫자를 사용해 보자고 제창해 볼 계획일세.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네.”
고청운은 조금 불안했다. 사실 또 다른 타임슬립자인 전 왕조의 황제는 아라비아 숫자를 이미 ‘발명’해낸 상태였다. 하지만, 도대체 자신의 발명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공표하지 못해서인지, 시간만 점점 지체되었다. 고청운은 이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것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내가 번역하게 될 책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그리고 저번에 또 다른 신부님과 이야기했을 땐, 영국에서는 지금 미적분학에 대한 서적이 출판되고 있다고 했지 아마? 미적분학은 정말 중요하니, 반드시 이 책을 입수해야만 해. 다만 나도 관련된 내용을 거의 잊어버린 것이 아쉽구나. 만약 그 내용을 잊지만 않았어도 남에게 부탁해서 얻을 것이 아니라 직접 책을 썼어도 될 것이었는데 말이야.’
지금 고청운은 그저 영국의 책을 입수해서 내용을 보면 관련된 기억이 다시 생각나기를 혹은 추리라도 가능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번역이라고?”
사장정은 상당히 실망했다.
‘외서에 어디 보기 좋은 것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본국에 있는 무수한 책들도 아직 다 읽히지 못하고 있는데, 어디 외국인의 책까지 보려는 사람들이 있냔 말이다.’
고청운은 조금 더 설명을 곁들였다.
“외국인들의 책 중에는 일부 아주 괜찮은 것들이 있다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새로운 발견을 해냈지. 동서양의 교류가 이뤄진다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네.”
아마 17세기는 서양의 각양각색의 이론 및 과학의 발전 쪽으로 모두 비교적 빠르게 성장했을 단계일 것인데, 고청운은 이전에 배웠던 역사의 대다수를 거의 잊은 것이 아쉬웠다.
만약 자신이 시공간을 넘어오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대학 때까지의 모든 교과서를 통째로 다 외워버렸을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많은 일을 돌고 돌아서 해결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애석하게도 그는 아직 자신이 행하게 될 일이 미래에 확실한 비전을 이룩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에 대한 기억만 일깨우게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한 번 해보게나. 나는 여기서 언제든지 자네를 위해 간행물을 제작하고 출판을 진행해 줄 터이니.”
그런 면에서 사장정은 고청운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이 절친한 벗인 만큼, 사장정은 당연히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지원을 해 줄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고청운은 감격스러워 웃었고, 이내 두 사람은 각각 차가 든 잔과 술이 든 잔을 부딪쳐 건배하였다.
고청운은 사장정의 지지에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자신의 화본과 산술 서적이 이렇게까지 잘 팔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출판에 관련하여 시름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믿을 만한 서점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 아픈 일인데, 심지어 이익상의 갈등까지 야기되었다고 한다면……. 사장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어찌 되었든 지금처럼 큰 시름없이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고청운의 집안은 문중에 자신들이 운영하는 인쇄 공방이 있는 공가(孔家)나 담가(谭家)와는 달랐다. 그들은 남들에게 부탁할 필요 없이 무슨 일이든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이쪽 일로는 모두 잘 안배되어 있었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자신에게 일종의 측은지심이 든 고청운은 앞으로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좋은 인연을 맺어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설령 배은망덕한 자를 만날 가능성이 있을지언정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가능성이 더 큰 것은 스스로에게 심리적인 유쾌함을 선사하는 것이고, 또 어떨 때는 그에 대한 보답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도 일종의 공리심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이건 내가 옆집에 있는 장원루에 가서 사오게 한 장향 땅콩(*酱香花生米: 간장 소스에 절인 땅콩)과 장향 우육(*酱香牛肉 : 간장 소스에 절인 소고기)인데, 장원루의 주방장이 바뀐 뒤 반찬들이 정말이지 너무 맛있어졌네.”
사장정은 고청운에게 어서 음식을 먹어보라며 손짓했다.
“장원루 말인가? 내가 지난달에 다녀왔을 때는 주방장이 내온 반찬이 예전 그대로였는데, 벌써 주방장이 바뀐 줄은 몰랐네.”
고청운이 소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 보니, 음, 확실히 맛이 좋았다. 특유의 짭짤한 향이 남달랐는데, 보아하니 장원루가 또 만원이 될 것 같았다.
그는 집에서 며칠 동안 신선한 소고기를 구하지 못하고, 늙은 소고기밖에 구할 수 없던 차에, 이렇게 쫄깃쫄깃하고 여린 소고기를 음미해 보게 되니 그 맛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는 변강 쪽에 호시(*互市: 변경 지역 또는 항구에서 외국 또는 다른 민족과 교역하는 것)를 개방하게 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호시 개방 전에는 시장에 소고기가 나오면 곧바로 팔려나가 금방 동이 나고는 하여, 그저 운이 좋아야만 구매해서 먹을 수 있었다.
“자네들 문인들이나 그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만 아니었다면 나도 정말 그곳에 가고 싶지는 않다네.”
사장정은 문벌귀족의 반열에 속해 있었기에, 당연히 대다수의 고객이 문인으로 이뤄진 장원루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