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기억을 따라
사람들은 식사를 마치고, 날이 어두운 것이 눈이라도 내릴까 봐 술을 마실 생각은 못하고 다들 황급히 제각기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이상하게도 담자례는 이번에 자리에 남아 그와 동시에 함께 길을 나섰는데, 비록 그들 집의 방향이 대체로 한 방향이라고는 해도 일반적으로 모임이 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 출발하여 동행하는 것은 서로가 피해왔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말의 속도를 높이려 했지만, 그쪽에서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 먼저 자리를 박차기가 좀 그랬다.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고청운은 이 난국을 타개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돌려 담자례를 바라봤는데, 그는 흰색 모피를 걸치고 말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한층 더 수려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 입술 위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는 탓에 그의 모습은 실제보다 몇 살이나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이 나이의 사람들은 수염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고청운만은 아마 평생 수염을 기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수염이 자라면 계속해서 깎아대고 있었다.
“고 형,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청운이 기다림에 귀찮아 작별을 고하고 막 떠나려 할 때, 담자례가 드디어 입을 열어 약간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어떻게 학생들에게 산술을 가르치셨습니까? 밑에 앉은 녀석들은 장난도 심하고, 가르쳐도 아둔하기만 합니다.”
일순 멍해 있던 고청운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고는 바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이들이 어떻게 아둔해 보일 수 있는가? 다들 똑똑하고 귀엽던데.”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을 비호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자 담자례는 헛기침을 하더니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재빨리 그를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이나 다시 가르쳐 줘도 왜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청운은 문득 소석이 서당에서 돌아와서 이야기했던 일이 생각났다. 담자례는 소석의 산술 수업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는데, 열심히는 하나 <구장산술> 교재를 사용하여 융통성 없이 틀에 박힌 대로 가르치느라 본질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사람이 엄숙하여 그 말썽꾸러기 녀석들은 자연스레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마 그렇게 하나둘씩 갈등이 쌓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더 좋은 말을 해줬을 수도 있지만, 고청운은 지금 당장 방희림의 사건으로 인해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두말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의 경험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알려 주며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자례, 나는 <구장산술>보다는 내가 쓴 <산학초해>가 아이들 공부를 시키기에 더 좋은 것 같네.”
담자례는 듣자마자 삽시간에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예.” 하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얼어붙어서 붉어진 걸까?’
그때, 마침내 눈송이가 펑펑 내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눈은 내리기 시작했고 날씨도 추워지기 시작했으니, 고청운과 담자례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바로 이 자리에서 각자 헤어지기로 하였다.
사실 아까 담자례가 몸을 낮추고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자, 고청운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아마도 진심으로 그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싶었던 듯했다.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이놈이 그래도 장점이 있는 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눈이 오는데 어찌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셨어요?”
간미는 고청운이 걸치고 온 삿갓에 한층 쌓여 있는 눈을 보고는 불평하듯 말했다.
“밖이 이렇게 추운데 당신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어째 이렇게 하루 종일 나갈 궁리들인지. 밖이 얼마나 추운지는 보이지도 않는가 봐요. 만약 찬바람이 들어서 탕약이라도 먹어야 하면, 당신은 탕약을 먹으라면 말이라도 잘 듣지, 녀석들은 약 먹자는 말도 안 들을 거예요.”
고청운은 속으로 ‘헉’ 했다.
‘내가 탕약을 먹는 것이 어떻게 ‘말을 잘 들어서’ 먹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는 삿갓을 춘분에게 건네주며, 간미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미아, 당신도 좀 나가보고 싶지 않소?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고 나서는 오랫동안 당신과 나가보지를 못했군. 아니면 내일 내가 근무가 없는 날이니, 우리 사찰이라도 찾아서 좀 나갔다 오는 것은 어떻소?”
사장정과의 약속이 있지만, 바꾸면 될 일이었다.
간미는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동하기는 하여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침 사찰에 매화가 보기 좋게 피어 있다고 해서, 가 보고 싶기는 했어요……. 하지만, 됐어요. 너무 추우니 가지 않을래요.”
고청운은 빙긋 웃으며 좌우로 주변을 살폈고, 아들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물었다.
“아이들이 옆집에 있는 것이 맞지요? 저녁은 먹었다고 하오?”
“네, 삼원이가 먼저 와서 당신이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온다고 전해 줬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할머니 댁에 가서 먹고 왔지요. 량가아가 오늘 방학해서 집에 돌아오니, 할아버지께서 마음이 급하셨는지 벌써 아이를 데리고 그간의 학업 성취를 시험하신다고 질문을 하고 계세요. 소어와 소아는 량가아를 보러 가 있지요. 애들이 저렇게 붙어 다니며 집에서 너무 소란을 피워 대는 통에 늘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오늘은 오후 내내 집안이 적막해서 어색했어요.”
간미의 희고 어여쁜 얼굴에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 * *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후원으로 걸어갔다. 고청운이 날짜를 계산해 보니 춘절(*중국의 설)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때는 확실히 서원의 방학 기간이기도 했기에 소석은 원소절(*元宵节: 중화권에서 음력 정월대보름을 부르는 말, 음력 정월 15일)까지는 집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가 황립 서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 년을 통틀어 단 두 달만 집에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미와 고청운은 아침저녁으로 늘 함께 다니며 친밀하게 지냈는데, 아이들과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말이 많아지고는 했던 그가 지금처럼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간미가 바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신지요? 바깥일인가요?”
고청운은 미약하게 한숨을 쉬고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일이 좀 생기기는 했지요.”
그는 방희림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건 좋지 않은데요.”
‘강매양전(*强买良田: 양민의 전답을 강제로 매매함) 사건’의 전말을 들은 간미는 이 일이 잘 풀리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춘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 으레 관아의 관료들은 상소를 올리거나 공문서 작성 등의 일을 잠시 멈추고, 모두 춘절을 잘 보내기 위해 여념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와중에 이런 사건이 터져버렸으니,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언짢으실까요.”
이는 결국 방희림의 잘못이었기에 부자 두 사람 다 억울하고 말고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방희림은 가족의 사고에 연루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그 상대가 방희림의 아버지인 이상 효도라는 측면에서 구애를 받았기에 아버지에게 더욱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고발한 어사가 시간적으로 너무 절묘한 대목에 이 사건을 터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결정적인 중요한 시기에 급소를 내지르듯 판을 벌였으니 말이다.
부부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그래도 별다른 뾰족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 * *
날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 셋이 한 번에 돌아오자 집안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저녁이 되어 고청운은 촛불을 켜고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서신은 방희림에게 썼는데, 그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고청운이 보기에는 이번 사건이 관직을 박탈당할 만큼의 심한 사건까지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좌천 정도겠으나, 피해자에게 배상은 해야 했다.
그들이 생각해 본 배상 방법 중 제일 적절한 한 가지는, 아버님에 대한 속죄로써 아주 좋은 농토를 찾아 피해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고생을 마다치 않는다면, 방희림은 쉽게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길 수가 있을 것이었다. 이 공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이 사건에 대한 속죄가 될 터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비교적 좋을 것 같았다.
고청운은 다만 어떻게 하더라도 이번 일로 인해 방희림의 벼슬길에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한층 드리워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 일의 여파로 인해 그의 승진은 더뎌지게 될 것이었다. 고청운은 그저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서서히 잊게 되어 사건의 영향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고청운은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이렇게 단번에 벼슬길이 막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듯 때로는 영문도 모른 채 곤두박질칠 수도 있던 것이었다.
앞서 방희림이 승진했을 때만 해도 그의 관직 동기들 모두가 그에게 서신을 보내 축하해 주었는데, 이제 그는 아마도 세태염량(*世态炎凉: 세력 있고 돈 있을 때에는 아첨하여 빌붙다가 세력과 돈이 없어지면 냉담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겪게 될 터였다. 고청운은 그가 이 사태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청운은 자기 자신 역시 앞으로 더욱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을 잘 감시하여 비슷한 과오를 겪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 했다.
그는 서가에서 <송사(宋史)>라는 책 한 권을 꺼내 뒤적였다. 이 책의 사례 하나가 방희림의 경우와 매우 비슷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은 결국 재상이 되었다. 아마 이 고사를 들으면 방희림은 힘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내 기억이 맞았구나.’
고청운은 기억을 따라 책을 몇 곳을 뒤적여보다가 마침내 이 사례를 찾아내 두말없이 이 사실을 간략하게 서신에 옮겨 적었다.
서신을 다 쓴 후, 고청운은 이어서 임계촌의 친우들에게 보낼 서신도 작성했다. 그는 하겸죽에게 보낼 서신을 쓰면서, 저번에 서신을 주고받을 때 하겸죽이 서신으로 말해 주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내용인즉슨, 조문헌이 작년 시험에서 드디어 거인으로 합격해 도화진에서 합격 잔치를 크게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로 조문헌은 특별히 하겸죽의 집까지 친히 방문하여 술자리에 초대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아이도 낳는 것을 보니, 상대방은 아직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조문헌은 고청운의 소년 시절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지만, 고청운은 이렇듯 얼핏 그의 소식을 듣게 되자 마치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뒤이어 고청운은 하겸죽이 언급한 추측들이 생각나 눈살을 찌푸렸다.
하겸죽의 추측에 의하면, 조문헌은 자신과 다시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직감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문헌은 여전히 예민하고 오만한 사람인 데다가 당시의 두 사람은 이미 거의 절교한 것과 다름없었다. 일이 파국으로 치달은 상태로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고청운은 자신의 심경이 이미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고청운의 생활에서 조문헌이란 인물의 부재는 이미 익숙해진 일상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