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79)화 (279/504)

279화. 일상 (2)

그러던 어느 날, 고청운은 이번에 소석이 모처럼 집에 돌아오면 잠시 그 아이를 학업으로부터 해방해 주기로 하였다. 소어는 집에 있을 때 워낙 힘이 넘쳐 매일 공부를 마치고 앞마당에 있는 놀이터에 놀러 갔는데, 다른 집 아이들이 고택에 놀러 올 시간은 없어도 혜향이의 아들이 소어와 같은 나이였기에 그와 함께 놀면 되었다. 

고청운은 매일 오후 서재에서 아이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하자, 소어와 함께 영어를 배우기로 하였다. 

소어도 이것을 원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찌 되었건, 소어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제일 기뻐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고청운의 유일한 슬픔은, 막내아들이 그보다 더 배움이 빨라 톰 신부의 칭찬을 독차지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들은 잊기도 빨리 잊었다.

현재 고청운의 일과를 현대식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조깅을 마치고 권법을 30분간 연마한 뒤 체조를 좀 더 하고, 다시 30분간 영어 리딩 시간을 가졌다. 이후 아침 식사를 마치고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문을 나서, 7시 전에는 반드시 호부에 도착해 근퇴 관리 기록을 남겼다. 

점심때는 집에서 보내 주는 식사를 기다려 해결하고 이후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오후 3시까지 오후 근무를 계속했다. 추분이 지나면, 보통 오후 3시에는 퇴근하여 귀가할 수 있었다.

연회나 모임이 없으면 고청운은 보통 오후 4시에 집에 도착했다. 신부님과 약속이 있는 날은 성당에 먼저 들러서, 1시간 동안 영어를 공부했다. 그 후 그는 저녁 7시가 되어야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가족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친 후라 저녁 식사를 혼자 해결해야 했다. 

저녁 식사까지 다 마치면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그다음 그는 바로 매일 마쳐야 하는 화본 집필 작업에 돌입했는데, 한 달에 5만 자를 투고해야 했기에 매일 1,500자를 쓰고, 휴무일에는 좀 더 많이 써 두었다. 이것은 그가 집필 작업과 동시에 서예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 모든 작업은 보통 1시간 내로 끝이 났다. 

그는 글을 쓰는 속도가 매우 빨랐는데, 특히 세필 붓을 사용해서 작업 속도를 증가시켰다. 

오후 9시가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재충전할 시간을 주었다. 이 시간에 그는 보통 영어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읽거나 일기를 작성했다. 그는 요즘은 황실 장서루에서 빌려온 운남과 호부에 관한 자료들을 보고 있었다.

오후 10시, 그는 팔굽혀펴기를 한 후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은 몸과 마음에 모두 유익한 활동들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너무 늦게 잠들면 안 되었다. 

매일 밤 자기 직전에야, 그는 조용히 낮에 만났던 사람과 일을 회상하며, 자신이 오늘 행한 행위와 일들에 대해 상기해 보았고 뭔가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휴일 혹은 휴무일마다 고청운은 더욱 많은 시간을 가족들에게 할애했고, 가족들을 데리고 외출을 하기도 하였다. 밖은 활을 쏘고 축국을 하는 등 즐길 수 있는 게 풍족한 편이었기에, 처와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 놀기 좋았다.

사람이 너무 바르게만 살 수는 없으니, 쉬는 날에는 이렇게 몸과 마음을 쉬게 해야 했다.

방자명 등 지인들은 그가 매우 여유롭게 사는 데다 언제나 당황하지 않는 면모를 보고는, 그는 마음속에 꼭 무슨 일이든 다 만발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가 바로 이 여유를 위해 매일같이 계획에 따라 일과를 행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조리 있게 생활하는 것은 매우 재미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런 생활 리듬은 냉정한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계획적인 일과 생활에 익숙해진 것인지 고청운은 이런 삶의 방식도 자신에게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 *

 10월 말 호부는 조정의 관아에 들어가기 전에 내년 예산을 짜는 작업을 마쳐야 했다. 이때의 경성부두에는 시도 때도 없이 관선들이 하나둘 도착해, 병사들은 마차를 호위하며 이들을 호부로 호송해 주어야 했다.

이는 각 성의 관원들이 매년 호부에 도착하여 결산하는 시기의 모습이었다. 

예산이란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 연도에 국가가 써야 할 돈이었다. 전에 있던 세상에서 정부의 말단 부서에서 근무했던 고청운은 정부가 매년 결산과 예산을 집행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그는 하 왕조에도 이러한 제도가 있는지 몰랐는데, 이러한 제도적인 측면에서 하 왕조가 매우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고청운이 자료를 찾아보니 확실히 당나라 초기부터 구체적인 예산 제도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처음 재정 예산은 일 년에 한 번 장부를 작성하고 호적은 3년에 한 번 작성하여, 현에서 부 그리고 부에서 성까지, 마지막으로는 호부에 이르기까지, 예산 장부를 아래에서 위로 결집해서 올려 보냈다. 호부에 이 수치들이 도달해 와야 최종 예산이 산정되었다. 

당나라 중기에 이르러서는 예산의 책정이 너무 높다고 하여 안정성이 있는 세목을 책자로 엮어 해마다 세목을 변경할 필요가 없게 정비했고, 기타 불안정한 세목은 별도로 편성하였다.

이렇게 되면 세금을 내는 사람이 매년 얼마를 내야 하는지 서로 정확히 알 수 있어 국가 예산 통계 역시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고, 예산 편성에 들어가는 비용도 절감할 수 있었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수입에 맞게 지출하는 것과 예정된 예산에 맞는 지출을 하는 것,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호부에서는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두 가지 원칙 중 하나를 선택하여 운용해야 했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물론 매년 조세수입의 균형이 잘 잡혀서 여유 세수가 확보 되는 것이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운남사의 주사였던 고청운은 최근에 운남 현지 쪽의 관리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에게 장부를 올리는 일을 서두르도록 독촉했다. 이 장부들은 운남성 쪽에서 관리를 파견해 경성으로 직접 올려 보내야 했다. 

고청운과 매 주사는 이 장부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계산하면서 무슨 잘못이 있는지 운용 설계는 적법한지 살펴보았다. 

매년 회계 장부 작성에 실수를 하는 관원들은 계속해서 나타났지만, 자칫 잘못하면 좌천되고 심지어는 목이 떨어질 일이기에 사람들은 모두 다 조심스럽게 한 번, 또 한 번, 두 사람으로 나누어 각자 다른 서리와 번갈아 가며 몇 번이고 다시 따져보았다. 

아마도 고청운이 보여준 능력 덕인지, 아니면 호부에 그런 규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지금의 고청운의 임무는 원래 맡았던 업무 외에도 추가되어 있었다. 그는 본사의 연락 및 공문의 전달 직무뿐 아니라 매 주사로부터 일부 예산과 관련된 업무를 인계 받았는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전임 주사가 담당하던 업무가 매 주사에게 넘어갔다가 또다시 그의 수중으로 돌아온 것일 뿐이기는 하였다.

매 주사는 호부에서만 10년간 업무를 해온 베테랑이었다. 고청운은 그를 존중했고, 많은 일을 그에게 물어보곤 하였다. 그리고 방인소 역시 그의 뒤에 든든하게 서 있었다. 

스승님은 호부의 주사로 있지는 않았고 당시 낭중으로 일했었는데, 어느 사의 업무들을 총괄해야 하는지, 업무 범위는 어떠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청운을 아주 어렵게 하는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업무상의 필요로 인해 고청운은 운남에서 온 관리들과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그들이 장부로 작성해 온 내용들 중 예산으로 사용하려는 항목들에 대해, 그는 각종 수단을 통해서 이 내용들이 타당한지 확실히 조사해야 했다. 비용이 과하게 많이 드는 항목이 발견되면 운남사 완 낭중에게 보고해서 예산 신청을 기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위치가 중요해서인지, 고청운은 다른 누군가에게 뇌물을 받을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 * *

“제가 그린 그림을 은자 100냥을 주고 사겠다고요?”

고청운이 눈살을 찌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경성 부귀방(富贵坊) 일대의 어느 골동품 상점의 주인이었는데, 별로 유명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고청운도 본래는 만나기 싫었지만, 뜻밖에도 고삼원을 통해 그가 100냥의 은자를 주고 고청운의 그림을 사겠다는 의견을 전해 오자 호기심으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내가 그린 그림의 수준이 벌써 이런 평판을 받게 되었다는 말인가?’ 

평소에는 그림 연습할 기회가 적었던 고청운은 일반적으로 휴무일과 명절이나 되어야 겨우 그림을 그릴 시간이 생겼었다. 이전의 회화 작품도 단지 아이들과 가족을 보고 인물상을 그리거나, 혹은 화분의 난을 보고 간단한 화조를 그린 것일 뿐이라 그는 자신의 수준이 어떠한지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어, 감히 밖에서 자신이 그린 추한 작품을 내보이지도 못했다.

그의 수준에 비하면 하겸죽은 정말 그림 실력이 대단했다. 그는 몇 차례의 과거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번민에 너무 심하게 휩싸인 나머지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려댔는데, 특히 화조도만을 집중적으로 그리고는 하였다. 집 정원에서 새를 많이 키우기도 했고, 다른 지방에 다니며 그림의 대가를 찾아 가르침을 받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일전의 서신을 통해 그는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한 폭을 전해 주었는데, 수준이 또 굉장히 발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은자 몇 냥에도 안 팔린다는 것이라는 것과 3~5냥 정도면 정말 많이 받은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자기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은자 100냥이라니, 고청운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네, 대인. 소인이 대인을 사모한 지 이미 오래이니, 대인께서 소인이 소원 성취할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골동품 상점 주인의 표정은 매우 정중했고 또 아주 한결같아서, 조금도 건성의 뜻이 비치지가 않았다. 

“제 그림은 그리 가치가 있는 그림이 못 됩니다.”

고청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제 마음에 이미 들어온 것인데 소인이 어찌 감히 그 값을 따지겠습니까?”

골동품 가게 주인은 아주 뚝심이 있었다. 

고청운은 그런 그를 살펴보았다.

은자 100냥은 아주 큰돈이었다. 그가 나라에서 받는 녹봉은 1년에 고작 은자 49냥 밖에 안 되었고, 연말이 되어 받는 가봉은 겨우 은자 120냥이었다. 이런 큰돈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던 고청운은 이 골동품 상점의 주인이 누가 자신의 그림을 ‘사모’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화본 작가인 셈이었고, 몇 년 전에는 광적이라고 할 만한 독자들도 만났었다. 이들을 마주치게 되면서 그는 진정한 ‘사모’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 뚱뚱한 사장의 표정은 공손했지만, 또 다른 것도 눈에 보였다. 그는 지금 입에서 ‘사모’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날 눈이 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그가 자신이 집필한 화본의 초고를 사는데 큰돈을 쓰러 온 것이라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 일전에도 그의 초고에 이 정도 가격을 불렀던 지방 지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고청운이 모른 척 상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로 수상쩍은 일이구나.’ 

고청운은 그를 만난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판단에 손을 흔들며 의미가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천만에. 저는 제 그림의 가치를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제 그림은 그만한 가치가 없으니, 팔지 않겠습니다.”

“그럼 대인의 다른 그림이라도 소장하게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골동품 상점 주인은 고청운의 태도가 단호한 것을 보고 안색을 바꾸며 조급해했다.

“대인, 소인의 요청을, 소인의 오랜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십시오.”

고청운은 속으로는 은근히 얼굴을 찡그리며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말했다.

“아니오.”

말을 마친 고청운이 찻잔을 들고 말했다.

“차 좀 드시지요.”

골동품 상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들고는 입술을 찻물에 적셨다. 

고삼원이 바로 그의 옆에서 소리쳤다. 

“손님께서 나가신다, 배웅해드려라!”

고청운은 상대방의 신분에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굳이 그가 나가서 직접 배웅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인, 그럼 멀리 나오지 마십시오.”

골동품 상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절을 한 후 만족스럽지 못해도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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