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76)화 (276/504)

276화. 백사전(白蛇传) (2)

고청운이 빛이 어두워졌다고 느꼈을 땐 날이 이미 저물어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배나 많은 글을 쓰셨습니다.”

고삼원은 흥분해서 원고의 장수를 세어 보았다.

고청운도 이렇게까지 글을 많이 쓴 것이 의외였지만, 방금 자신의 상태를 떠올리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여종이 식사를 하시라고 찾아오자, 고청운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에 도착한 고청운은 소어와 소아까지 밥을 들지 않고 순순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스승님, 할머님, 왜 아직 식사를 안 드시고 계셨습니까? 먼저 드시고 계시지 그러셨어요.”

방인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배가 고프진 않았단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야.”

이 말을 마친 그는 고청운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혹 산술 서적에 수정을 할 곳이 있었던 게냐? 원고 작성은 다 마친 것이야?”

“스승님, 제가 지난번에 보여드린 것이 최종 원고입니다. 오늘 송죽서재에 보냈으니, 곧 등사(*謄寫: 원본에서 베껴 옮김) 작업에 돌입할 거예요. 제가 방금 쓰고 온 것은 화본인데…….”

고청운은 목소리가 작아졌다.

“화본을 쓴다고?”

방인소가 눈썹을 찡그렸다.

고청운은 자신의 필명을 바꾸는 일을 들먹이며 ‘산곡거사(山谷居士)’라는 이름을 마음대로 생각해 냈다. 이는 그가 쓰던 필명과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도 좋지.”

방인소는 반대하지 않았고, 이 일은 이렇게 지나가게 되었다. 

* * *

한 달 후, 고청운의 <산학재해(算学再解)>는 사전 홍보를 거쳐 몇몇 수학계 학자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단숨에 200권이 팔려나갔다. 향시와 회시 과거 시험에 나왔던 산술 문제도 몇 가지 방법으로 상세하게 풀어놓아 입시 혹은 진사 시험에 뜻을 둔 수재, 거인들의 수요를 끌어들였더니, 이후 끊임없이 사람들이 이 책을 찾아 몰려들었다.

이번 결과에 대해 고청운과 사장정은 매우 만족해했다. 그가 인쇄한 2,000권이 모두 팔린다면 원금 회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일정한 범위 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아주 천천히 계속해서 이끌어 내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평판을 내놓았는데 대부분은 좋은 평판들이 더 많았다. 

고청운은 이런 현상이 더욱 기뻤다. 원금을 손해 보지 않은 것보다는 대중들의 평판을 더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이 저서는 그가 적어도 3년의 시간을 들여 집필한 것으로, 그간 그는 모든 여가 시간을 이 책에 쏟아부었었다. 비록 아직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이것은 이미 그의 최대치의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이었다. 

그가 쓴 책을 통해 무언가 깨우치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 * *

고청운은 어느 날 산술 관련 모임에 참석했다가 통금 직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부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촛불 아래서 고청운이 운동을 하다 잠깐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머리를 빗고 있던 간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청운은 팔굽혀펴기 몇 개를 한 다음에야 대답했다.

“오늘 같은 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동기가 휴가를 내어 고향에 간다고 하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소. 벌써 3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군 그래. 비록 지난번에 삼원이 부모님을 배웅해 드리고 돌아와 여전히 건강하시다고 말해 주었지만,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안심이 되지가 않소.”

다시 3년을 경성에 더 머무르게 된 그는 앞서 2년간 부모님이 경성에 올라와서 그와 함께 지냈던지라 휴가를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휴가를 갈 수 없었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휴가를 신청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간미도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동작을 멈추고,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았다. 이어서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네요, 저도 그들을 보고 싶어요. 저의 어머니와 동생, 아버지도 그립군요. 지난번 어머니께서 직접 서신을 보내셨는데, 동생이 학업의 열의가 아직 부족해서 이삼 년은 더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지금은 동생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아유는 이제 겨우 12살이니 2, 3년을 더 기다려 시험에 합격해도 늦지 않소.”

고청운은 열대여섯은 되어 시험을 보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학식을 더 탄탄하게 다져 단박에 원시 시험에 합격하고 수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향의 두 사촌 동생들은 원시 기회를 두 번이나 잡지 못해 아직도 동생 신분에 머물러 있었고, 올 8월 원시 시험을 다시 앞두고 있었다.

당초 그는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속이 타들어 가고 실망을 금치 못해 한 무더기의 참고 서적들을 경성에서 수집하여 고향으로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이 올해 각각 22살, 21살임을 생각하니, 고청운은 경성으로 날아가 수업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사실 그들의 학식은 충분했고 그저 운이 좀 모자랐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시험장에서 실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타격을 너무 받는 것 같았다. 

그의 큰형님인 고청명 역시 이십여 세가 넘어서야 수재에 합격했던 것을 생각한 고청운은 다시 담담해질 수 있었다. 

요 몇 년 동안 그는 경성에서 몇몇 소년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모두  16살에 수재에 합격한 소년들이었다. 좀 심한 경우 12~13살에 합격한 소년도 있었다. 심지어는 고청운보다 더 어린 나이인 11살에 지역에서 지원하는 장학생으로 선정된 생원도 있어, 고청운의 보는 눈도 따라 높아진 것 같았다. 

사촌 동생들은 과거에 아직 급제하지 못했으나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걱정이 없었다. 고청평은 성혼한 지 이미 2년이 되어 한 살 반이 된 아들 하나를 두었고, 얼마 전에 서신을 통해 부인이 또 회임하여 3개월 후에 아이가 태어날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작년에 장가든 고청안네에도 회임 소식이 있었다. 

혼인 상대를 고를 때는 어느 정도 서로 비슷한 집안을 택했는데, 고청평이 고청운의 예상을 벗어나 방(庞) 교유의 여식과 혼사를 치른 것 외에 숙부와 숙모는 고청안의 혼인 상대를 고를 때 상대의 가산이 어느 정도 부유한 지주 집안의 여식을 선정했다. 결혼 상대 집안은 아주 큰 가산이 있거나 상인의 호적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상가도 몇 채 있는 데다 문중이 거느린 집들도 꽤 많아 기댈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숙모와 숙부가 사촌 동생들을 위해 학자 집안의 여식을 선택할 줄 알았던 고청운은 처음 숙부님이 결혼 상대의 가정 형편을 서신에 적어 자신의 의견을 물었을 때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상대의 인품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가 이런 혼사를 반대할 리가 없지 않은가.

고청운은 과거 시험을 생각하면 자신의 큰아들 소석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지금 오경을 배우고 있었는데, 습득 속도도 빨랐고, 산술, 율법 방면에서 고청운의 지도를 받아서인지 매번 시험을 치를 때마다 감점 요소가 적었다. 

고청운은 언젠가 소석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과거 시험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만약 아이의 성적이 나쁘지만 않는다면, 굳이 15살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 *

산술 서적 출간으로 상관의 찬사를 받은 고청운은 본격적으로 업무를 분담하게 되었다. 

곧이어 그의 <백사전>도 출판이 되었는데, 새로운 필명을 쓴다는 것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과 같았기에 이번 화본의 성공 여부에 대해 아직 충분한 확신이 없었던 고청운은 이 책의 판매 결과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간미 역시 그와 같이 이번 화본에 대해 매우 큰 호감을 가졌다. 자신이 낸 의견이 반영되어 수정 방향이 정해지기까지 하자, 자연히 관심도도 함께 올라갔던 것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청운은 여전히 연재의 형식을 취하여 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한 번에 10만자씩의 분량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이 이야기를 준비한 만큼 그의 마음속에 거의 완성에 가까운 내용이 진작에 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에 살던 세상과 연결이 되어 있는 이야기여서 그런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종의 감정적 요소가 기인한 덕에 그의 글을 쓰는 속도가 매우 빨랐던 것도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쇄와 판매였다. 

* * *

어느 날 오후, 고청운은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붓글씨를 연습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오늘은 화본이 발매된 지 이틀째 되는 날로, 어제 저녁에 막 출간된 책들이 서가에 진열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잠시 뒤, 고삼원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그는 고청운을 보자마자 안색이 좀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곧바로 운을 뗐다.

“숙부, 제가 가서 들여다보고 왔는데,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책을 몇 장 읽어보더니 다시는 더 보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오래 책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은 그래도 계속 책을 읽어 내려갔어요.”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마음속에 걸려있던 한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웃으며 말했다.

“그럼 괜찮은 편이구나.”

“그게 어떻게 괜찮다는 거죠? 예전의 반응과 비교하면 한참 멀었는걸요!”

나이가 24살인 고삼원은 외부인 앞에서는 침착하고 능력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고청운의 앞에서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은 무슨 말이든 다 하는 성질을 여과 없이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 그는 이런 말까지 하였다.

“예전에 쓰신 것보다 훨씬 못 쓰셨다고요! 예전에는 숙부의 책이 발간되자마자 서점 입구 앞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지금은 우리가 책을 사는 사람이 있는지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게 제가 예전에 사용하시던 필명을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이 더 좋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지금 그 누가 ‘산곡거사’에 대해 알겠습니까.”

고청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녀석아, 너는 마음이 너무 급하구나. 지금 책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사내들이니, 당연히 여성의 시점에서 써 내려간 책에 흥미가 없겠지. 그러나 이번 화본은 그냥 필사본이 아닌 정식 인쇄 작업을 거친 간행물이고, 송죽서재에서 나오는 화본은 수준이 높은 편이란다. 

이 송죽서재는 글을 제법 잘 쓰는 문인들을 여럿 보유하고 있기에, 다들 송죽서재에서 나오는 화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나의 새 책도 여기에 이렇게 진열이 되어 있으면 틀림없이 어떤 사람들이 사서 보기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화본이라는 것은 입소문을 타야 되는데, 아무리 ‘일침황량’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번 작품을 제대로 잘 못 썼다면 사람들에게 팔리지 않을 것이고 되레 남의 비웃음거리나 되었을 게야.”

고청운은 뒤에 할 말이 더 있었으나, 생각해 보다가 갑자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었지만, 고청운은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이번 작품 <백사전>의 주인공은 여성이며, 이 화본이 여성 독자를 겨냥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전 화본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우여곡절이 많게 집필했다. 

고삼원은 또 이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는 고민하지 않고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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