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출세 (3)
1년 후, 고청운은 종6품 사관수찬(史官修撰)직으로 승진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역사 기록을 편찬하는 임무가 더해졌기에 더 이상 잡일을 한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정도 국정 업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자 이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그래도 이틀에 한 번꼴로 황립 서원으로 가는 일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청운은 동료 장(张) 씨로부터 현지에 고모와 외할아버지 댁을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간 새로이 찾아온 희망이 있었는데, 바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된 것이었다. 이번에는 간미가 곱디고운 딸을 낳았다.
고청운은 이 딸을 보고 반색하며 앞날을 걱정했다.
“걱정이 너무 많으십니다.”
간미는 그런 그를 비웃었다.
“딸은 아들과 다르잖소. 아들, 손자는 우리 복만 있으면 되지만, 시집가는 건 큰일이오. 혼수 준비는 고사하고 남편감도 제대로 잘 찾아봐야 하는데 말이오.”
고청운은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한 번 딸의 남편감으로 매치해 생각해 보았는데, 그들 집의 자제들은 망나니가 아니면 또 나이가 적당하지 않으니 여간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방자명네 집 아들은 어여쁘고 얌전했지만 애석하게도 항렬이 너무 가까웠다. 따지고 보면 근친인 것이었다. 방희림네 아이는 벌써 2년 동안 만나지 못했기에, 그간 성질이 어떻게 변했을지 몰랐다. 이전에 잠시 만나 본 그 아이는 정말 무지막지했었다. 그리고 하겸죽네 집 아이는 자신의 딸보다 몇 살이나 많았다…….
고청운은 아예 종이 한 장을 꺼내서 친한 친구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다 보니, 이 조건이 맞으면 또 저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역시 아들이 좋다. 적어도 혼사에 이렇게 큰 걱정거리가 없으니 말이야. 심지어 딸은 너무 총애를 해서도, 너무 아무것도 모르게 키워서도 안 되니, 앞날을 생각하면 또 약간은 구렁이 같이 심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할 것 같기도 하구나.’
“부군도 참 너무 급하십니다. 아직 태어난 지 6개월도 안 된 아이인데, 벌써부터 그렇게 걱정이 앞서시면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는 또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청운이가 하는 게 맞다. 가능하다면 요 몇 년 동안 훌륭한 낭군감이 될 주변 아이들을 잘 주시해 봐야지.”
그들 곁에 있던 연 씨가 말했다.
연 씨는 요 몇 년 동안 아이들이 재롱을 떨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녀는 더욱 자애로운 눈매로 바뀌어 가면서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좋은지 잘 웃었다.
가장 좋은 것은 죽마고우로 자라 이후의 부부의 감정까지 발전하는 것이었다.
연 씨가 딱 그런 경우였다. 부군과 함께 자란 그녀는 병란을 겪고 살아남았고, 전시가 무사히 안정이 될 때까지 부군에 대한 좋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혼인을 하고는 애정이 더 깊어졌는데, 그래서인지 그녀의 부군은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지 못했을 때에도 슬퍼하지 않았고 시아버지가 아무리 몰아붙이더라도 첩을 들이지 않았다.
증손녀의 이목구비 관상이 자신을 많이 닮은 걸 보니, 앞으로도 역시 청수하고 아리따운 사람으로 자랄 것 같았다.
다만 소석과 소어의 이목구비가 부모들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연 씨는 이 아이들이 자신의 오라버니들처럼 잘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인들이 좀 더 어여쁘게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부군의 총애를 받는다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딸과 간지원, 또 고청운과 외손녀를 다시 생각하면 세상 모든 것에 절대란 없다 싶기도 하였다.
* * *
또다시 2년 후, 고청운은 29살이 되었다. 이때 방인소는 이미 64살이었다. 지금은 조정의 율법이 개정되어 2품 이하의 관원은 65살에 관직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는데, 만약 건강상의 이유가 있다면 미리 신청을 해서 더 빨리 퇴직하는 것도 가능했다. 전 왕조에서는 70세까지 관직에 머물 수가 있었지만, 이번 왕조에서는 2품 이상의 관료들만 70세까지 관직에 머물 수 있었다.
방인소야 몸 관리를 잘해서 건강 문제는 없었으나 점차 기력이 약해지고 있었는데, 올해 작은 병을 앓고 난 후 더 그랬다. 그는 곰곰이 고민해 본 결과, 고청운과 방자명이 이미 벼슬에 나가 있으니 더 이상 관직에서 버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관료들 간에 벌이는 암투가 싫었던 그는 예부로 옮기고 나서, 이곳은 아주 편안한 곳이니 한 해를 더 버티고 정식으로 퇴직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왜 지금 당장 퇴직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퇴직 후에는 녹봉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특별히 돌봐주지 않는 한 퇴직급여라는 건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고청운은 매우 답답하기만 하였다. 오죽하면 일부 관료들이 늙어서 더 검소하게 살아야 했을까. 만약 모아둔 돈이 별로 없다면 퇴직 후에는 생활 수준이 많이 떨어질 것이었다.
스승도 제자가 잘 되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이지 노후가 걱정됐을지도 몰랐다.
고청운은 예부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방인소의 결정을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그가 원래 몸담았던 호부는 너무 고생길이 열린 곳이었던 것이다. 일도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업무들도 많아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심초사하여 처리해야 했다.
방인소는 그간 호부에 있으면서 자주 퇴근이 늦어지고는 했는데, 특히 연중과 연말에는 초과 근무를 많이도 하였다. 이제 그는 한평생 고생스러운 직무에서 벗어나 예부로 가면 조금은 더 편할 것이었다.
유일하게 방인소가 아쉬워한 것은 부서를 옮기면서 품계가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다. 예부는 다들 알다시피 일이 거의 없어서 퇴직이나 기다리는 한직이니, 딱히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승진을 위한 주선도 하지 않았다.
* * *
방인소가 예부로 출근한 것은 5월경이었다. 이와 함께 고청운은 한림원에서 만 6년을 보낸 셈이 되었다. 올해 또 한 무리의 서길사들이 산관고시에 응했고, 고청운은 이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또다시 승진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고청운의 품계는 이제 정6품의 호부주사(户部主事)로 올라갔다. 그와 같은 해에 진사가 된 2, 3갑 진사들 중 제일 높은 품계를 지닌 자들이 바로 이 정6품 품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진사들은 모두 아직 정7품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3년에 한 번만 품계에 대한 승급 평가가 이루어졌기에, 모두 이때만 되면 승진이 되기를 꿈꾸었다.
물론 승진이 꽤 빠른 방희림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고청운의 앞길은 아직도 불분명했다.
방희림은 이미 종5품에 해당하는 지주(*知州: 주(州)의 최고 지도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현령으로 있을 때 확실한 정치적 업적을 세웠는데, 총명하고 능력 있는 것으로 유명한 와중에 몇 가지 굵직굵직한 큰 사건을 해결해 냈던 것이다.
그는 한림원 출신인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 장인인 백엽의 지원도 있었고, 품계 심사 평가에서도 모두 우수한 점수를 획득하면서 겨우 29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주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현보다 한 단위 더 큰 지역 단위인 주의 최고 책임자로 승격이 되었다.
방인소는 고청운에게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고청운은 매우 감탄했었다.
“방희림의 승진 속도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닙니다.”
고청운은 막 말을 꺼내고 나서야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의 스승님은 이제 곧 퇴직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5품직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의 앞에 대고 남의 고속 승진에 대해 감탄을 하다니.’
다만, 스승님은 방씨 가문에서 첫 번째 진사 합격자였다. 스승님은 더 위로 이끌어줄 든든한 뒷배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 또한 굳이 권세에 빌붙으려 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지방관을 수임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퇴직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그나마 이 정도의 지위에라도 올라 있는 것 자체가 매우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한림원의 잠 시강보다 높은 품계였다.
고청운은 그저 헤헤 웃으며 코를 만졌다.
방인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청운은 방인소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너는 언제 내려갈 계획이냐?”
고청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지금 같아서는 호부로 발령을 받고 싶습니다만, 그러려면 또다시 최소한 3년은 더 지금의 보직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방 형도 지방관으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까지 따라 내려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방자명은 올해 심사 평가 후, 조직을 통해 항주부(杭州府)의 정6품직인 통판(*通判: 지부(知府) 아래 세금으로 걷은 양곡을 운반하거나 농사일, 수리(水利), 소송(訴訟) 등의 사무를 담당. 감찰관의 기능을 겸함)으로 옮겨 갈 준비를 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의 장인인 하상이 이부의 관원이었던 덕분에 이렇게 좋은 자리에 결원이 생기자마자 바로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는데, 항주처럼 좋은 곳에 이런 자리를 찾는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로써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방에 있고 한 사람은 경성에 남게 되었다. 고청운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그나마 비교적 잘된 일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스승님도 그 의견에 동의했었다.
물론 스승님의 동의를 한 연유는, 그랬다, 고청운이 광명보다는 가정의 안정을 더 추구한다고 스스로 피력했던 탓이 컸다. 만약 그가 다른 지방으로 내려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는데, 적어도 최소한 소석과는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었다. 황립 서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이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그가 소석을 다른 지방으로 데리고 갈 리 만무했다.
경성을 벗어나는 일은 쉬우나, 다시 입성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인소는 고청운의 심경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녀석아, 이 녀석아. 이 노부가 너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자가 실리를 추구하지 않았기에, 관직 생활 중에 그저 이익만을 쫓는데 급급해서 남에게 이용당하거나 함정에 걸려들 일은 없던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분명 더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그저 껄껄 웃으며 일부러 어수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이후 고청운은 호부의 주사(*主事: 관청에 소속되어 문안(文案), 부목(符目) 등에 관계된 문서 기록 등의 임무를 담당)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보름 뒤에 호부에 출두하되 한림원의 다른 사람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 놓을 것을 명받았다.
이때쯤 방자명도 경성을 벗어나 항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홀로 항주 지역으로 건너가 부임하지 않고, 가족들을 함께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경성에서 항주까지는 마침 경항 대운하(京杭大运河)를 통해 한 번에 목적지까지 직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관원들이 육로를 통해 새로운 부임지로 가는 경우에 비해 수로로 이동할 수 있는 부임지로 발령 난 방자명의 여정은 확실히 더 편안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