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출세 (2)
고대하와 소진씨는 정원에 앉아 있었는데, 계속 권법을 함께 연마하고 있는 두 부자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보기에는 고택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규모는 훨씬 더 작았지만, 그래도 이 작은 공간이 그들에게 더 큰 소속감을 선사해 주는 것 같았다.
고택에서 지냈을 때에는 아들의 스승님과 사모님에 또 며느리까지 있어서 좀 불편할까 봐 걱정됐었다. 또 자기가 하는 행동이 이곳의 사람들 수준에 적당하지 않거나 견식이 미천하여 아들에게 망신을 주기도 할까 봐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아들이 개의치 않다고 말해도 말이다.
더구나 이곳의 정원의 화단에서는 채소를 심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아들은 화단에 채소를 심는 것을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했다. 지금 그들의 목표는 앞으로 매일 아침 장보러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채소를 수확하는 것이었다.
“여보, 소석이가 여기서 2년 동안은 왔다 갔다 하며 서원을 다니는 거죠? 그럼 우리는 내년에 임계촌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소진씨가 급히 물었다. 비록 20년 넘게 살던 임계촌이 그립다고는 해도, 그녀는 여전히 아들과 손자 곁에서 지내고 싶었다.
고대하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 문제만 생각하면,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서신을 보내 돌아가는 시기를 좀 늦춰야겠다고 알려야겠소. 우리는 소석이가 서원에서 기숙할 때까지 여기서 아이를 돌봐주다가 돌아갑시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아이를 데리고 여기서 살아주겠소? 소석이를 다른 사람 손에 넘기는 것은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구려.”
이 시기에 소석과 함께 형성한 친밀감을 생각하니, 고대하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임계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요. 옆집 아이를 좀 보세요. 소석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집에 있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하인들뿐이니 아이의 부모들이 안심이 되겠어요?”
소진씨는 걱정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너무나 기뻤다. 좀 더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고청운은 권법 연마를 다 마친 후, 소석에게 정원에서 잠시 놀고 있으라고 하고는 부모님에게 한 가지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제가 서원에서 장씨 성을 가진 선생님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어성(鄂省)에 친척이 지현으로 계시다고 해요. 그분께 부탁을 해서 고모와 외할아버지 댁 소식을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해 볼까 합니다.”
고대하와 소진씨가 일순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찾아봐 달라고 부탁해 보거라. 만약 찾을 수 있다면, 할머니께서 무척 기뻐하실 게야.”
“어머니, 알겠습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진씨에게는 또 하나의 딸이 더 있었는데, 20여 년 전에 황무지를 떠날 때 그만 서로 잃어버렸다. 당초 노진씨와 소진씨의 친정이 있던 마을뿐만 아니라 그 일대의 주변 마을 몇 개의 사람들까지 죄다 함께 거대한 행렬을 이루어 피난길을 이뤘었기에 중간에 사건사고가 많아서 연락이 끊기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그들은 딸을 찾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고씨 집안이 임계촌에 정착한 이래 고향에 돌아가 선조의 위패를 모셔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다시 돌아가 본 그들의 고향집은 이미 산사태의 여파로 인해 사람이 더 이상 살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그 부근에 정착한 사람들 중에서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어 가족들의 소식을 물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속 시원히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누구를 찾아 물어도 가족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 그들은 일반 서민의 신분이었기에 다른 도시로 한 번 나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좋든 싫든 남에게 부탁하여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찾다보니 아무래도 직접 찾으러 다니는 것보다는 효율이 떨어지게 되었고, 이렇게 또 여러 해가 지나면서 아무런 소식도 없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예기치 못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단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간은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고청운이 벼슬을 하게 되자 다시 희망이 생겼다.
집안일을 돌보는데 고청운이 벼슬을 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 정말 이러했다. 관원들의 수색 능력이나 수색에 있어 미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확실히 보통 백성들보다는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청운은 이쪽으로 인맥이 생길 때마다 친지들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방희림처럼 현령으로 가면 현지 호적을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모나 고모부 그리고 외할아버지 댁 가족들의 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기록만 있다면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몇 년간 전란 등의 이유로 피난하느라 서로 뿔뿔이 흩어진 집이 굉장히 많았다.
고청운은 고모나 외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그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연관계인 가족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번에 귀향했을 때 할머니가 이 이야기를 하다가 울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늙을수록 마음이 여려지는 것 같았다. 고청운이 수색을 시작해 보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노진씨는 이제 너무 늙기도 했고 살림도 나아졌으니, 임종 전에 딸을 꼭 만나보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딸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기에 그는 일부러 귀향 때 얘길 꺼냈었다.
소진씨는 친정 식구들을 그리워하고 있음에도, 고청운 앞에서 내색하는 일이 드물었다. 고청운은 그의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가르칠 것은 다 가르쳤지만, 남자 형제들에 비해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가 언제나 무시당하면서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결혼 후에는 고대하와 사이가 좋았고 이미 자신이 맡아 키워야 하는 아이들도 생겼기에 자신의 친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소진씨는 병란이 한창이던 때에 그들이 이미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했다.
“네 외할아버지를 찾으면…….”
소진씨는 어렴풋이 웃었다.
“너네 두 외숙부는 이미 늙으셨을 거야. 모두 성실한 사람이니 찾을 수 있게 되면 나쁠 것 없지. 친척이 하나 있는 것도 좋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잘 지내고 계신지는 모르겠구나. 당시 우리 집은 100묘가 넘는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피난길에 다 잃게 되어 그게 참 아깝단다.”
고청운은 말을 하지 않았다. 고대 시대인 만큼 천재지변과 화재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그런 재난을 겪어 보지는 않았다.
그동안 수없이 수색을 의뢰했음에도 별다른 동정을 알려오는 일은 없었으나, 이번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할 것이었다. 찾아낼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가족의 소원을 풀어주는 일이니 말이다.
다만 그는 한편으로 찾는 내내 친척의 인품이 너무 나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인품인들 어떠하랴. 함께 살 것도 아닌데 말이다. 또 그 집이 자신보다 지위가 높지만 않다면, 그리고 그들 가족을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않는다면 별 탈 없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만약 누군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가족들이 나서서 그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환생하여 이곳으로 오게 된 고청운의 가장 큰 행운은 이 의젓한 가족들을 만나 다 같이 한마음으로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 세상은 언제나 생존경쟁이 치열한 만큼, 대외적으로도 가족 간의 단합을 유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 *
고청운은 소석을 불러와 목욕을 시키고 나서 숯 화로를 살펴 불을 지폈다. 그 후에 세 개의 촛불을 켰는데, 그 덕에 주변이 밝아지자 그는 자신의 초고를 꺼내 들었다. 바로 산술 서적의 후편이었다. 지금은 이미 11월로, 날씨가 꽤 추워졌지만 머리만은 더욱 맑아졌으며, 책 구상에 대한 영감도 잘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2년 후에 책이 출판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이번의 내용에 전의 제1권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어려운 산술 개념을 다루기로 하였다. 이전에는 대수학과 방정식을 다뤘다면, 이번의 내용에는 함수 등을 포함한 현재 수학계에서 다루는 어려운 수준의 거의 모든 내용을 담아 볼 생각이었다.
이로써 그의 명성이 더 확고해지면 외국의 산술 서적을 번역하고 아라비아 숫자를 정식 도입하여 이곳에도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산술은 많은 학문의 기초였다.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하게 되면 나중에 쓰기도 편해질 것이었다. 이 외에도 경제, 통계, 건축, 기계학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칠 터였는데, 이를 아라비아 숫자를 활용해 계산하고 측정하게 되면 더욱 직관적으로 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붓을 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고대하의 거듭된 독촉에 고청운은 부모님도 덩달아 추위에 떠실까 봐 마침내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소만에게 붓을 씻어두라고 한 뒤, 빨리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상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소석이 그의 품으로 굴러 들어오더니, 훈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우리 모두 같이 자요.”
이것은 그와 이사를 계획하며 약조했던 조건 중 하나였다. 고택에서도 소석은 소어와 같은 침상을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자길 원했다.
고청운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하니 얼른 자자꾸나.”
그는 내일 여기서 한림원으로 바로 가야 했다. 거의 한 시진은 말을 달려야 했으니, 내일은 더욱 일찍 일어나야 할 것이었다.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한데, 아들이 이불에 들어와 있어서겠지?’
“아버지, 저와 함께 자는 게 좋아요? 어머니와 함께 자는 게 좋아요? 아니면 동생이랑 자는 게 좋아요?”
소석은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구 선생이 준 목조 조각을 꺼내더니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고청운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그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네 엄마와 함께 자는 게 좋지. 네가 자다가 오줌을 쌀까 봐 무서우니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미아와 소어가 생각나는구나. 오늘 밤 미아는 잠을 잘 자려나? 배 속의 아이도 잘 놀고 있겠지?’
이번 아이는 소석나 소어 때보다 훨씬 얌전했는데, 그래도 활달한 태동은 있었다.
“아버지 나빠요.”
소석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자는 것을 가장 좋아해요.”
고청운은 빙긋 웃으며, 아이의 손에 있는 나무 조각을 잘 내려놓은 뒤, 그의 작은 두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초가 금방이라도 다 타 없어질 것 같았다.
“빨리 자야지.”
소석이 멍하게 잠에 비몽사몽 빠져드는 것을 보다가 고청운은 일순 영감이 떠올랐다. 마침내 구 선생의 그 음산한 기질이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이 났던 것이다.
고청운은 내위(内卫)라는 자들을 떠올렸는데, 그들은 거대한 관료 집단이 제일 무서워하는 이들로, 천자의 발톱이자 이빨이 되어 암암리에 황제의 눈과 귀가 되는 자들이었다.
이 내위란 황제에게 직속으로 속해 있기에 오직 황제만이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고, 그들이 도대체 전국 각지에 얼마나 퍼져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새 왕조가 세워질 때도 이 내위들이 큰 공을 세웠는데, 건국 후에도 명백히 존재했으나 다시 음지로 돌아가 활동을 할 뿐이었다.
고청운은 내위가 현대 시대의 정보국이나 국가안전국 정도에 해당하는 기관이라 시공간 너머 평행세계의 금의위(金衣衛)를 떠올려 봤지만, 다행히 이 세상의 내위들은 감찰 권한만 있을 뿐, 검거 권한이 없었다.
검거에 대한 권한도 있었다면 금의위와 황제의 정보기관격인 동창(東廠)이니 서창(西廠) 같은 말도 존재했을 터였다. 그런 것은 더 무서운 경우였다. 비록 고청운은 어떠한 위법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두려운 존재였다. 부정한 일에 연루되어 자칫하면 날벼락이 떨어질까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
소문에 의하면 요 몇 년 동안 문제가 있는 것이 밝혀진 관료 대부분이 내부에서 고발된 것이라고 하니, 관료들은 이 기구를 더욱 깊이 기피하게 되었다.
고청운은 황궁에 들어섰을 때 우연히 내위의 우두머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상대방은 함부로 입을 열거나 웃지 않았고, 음기도 짙게 배어 있었다. 그 특유의 기질이 고청운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구 선생의 기질은 바로 그 우두머리와 약간 비슷했다.
그는 단번에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생각해 보았지만,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옛날에 마주쳤던 내위가 생각나는 것은 또 왜일까?
그리고 진짜라고 해도 뭐 무슨 상관인가? 자기는 절대 모르는 척 하면 될 일이었다.
고청운은 이 생각을 접고 조금이라도 더 일찍 잠들 수 있도록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