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60)화 (260/504)

260화. 초빙

두 사람은 앞마당 안채에 나누어 앉았다. 고청운은 육훤을 주빈으로서 손님석에 앉게 하고, 손에 든 소보에 한눈을 팔며 계속 들여다보았다. 비록 고삼원이 오늘 아침 일찍 소보를 사오기는 했지만, 아직 미처 읽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모든 소식지를 장식한 기사 중 하나는 일침황량의 정체였다. 대서특필이 되어 있었는데, 각 소보마다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올해 몇 살인지, 어떤 화본들을 써 왔는지 등 그가 익명으로 썼던 <여행기>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집 주소까지는 소보에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몇몇 소보의 내용은 대동소이하여 별 차이가 없었는데, 다만 어떤 곳에는 과장해서 썼고, 다른 어떤 곳은 약간은 함축성 있게 썼다는 정도였다. 

또 어떤 곳에는 닭살 돋는 표현들로 그를 마구 미화하는 내용도 있었다. 

육훤은 머리를 내밀고 그와 함께 소보들을 읽어 보았는데, 한 번 더 보는 것임에도 여전히 흥미진진하여 흥분한 채 말했다.

“스승님, 이 사람들이 스승님을 얼마나 좋게 말했는지 보세요! 저는 이 사람들이 쓴 기사가 다 맞는 것 같습니다.”

고청운이 대답했다. 

“이들은 그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것저것 지어내는 말들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이들의 견해는 대부분 과장되거나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지. 어? 우리 소보가 그새 또 자랐구나!”

이 10대 초반의 아이는 정말 빨리도 자랐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육훤은 기뻐서 씩 웃더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즘 아버지한테 훈련을 받고 있기도 하고, 이전보다 더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는 고청운의 어깨를 한 번 쳐다보고는 부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스승님처럼 이렇게 컸으면 좋겠습니다.”

6년 전 땅딸막했던 아이를 떠올리던 고청운은 육택의 키가 자신보다 더 큰 것을 떠올리며 육훤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나보다 조금 더 크시니, 너도 나중에는 키가 아주 클 것이야. 다만 편식을 경계하고, 야채를 조금 더 많이 먹을 수 있다면 그만큼 또 더 잘 자라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육훤은 턱짓을 하며 잠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는 확실히 야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고기 먹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아직 많이 나누지도 못했는데, 소석이 책 상자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어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매우 반가워하며 바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 시작했고, 이따금씩 흐흐 하며 웃기도 하였다. 

‘도대체 두 사람은 서로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평소에도 계속 서신이 오가기는 하였지만, 무슨 일이든 다 서신으로 적어 보낼 수 없었을 테니 저러는 것이겠지?’ 

고청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재가 드디어 조용해지자, 그는 그제야 사장정이 자신에게 쓴 서신을 열어 볼 수 있었다.

서신을 다 보고 난 후, 고청운은 어쨌든 이 일의 전후 맥락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쓴 화본 때문에 실제 은광을 발견했다고 맹세한 건 맞는 것 같았다. 확실히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 개입하기 힘들었다. 

또 사장정이 <매화 반지>란 작품을 공연하면서부터 황후는 고청운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었고, 지금 또 황제가 그 사실을 함께 알게 된 것이었다. 

물론 황제는 별다른 의도 없이 그저 무심코 한림원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그 고청운이라는 작은 몸으로 너무나도 큰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서 독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오늘 보면 알겠지만, 고청운은 선물은 받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이렇게 보내오는 편지는 다 받아 보았다. 그가 독자들로부터 편지가 오면 그 편지들을 한 바구니에 담아 두는 것을 안 방자명은 오늘 오후에 이 편지들이 방문첩이었다면 정승들이 연말에 받는 것처럼 양이 대단한 것 같다며 그를 놀리기도 하였다.

사건은 아무리 커도 시간이 지나면 곧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더욱이 이 시대에 그의 화본을 볼 수 있던 사람은 일반적으로 모두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있었고 대부분 비교적 신중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모두들 며칠 동안만 다 같이 흥분에 휩싸여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에는 고청운이 관직을 가진 신분이라 보통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 감히 행동할 수 없었기에, 드디어 고청운에게도 오랜만의 평온이 찾아왔다. 

물론 새로운 화본을 쓰라고 재촉하는 독자들의 편지도 간간히 받고 있었고 연회에 나가면 인기가 높아져 있었으며, 그에게 먼저 말을 거는 여성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런 것들을 제외하면 고청운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설령 그가 지인들과 자주 외출했다고 한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현대 세계였다면 몰라도 이 시대에는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고, 사진 같은 기록이 가능한 매체도 없어서, 일침황량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귀신도 모를 수 있었다. 

고청운은 송죽서재에서 바람까지 쐬며 앉아 있을 정도가 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최근 2년간 화본을 쓰지 않았는데, 뭇 독자들이 불만을 가질 만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청운은 이제 두 번째 산술 서적 집필에 몰두했다.

일침황량이라는 필명으로 화본을 하나 더 쓰면 엄청난 판매고를 올릴 것이 분명하다고 졸라 대는 사장정에게는 아쉬운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화본의 판매량이 꾸준해서 한동안 사장정을 다시 기쁘게 해 주었다. 

일전에는 거의 아무도 찾지 않던 <여행기>조차 동이 나고 호평이 쏟아지게 되자, 고청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 * *

고청운이 요즘 들어 기쁘게 지냈다면, 간미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요즘 그녀는 바깥 약속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어떤 호기심 많은 아가씨들은 그녀더러 집에서 연회를 개최하도록 부추겼다. 간미는 그녀들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시치미를 떼며 말머리를 돌리곤 하였다. 

다행히 9월 중순에 간미는 자신이 다시 회임을 했다는 걸 알았고, 이참에 외출을 삼가고 집에서 마음 편히 아이를 키우려고 하였다.

간미만 놓고 말하자면 이 아이는 정말 제때에 찾아와 준 격이었다.

간미가 또다시 회임한 사실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바로 집에 있는 네 명의 노인이었다. 집에 아이가 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하나가 더 생긴다고 하니, 사내든 여인이든 모두 기뻐하였다. 그들은 고청운 부부가 이미 두 명의 손자를 두고 있기에 이제 여자아이를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 중 소진씨가 가장 흥분해 있었는데, 이제는 상경도 했겠다, 아들과 며느리를 제대로 돌봐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연 씨와 함께 간미에게 국을 끓여주면서 먹이고 보살펴 주더니, 그녀의 곁에 있던 고청운까지 함께 보기 좋게 만들어 놓았다. 

* * *

고청운의 허리가 좀 더 굵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즈음, 황제의 하명으로 건립된 황립(皇立)서원의 건축이 다 끝났고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서원 중 하나로, 근무가 공표된 선생님들 모두가 학식과 소질이 높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집하는 학생들 또한 일정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혹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이 확인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방희림 정도로 검증이 되면 문제가 없었다.

고청운은 6살 이상 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모집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소석이 생각나 가슴이 뛰었다.

그곳에 개설된 수업은 문화 수업뿐만 아니라 금기서화나 기마술 따위의 과목도 다루는 등 학과목들이 매우 풍부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이 모든 과목들은 아이들의 미래에 매우 유익할 것이었다. 

조건만 봤을 때, 고청운은 자신의 집안 형편으로는 아이가 입학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뒷문이라도 수소문해 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황립 서원으로부터 산술 선생으로 그를 초빙하고 심지어 지금의 관직과 함께 겸직 대우를 해 주겠다는 내용의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산술 선생님? 관학이 아니어서 나중에 품계를 잃게 되면 어쩌지?’ 

고청운은 망설였다. 

‘이 일이 또 본업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또 한림원의 책임자가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 

고청운은 계속해서 고민이 되었다. 

확실히 이것들은 모두 제대로 고려해야 할 문제이므로, 못 본 체 지나갈 수 없었다. 

황립 서원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황실과 천 갈래 만 갈래의 관계를 맺게 되는 서원이었다. 그 배경이 강대하고, 교원들의 역량도 풍부했으며, 주변 환경도 아리따워 이 서원이 완공된 날부터 경성의 많은 사람들이 이 황립 서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관직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경성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 있는 관원들도 모두 이 서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몇 명의 지방 수석 장관들은 일찍이 집안의 자제들을 경성으로 이사를 보내 놓기도 하였다. 

요즘 같은 때 좋은 스승은 정말이지 희소한 자원이었고, 아무리 인재가 많다는 경성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실을 비롯한 소수의 최고 권력자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좋은 선생님을 찾으려면 좋은 운과 인맥을 가져야만 가능했다. 

결국 그런 것들에 부합하는 사람들이라고는 모두 관직자리에 몰려 앉아 있었는데, 벼슬을 하니 그중에 누가 학생들을 가르칠 시간이 많겠는가? 

그들은 심지어 자기 아이들조차도 직접 가르칠 수 없었고, 대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위탁해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고청운은 만약 그가 지금 사직서를 내고 경성에서 가정에서 운영하는 개인 학당을 열어 직접 학생을 가르친다면, 지금의 그의 명성으로 볼 때 학생 모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게다가 몇 년 전 그가 육훤을 가르친 후, 곧바로 몇몇 가문의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를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자신의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하려고 매우 후한 대우를 약조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 고청운은 아직 1년이 남아 있는 시험에서 진사에 합격하기 위해 더 이상 학생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이 때문에 정용후부와 비슷한 지위를 가진 귀족 집안에서는 그를 보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며 언짢아했었다. 스승이 방인소라는 문관인데다 육택이 옆에 있어 줬고 또 이듬해 곧바로 합격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미움을 사서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이런 일을 당시에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사장정과 친숙하게 된 후에야 사장정의 입을 통해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듯 좋은 선생님이라는 재원의 부족함은 심각했다. 흠흠, 물론 이것은 자랑일 수도 있지만, 고청운은 확실히 가르치는 감각이 남달랐다. 

그의 집만 해도 지금 교사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설령 방인소와 자신이 집안에 있다고는 하나, 그들 두 사람은 다 진사가 아닌가. 

소석을 가르칠 짬조차 내지 못했기에, 비교적 믿을 만한 거인을 하나 찾아서 공부를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그 둘이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부라 할 만한 것은 바로 저녁 시간에 소석의 학업성취도를 시험해 보는 것 정도였다. 

다른 관료들도 대부분 그랬다. 그저 자신들의 아이를 어딘가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고향이 경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중에 족학 등이 있다면 고향에 자제들을 두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한 집안에서 여러 사람이 경성에서 벼슬을 하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 또는 귀족 집안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문중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았기에 족학을 설립하는 것이 유리했다. 

물론 고청운도 어떤 낙방한 거인을 초빙하여 소석의 개인 교사로 두고 그를 단독으로 가르칠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은 했으나, 그렇게 된다면 1년에 최소 50냥의 은자를 지출해야 하는 등 가계 지출이 굉장했다. 이는 연간 그들이 벌어들이는 녹봉 수입 전체와 맞먹는 지출 규모였다. 

금전적인 것 외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선생님의 인품인데, 만일 그 사람이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사람이라 소석을 간경처럼 가르쳐 놓는다면, 고청운은 분명 눈물도 보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끊임없이 울어야 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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