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자초하다
고청운은 자신의 서재 한 구석에 놓인 잠겨있는 두 개의 녹나무 상자를 보고 있었다. 그중 한 상자 안에는 그가 쓴 일기들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그가 12살에 부학에서 공부한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써오고 있는 일기들로, 어떤 때는 아무 일이 없으면 한마디만 적거나 심지어는 며칠 동안 쓰지 않고 큰일이 발생하거나 기억할 필요가 있는 일이 생겼을 때만 기록했다.
그러나 며칠씩 일기를 안 쓰는 경우는 드물었고, 보통은 날마다 일기를 썼다.
또 그는 마음이 답답할 때 예전에 쓰던 일기를 뒤적여 보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 닥친 일도 결국 지나갈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기에 털어놓으면 기분이 금방 다시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한림원에서 일한다는 것은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업무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좋을 리가 없는 것이, 문인들끼리만 있는 곳이 아닌가.
그곳은 늘 미묘한 기류가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그들 부서는 더 특별했다. 확실한 인재들을 모아 둔 곳이라 그런지 황제가 간간이 들락거려, 가뜩이나 가라앉지 않는 울타리를 수시로 격랑으로 뒤흔들리게 만들어 놓고는 하였다.
특히 태자가 2년 전 출각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모두들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의 덕의(德義)를 기르는 일을 맡는 종1품 벼슬)직을 쟁탈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옥신각신 싸워대고 있었다. 학식이 심오한 한림관 몇 명이 몸소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수사부의 대학자들은 더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다음 세대의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모두들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경쟁에 끼어들 자격이 없었던 그는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런 광경은 그에게 좋은 수업이 되어 주었다. 다행히 그때 그는 아직 서길사였기에 그런 직위는 아직 꿈도 꿔볼 수가 없는 신분이라 평온한 나날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적은 일기가 가장 많았는데, 오늘은 더 특이한 날이었다. 고청운은 일기장을 펴 들고 먹을 갈며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상자 하나에는 그가 쓴 화본이 들어 있었다. 상자는 12살 때부터 현재 26살의 나이까지 친히 직접 써 내려간 <이림수선기>, <선검>, <출해모험기>, <장군전기> 등 4개의 화본들의 초고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다섯 번째 책은 아직 기약이 없어 보였다. 이것 말고도 또 몇 개의 단편 화본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초기에 써본 것들이었다.
여행기와 산술 서적은 따로 보관해 두었다.
‘결정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최근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이니, 앞으로 꼭 잘 간직해서 늙어서 따사로운 햇빛을 쬐며 긴 의자에 누워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가 붓을 들고 빠르게 글을 써내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폭발하듯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노부의 옥게빙판(*玉蟹冰盘: 국화 품종의 하나)을 꺾었어!”
고청운은 궁금해졌다.
‘옥게빙판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고청운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인소가 자신을 찾아왔다. 그는 식사를 한 뒤 옥게빙판을 살펴보러 갔다가 꽃이 꺾인 것을 보고 아까 간미가 꽂고 있던 꽃이 생각난 것이었다.
고청운은 그제야 자신이 꺾은 국화가 아주 아리따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옥게빙판’이란, 경성에서 새로 개발해 재배한 품종으로 은자를 4~50냥이나 주고 방인소가 천신만고 끝에 아는 지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겨우겨우 얻어낸 꽃이었다.
방인소는 방택에는 국화를 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화단에 심어 두었고, 심지어 집안사람들에게 일일이 그 국화꽃을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다녔었는데, 하필이면 꽃을 심은 위치까지는 다 전달하지 못했던 탓에 결국은…….
며칠 전에 방인소가 그에게 이 국화꽃을 얼마나 어렵사리 쟁취해 냈는지에 관해 한바탕 설명을 했었지만, 고청운은 당시에 주의하여 듣지 않고 그저 국화꽃 화분 하나를 말씀하시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고청운은 벽에 대고 반나절이나 사서오경을 외워야 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을 들인 덕분에 방인소로부터 남은 밤 시각의 반나절경은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허락을 얻어냈다. 줄곧 고청운을 기다리고 있던 간미는 그를 보고 웃음을 짓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고청운은 하얀 얼굴에 두 개의 선명한 눈 그늘이 떠 있었고, 심지어 아침 식사 때에는 기운마저 없어 보였다.
반면 방인소는 여전히 풍채가 늠름한 것이, 고청운의 안쓰러운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스승님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이 더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스승님은 고청운을 모방하여 약간은 현대식 언사를 하기도 했는데, 고청운이 거의 감당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모처럼의 낭만적인 순간을 만들려다가 화를 만들었으니, 고청운은 고생을 자초한 꼴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하필 그 한 송이를 꺾게 됐을까.’
그는 자신의 이 비싼 손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웃음을 볼 수 있는 것만은 좋았다.
* * *
아침을 먹은 두 사람은 함께 대문을 나섰는데, 고청운은 방인소의 뒤에 고개를 공손히 조아리고 있었다. 고청운이 마차에 타는 것을 도와주고 나자, 마침내 방인소가 입을 열었다.
“오후에 퇴근하고 나서 노부를 도와 옥게빙판에 표식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 이 얼마나 불쌍한 꼴이더냐. 네가 꽃을 꺾어 버린 걸 보니, 표식을 더 해두지 않는다면 내년이 되어 이 노부는 어느 것이 풀이고 옥게빙판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방인소가 마침내 자신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주려는 게 보이자, 고청운은 삽시간에 마차에 따라붙었다.
“스승님, 안심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그것을 잘 돌보겠습니다, 헤헤.”
고청운은 속으로 억울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렇게 많은 꽃들이 화단에 널려 있는데, 그중 어느 꽃 한 송이가 스승님의 것인지 분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스승님은 그의 집에 꽃을 심어둔 것도 모자라 귀중한 꽃에 특별한 표식을 해두지 않았다.
고청운은 이 세계로 오게 된 이후, 오직 난초나 산에서 막 자라나는 야생화에만 관심이 있었지, 국화에 대한 상식은 일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청운의 대답에 방인소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마차가 출발한 뒤에야, 비로소 고청운도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 * *
고청운은 낮에 평소대로 출근했다. 역시 하룻밤이 지나서 그런가, 동료들의 그에 대한 열기는 이미 식어 있었는데, 다만 몇 수사관 나부랭이가 자신에게 젊을 때 더욱 지식을 쌓고 성현의 말 등이나 좀 더 많이 배우라고 훈계를 하거나, 산술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할애할 것이 아니라 화본이나 더 써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훈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문학적 주류를 점하고 있는 문인들은 여전히 화본이라는 것을 업신여겼던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사고방식은 그러했는데, 그것이 또 고청운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그 사람들은 내각대학사가 아니면 유교에 통달한 대유이자 재야의 지도적 인사들이었다. 그들 각자는 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고청운은 그들이 이런 노련한 충고를 해 주는 것도 사실 자신을 위해서 충고를 해주는 거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기에 응낙만 할 뿐 나서서 반박하진 않았다.
* * *
오후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가니, 대문 앞에는 여전히 선물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고청운은 오늘도 여전히 완강히 거절하였고, 모두들 어쩔 수 없이 가져온 선물을 이고 지고 자리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육훤이 또 수행원을 데리고 달려왔다는 것이다.
“장원에서 수성(水性)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니? 어찌 이리 돌아온 것이냐?”
이 말을 할 때의 고청운은 낡은 옷을 걸치고 화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고귀하신 옥게빙판 곁의 잡초를 제거하고 벌레를 잡으며 물을 주고 있었다. 거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표식을 완성해 두었는데 다른 품종과 뒤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육훤은 그의 동작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 꽃들이 도대체 뭐가 보기 좋다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왜 우리 스승님께서는 이런 거친 일까지 손수하시는 걸까?’
고청운은 이유를 설명하기가 조금 거북해 쓴웃음을 지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육훤은 매우 불만스러운 얼굴로 손에 소보 한 부를 들고 있었다.
“스승님, 왜 제게 말씀을 안 해 주셨어요? 스승님께서 바로 황량 선생님이셨던 거예요?”
“하하, 네가 안 물어보지 않았더냐. 그래, 사실은 내가 쑥스러워서 말을 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크겠구나.”
고청운은 고개를 들어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동안 못 봤던 육훤은 피부색이 예전보다 어두워져 있었는데, 햇볕에 많이 타서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야외 활동이 점차 많아지고 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육훤은 할 말이 없었다. 앞서 스승님은 외해에 관한 책을 먼저 찾아보라고 권해 주었다. 그런데 그는 서점에 갔다가 실수로 <출해모험기>를 구입해왔고, 이것이 바로 그 전설적인 화본이라는 것은 모르고 보자마자 황홀경에 빠져서 서신을 써서 스승님에게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때의 스승님은 다른 책을 더 많이 읽으라 했을 뿐, 관련된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제가 오늘 소보에 난 기사를 읽지 않았더라면 스승님의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놀라셨어요.”
“하하, 그저 화본에 불과할 뿐, 화본의 줄거리는 다 허구란다. 지리적 지식은 사실이지만 말이야. 너에게는 다른 정규 학문을 다룬 서적을 더 많이 읽는 게 좋단다.”
고청운이 화단에서 일어서자 옆에 있던 여종 춘분이 대야 가득 물을 가져와 그에게 손을 씻을 물을 마련해 주었다.
손을 깨끗이 닦은 후, 고청운은 육훤과 함께 안채로 가로질러 들어갔다.
* * *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때때로 담장 밖으로부터 어떤 물건들이 던져져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재빨리 그 사이를 지나가자, 주위 하인들은 재빨리 그것들을 주워 잘 쌓아 놓았다.
육훤은 몸이 날렵해 잘 피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무겁고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그래, 이 아이가 이상한 오해를 하기 전에 일을 분명하게 설명해줘야겠다.’
…….
육훤은 고청운이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두 눈을 번쩍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군요!”
그는 말을 하면서 떨어진 향낭을 열어보려고 빠르게 손을 댔는데, 하나를 집자마자 코로 한가득 향기가 전해 들어와 그만 재채기를 참지 못했다.
“뭐가 이렇게 향기롭죠? 향수를 뿌려 둔 걸까요?”
향수는 수입품으로, 조정에서 사람들이 외해와의 무역 통상을 허락한 후부터 경성의 여러 가게에 외국 상품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아직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청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품들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이곳으로 찾아들 것이라고 믿었다.
고청운은 옷깃을 여미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직 아이는 이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육훤은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꺼내 보려 하였으나, 고청운의 엄숙한 얼굴을 보고는 감히 시도해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