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폭로 (1)
“청운아!”
방자명이 그를 불렀다. 이때 영안제는 이미 한림원을 떠났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때때로 고청운을 주시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고청운은 소리가 난 곳을 찾아보았지만 눈만 끔뻑거릴 뿐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자명이 다가와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가며 나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왜 이리 멍하게 있어? 정신 차려. 폐하께서 너를 질책하신 것이 아니야, 아주 좋은 일이라고.”
방금 일어난 일은 고청운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지만, 그에게도 마음속에 뭔가 영광스러운 느낌을 받게 하였다.
‘하하, 청운이의 소설을 폐하께서 봐줄만 했다고 말씀하시다니? 이것은 내 안목이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때 방자명이 자신을 잡고 있는 팔의 힘이 느껴지자, 고청운은 자신의 얼굴을 세게 잡아당겨 정신을 차린 뒤, 머리 위의 관모를 바로잡았다.
두 사람은 겨우 정상적인 걸음걸이를 회복할 수 있었다.
* * *
“고 대인.”
“신지!”
집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고청운은 표정을 꽤 침착하게 다잡고는 일일이 답례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는데, 화제는 모두 그가 집필한 화본에 대한 것들이었다.
영안제가 스스로 자신도 그 화본을 뒤적여보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림원의 나이든 학자들은 틀림없이 고청운을 찾아와 자신의 직업을 망각하고 근무를 태만히 했으며, 그에게 그릇된 길로 빠지지 말라고 뼈저린 충고를 퍼부어 댔을 것이었다.
또한, 일개 위풍당당한 한림원 관리씩이나 되어서 어찌 그런 것을 쓰냐며 너무 한림원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냐며 질책했을 것이 자명했다.
다행히 아까 영안제가 왕림해서 기조를 잡아준 것이었다. 비록 누군가가 질투를 하거나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는 있어도, 지금은 감히 그에게 ‘본분을 망각하고 업무에 제대로 종사하지 않는다.’ 따위의 말은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서 고청운은 그저 본래 화본을 쓰는 것이 자신의 취미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고청운은 지금 영안제에 대한 호감도가 수직 상승하여 거의 만점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대인.”
마주 오고 있는 소추의를 본 고청운과 방자명은 급히 예를 올려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소추의는 방자명을 한 번 보고, 돌려서 고청운을 주시하더니 의미심장한 훈계의 말을 하였다.
“신지, 잘했더구나. 다만 자네는 아직 젊으니, 젊을 때를 잘 활용하여 학문에 더 정진하시게. 본업을 잘 수행해야만 이후에 황제 폐하를 위한 공적을 쌓을 수가 있을 것이네.”
고청운은 정숙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대인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하관은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소추의는 고청운의 공손한 태도를 보고 맘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그가 다 지나가고 난 후에야 고청운과 방자명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사람 참 뻔뻔하기도 하지.”
방자명은 고청운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약간만 움직여서 모기가 우는 소리처럼 가늘고 작게 말했다.
그는 소추의와 고청운 사이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고청운은 마른기침만 할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바로 그가 소추의에게 탄복하는 점이었다. 그때 밀지를 필사하게 시킨 일이 벌어진 후 그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날의 일은 마치 봄바람이 살랑 불었다가 사라진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그가 더 이상 언급하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마주칠 때마다 여전히 화목해 보였는데, 예전과 같이 그는 여전히 온화하고 관대한 윗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하였다.
고청운은 진심으로 그에게 탄복했다.
‘이런 두꺼운 낯짝이라니. 총알도 뚫지 못할 정도로 뻔뻔하지 않은가?’
상대방이 죽을 만큼 밉다고 한들 표면상으로는 때론 반드시 화기애애해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경험들은 모두 고청운이 새로이 배울 필요가 있었다. 스승님이 기존에 아무리 많이 알려주시고 주의를 주셨다고 한들, 실천을 하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테니 말이다.
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와 이야기를 하러 다가왔다.
고청운은 사람들의 속뜻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자신의 자를 불러 친근함을 표했다는 것은, 곧 황제가 자신을 철저히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줬기 때문이었다. 이에 자신이 곧 승진하여 출세가도를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와서 함께 반사 이익을 누려보고자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너무 멀리 나간 것이라며, 자신은 이제 막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한 햇병아리일 뿐이라, 이후로 더 큰 인상을 황제에게 심어주지 못하면 어느 날 곧바로 잊어지게 될 사람일 뿐이라고 간곡히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의 영안제는 일처리에 있어 규칙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모든 관리들이 정해진 체계 속에서 다들 발탁을 기다리고 있는데, 황제의 눈에 엄청나게 잘 든 인재거나 하지 않은 이상 파격적인 인사 발탁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 뭐 기댈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황제에게 화본을 써서 보여드리게 위해 그를 등용시킬 보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황제가 자신의 화본을 들춰본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청운은 이미 매우 놀랐고,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입안의 침까지 다 말라갔을 때, 고청운은 겨우겨우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 문으로 들어서자 담자례가 자신의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그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청운이 자리에 막 앉자마자 40여 세 정도 된 잡역부가 금방 끓인 따끈따끈한 차 한 주전자를 들고 들어와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고 대인, 이 소인에게 하명하실 일은 없으신지요?”
고청운은 속으로 웃었다. 평소에 별다른 일면식도 없는 잡역부가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매번 차 같은 것이 마시고 싶을 때면, 각자가 스스로 탕비실로 가서 사람을 찾아 불러야 했다.
그러나 고청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이미 딱 좋으니. 내가 수고를 끼쳤구나.”
염라대왕을 만나 보기는 쉽지만 변변치 않은 잡귀를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즉, 윗사람은 이해가 빠르지만 아랫사람은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로, 지금의 잡역부가 딱 그러했다.
일전에는 귀찮아할 만한 일인데 자신에게는 먼저 다가와 선뜻 해주겠다고 하다니, 고청운은 갑자기 바뀐 주변 기류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소인이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인 것을요.”
잡역부는 웃어 보이느라 실눈이 되어 있던 눈을 바로 뜨고, 담자례에게도 뜨거운 차를 한잔 따라주고 난 후에 곧바로 몸을 숙여 물러났다.
“고 형,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가까스로 조용해진 방 안에 담자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청운은 순간 멍하게 있었다.
담자례는 정중히 일어서더니, 몸을 굽혀 극진한 공경을 담아 절을 올렸다.
“소생이 일전에는 오해를 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고 형이 은사님 고혈을…… 큼, 어, 다른 수단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고 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깔보았습니다. 지금 고 형은 일침황량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제가 방금 계산을 해 보았는데, 지금 거느리고 계신 사업에서 그간의 원고료만 따져본다고 해도 일반적이지 않을 것 같더군요. 제가 편견에 치우쳐 그간 오해를 했습니다. 제가 오해해 온 것들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고청운은 담자례의 종잡을 수 없이 튀어나온 이 말 한마디에 매우 놀라고 말았다.
어리둥절해진 고청운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일은 이미 몇 년이나 지나서 해결되었는데, 얘는 왜 지금 갑자기 다시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거야?’
“괜찮네, 다 지나간 일일세.”
고청운은 그저 손을 저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급히 몸을 피하려던 고청운은 담자례의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쓰인 것을 쳐다보았다.
좋은 시력 덕택에 그는 담자례의 책상 위 흰 종이에 적힌 내용을 고스란히 알아볼 수가 있었는데, 종이 위에 촘촘하게 적혀 있는 숫자들을 보니 기가 막힐 정도였다.
‘방금 ‘소생이 계산해 본 결과’라고 했지?’
이를 연상해 보고 담자례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 그는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왜 담자례가 이런 얼간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을까?’
웃기는 것이 담자례는 고청운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그의 수입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크게 쓰인 숫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저놈이 무슨 기분으로 어떻게 계산해 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담자례는 고청운의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에 한숨 돌린 듯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이전과 비슷했는데, 당장에 화기애애하게 바뀌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 두 사람은 원래부터가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모두 일치하지가 않는 부류였기에,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도 별로 없었다.
* * *
이날 업무시간 내내 고청운은 시간이 유독 느리게 간다고 느꼈다. 오후 퇴근시간까지 힘겹게 근무시간을 버텨낸 고청운은 퇴근을 위해 방자명과 함께 마구간으로 말을 데리러 갔다가 마구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장수원을 만났다.
세 사람은 함께 말을 타고 어슬렁거리며 큰길을 걸었고, 다른 관료들은 그들 곁을 부단히도 빠르게 지나쳐갔다. 퇴근시간마다 고청운은 지반이 다 울리는 것을 느꼈는데 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일부 부서의 퇴근시간이 서로 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인마가 한데 뒤섞여 길이 매우 막혔을 것이었다.
“신지, 자네는 정말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야. 오늘 만약에 다른 사람이 말해 준 것을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끝까지 자네가 일침황량 선생인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네.”
장수원이 마구간에서 일부러 그를 기다렸던 것은 고청운에게 성토하기 위해서였다.
장수원은 지금까지 감히 고청운의 가명이 일침황량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고청운은 매우 형식적이고 정직한 서생으로, 산술을 좋아하고 늘 성현들이 남긴 경전에 몰두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자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장수원은 비록 화본을 보지는 않았지만, 일전에 경성을 떠들썩하게 휘어잡았던 <매화 반지>에 대해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고는 직접 극장을 찾아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부인이 일침황량의 <장군전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자연히 귀동냥이 되어 아내를 통해 몇 번이나 이야기를 들어 본 그는 이따금씩 경화소보에 나오는 그에 관한 글을 읽으며 진짜 일침황량이 누구인지 추측해 보기까지 했었다.
그는 화본이라는 업계에서의 일침황량의 이름이 우레와 같은 정평이 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방자명의 얼굴에 갑자기 장수원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 녀석은 나까지도 기만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서 뭐에 쓰려고요?”
고청운이 그들 둘 사이에 끼어들어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미리 알릴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정당한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그랬던 것입니다. 좋아요, 제가 이리 사죄하겠습니다. 다음 휴무일에 좋은 자리를 하나 골라보세요. 제가 한턱내겠습니다.”
예전에 고청운은 돈 때문에 화본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쓰면 쓸수록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지금은 특히 독자들의 호응이 있었기에 더욱 기분 좋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과 자신이 쓴 글을 좋아해 주고 있다니, 남들에게 기분 좋은 작품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글을 잘 썼다는 뜻이었다. 이는 그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좋네.”
“그럼 그렇게 정한 겁니다! 형님들, 저 같은 구두쇠에게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에요!”
고청운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장수원은 마음이 뿌듯하였는데, 고청운이 매우 검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고청운은 눈을 뒤집으며 그들이 자신이 얼마나 검소한 사람인지를 떠올려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는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기는 하였다. 그는 불꽃놀이 하는 곳에 간 적도 없었고, 퇴근 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노는 일도 거의 없었다. 장수원의 풍부한 여가 생활에 비하면, 그는 확실히 검소한 편이기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