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봉작
고청운은 3년간 서길사로 근무했지만 서길사는 품계가 없었다. 당연히 이번에 봉작을 요청할 수 있는 차례가 아니었다. 다만 지난달 황궁에서 큰 경사가 있었는데, 황제가 50세가 다 되어 다시 2명의 소황자(小皇子)를 보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만수절(*万寿节: 황제의 생일)을 막 넘긴 직후라,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봉작을 청할 수 있는 요건을 크게 완화해 주었고, 그 덕분에 고청운은 이 기회를 틈타 봉작을 청해 올릴 수 있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니까 그들 경성의 관료들이 제일 기뻐할 때는 황궁에 경사가 생겼을 때인 셈이었다. 황제는 기분이 좋아지면 항상 상을 내려 주었으니 말이다. 비록 그에게 직접 주어지는 상은 없고 대부분 한림원의 장원학사 머리 위에 떨어지는 상들이었지만, 제일 지위가 높은 이의 심정이 좋을 때면 으레 아랫사람들도 좋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들 이와 같았을 것이었다.
“부군, 왜 그러십니까?”
간미는 고청운이 부두를 보고도 미동도 하지 않자 조심스레 묻고는 이어 말했다.
“부두가 예전보다 너무 커진 것 같지 않나요? 이전보다 정말 크고 넓어졌어요.”
고청운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가는 배들도 점점 더 많아지니 부두를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오.”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부두를 보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3년 전보다 사람이 더 많아져 주변이 매우 번화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면 좋은 것이었다. 고청운은 자신이 난세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 * *
배는 이미 멈추었고 조금 한가해진 틈을 찾아 고청운과 간미 두 사람 모두 하선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고삼원은 하선과 관련된 일들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이미 만발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았는데, 짐을 실을 짐차든 뭐든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안배해 놓았던 것이다. 고청운이 소어의 손을 잡고, 간미는 소석의 손만 잡으면 끝이었다.
서로 작별하는 자리에서 왕씨 집안에서는 그들 별장에 고청운네 가족을 초대하고자 따뜻하게 의사를 물어왔으나 고청운은 이를 고사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도 폐를 너무 끼쳤습니다. 덕분에 제가 겪어본 여행 중에서는 단연 제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왕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배를 타고나서 먹고 자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매우 세심하게 배려 받았던 것이다. 상대는 역시 큰 상인다운 면모가 있었다. 장사를 이렇게 크게 벌일 수 있는 데는 뒷심뿐만 아니라, 처세하는 데에도 분명 남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최소한 고청운은 예의 바르게 사사건건 살뜰하게 챙겨주는 점에서 상대방의 진심 어린 친절을 느낄 수 있었다.
왕박(王铂)은 고청운의 진심어린 말을 듣고는 마른 얼굴에 더욱 진실 된 미소가 번졌다. 소개에 의하면, 그는 방자명 외숙부 왕금(王金)과 같은 항렬의 형제였다. 다만 왕금은 왕박에 비해 약간 뚱뚱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왕박은 아주 마른 몸매였는데, 일신상에 책을 가까이 하는 정취가 물씬 풍기는 걸로 보아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한 영향일 것이었다. 단지 그는 공명을 얻지 못하고 장사에 전전했을 뿐이었다.
그의 뒤에는 14~5세가 되어 보이는 아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이의 이목구비는 수려했고 턱에는 수염이 자랄 기미가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때 그 소년은 왕박의 뒤에 똑바로 서서 미소를 지으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으나,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있었다.
이 소년은 바로 왕박의 아들 왕가준(王家骏)이었다. 앞서 고청운은 송죽서재에서 그를 만나 본 적이 있었는데, 잠시 말을 섞은 적도 있던 그 소년이었다. 그때 그가 남긴 글이 꽤 인상적이었지 않았던가.
그들은 배에 오르자마자 마주쳤지만, 그 후 왕가준이 줄곧 몰래 그를 피해 다녔다.
고청운은 소년이 아버지에게 몰래 그 소년이 화본을 보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릴까 봐, 암암리에 자신을 피해 다닌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가 어찌 이런 시시콜콜한 일을 다 떠벌리고 다닐까?’
그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고 대인께서는 너무 예의를 차리시는군요. 나중에 무슨 일이든지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고 소생을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고청운과 왕박의 대화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쨌든 갑판 위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급히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헤어졌다. 고청운은 떠나기 전 왕가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가족을 이끌고 먼저 하선하였다.
* * *
왕박의 뒤에서 고청운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던 왕가준이 궁금해하며 말했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저 고 신지라는 분은 고리타분한 서생 같은 관료 티가 전혀 나질 않는군요. 저번에 함께 배를 탔었던 송씨 가문의 송인이라는 분과는 전혀 다른데요. 그는 고 대인과 달리 우리를 업신여겼었지요.”
그들 집안에도 벼슬을 하고 있는 가족이 있었다. 바로 문중의 적자였는데, 막 지부의 자리에 오른 자로 관직의 품계는 정4품이었다. 이들 부자의 집은 문중에서도 방계에 속했는데, 상적(商籍)을 가지고 있는 터라 아무리 부자여도 늘 그들 집안을 무시하는 문인들이 있었고, 태도가 좋아보였다 한들 자신도 모르게 경멸하는 모습을 간간히 내비치고는 하였다.
왕박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두드리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마다 서로 다 다른 법이지. 이 아비는 남과 북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고 신지와 같은 가난한 농가의 출신 인재들은 출세한 후에 외려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남들보다 더 교만해지거나, 잘난 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모처럼 그와 같이 출세 후에도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을 보았구나. 아마도 방 대인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고청운이 갑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아들을 안아준다거나 하인을 멋대로 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말을 한 후, 그는 바로 아들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리고는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이다, 이 녀석아! 내가 너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더냐! 네가 책을 읽어서 출세를 하지 않고서는 어디에서나 너를 업신여기려는 자들이 있을 게야. 네가 과거 시험으로 출세만 해 봐라, 앞으로 또 누가 너를 무시하겠느냐?
고 대인을 보아라, 너보다 고작 몇 살 많으실 뿐인데 이미 몇 년 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셨다고 하는구나. 12살에 수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너는 어떠하냐? 지금 넌 동생 시험에도 낙방을 했지 않으냐! 그 선생님들께 바친 선물들만 해도 너 같은 녀석들을 몇 명은 먹여 살렸을 텐데! 다음번엔 내가 널 어떻게 혼낼지 한번 보거라.”
이 한마디 말을 하는 동안, 그는 책을 가까이 한 것 같은 서생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아버지, 그러시면 다시는 안 보고 살 거예요!”
왕가준은 말대꾸를 하지 못함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버지가 뭐든 고청운을 예를 들어 말하니 자신이 무슨 핑계를 대던 매를 버는 일이 될 것이었다.
매번 그의 아버지는 젊은 진사를 볼 때마다 샘을 나서 눈이 벌겋게 되었는데, 돌아서서는 또 자신에게 희망을 품으시고는 하였다.
‘아니, 나도 그 기준에 맞춰 드리고는 싶지만, 어떻게 내가 그들과 똑같을 수 있을까? 아버지 역시 젊을 때 수재도 되지 못하시고 상도의 길을 걷게 되신 것이 아닌가? 아버지조차 붙지 못한 수재의 길을 아들도 못 보는 게 정상 아닌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 텐데 말이야.’
분노를 발산한 왕박은 주위에 아무도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아들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
“송인에게는 앞으로 접촉을 적게 해야 되겠더구나. 재능 있는 인재 같기는 하다만, 그는 아직까지 진사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진왕마저 폐위되었으니, 그는 앞으로 운수가 트이려면 진사 시험에 합격하는 길 말고는 별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림짐작해 보아도 별로 전도유망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누가 그렇게 급하게 그 집에 줄을 서고 자기 여식들을 진왕 댁에 들여보냈는지 모르겠다.”
요긴한 공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 쉽게 성공하겠는가? 차라리 그들 왕가처럼 차분하게 스스로 앞가림을 하면서 잘 사는 게 나았다.
* * *
한편, 고청운은 졸려 하는 소어를 안고 마차에 올라탔다. 꼬맹이는 배 안에서만 노는 것이 많이 갑갑했는지 식욕부진이 조금 있었으나 다행히 정성껏 돌본 덕에 병이 나지 않고 뱃멀미조차 하지 않았다. 통통했던 몸만 조금 살이 빠져 홀쭉해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청운은 그게 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여인숙에 객실을 잡은 후, 고삼원이 배표를 예약하러 나서자 남은 사람들은 서둘러 목욕부터 하였다.
배에서 오래 있던 탓에 내려서 걸어도 다리는 육지에 적응하느라 휘청거렸고, 피부도 영 찜찜했다. 뭐 하나 뒤집어쓰고 있는 것 마냥 몸에 비린내도 배서 목욕을 하지 않으면 불편했다.
고청운은 모두가 씻은 후 소어에게 머리와 몸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고 있었다. 마사지를 받아 몸이 편해지자 아기 돼지처럼 끙끙거리는 소어를 보고, 고청운은 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저쪽에서는 간미가 소석의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있었다.
잠시 동안 방 안의 분위기가 매우 화목했다.
“이번에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기뻐하실 것이오. 봉작까지 수여받으셨으니 말이오. 다만 할머니만 봉작을 못 받으셨으니 어쩐지 좀 죄송하다오.”
고청운은 갑자기 이 생각이 나서 간미에게 말했다.
간미가 고개를 돌려 고청운을 바라보니 그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흰 옷 하나만 헐렁하게 걸치고 있는 고청운을 보고, 얼굴이 뜨거워져서 잠을 자고 있는 소석에게 애써 신경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님께서 부군을 탓하진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내가 더 잘하면 예외 조항이 적용될 수는 있는 듯하오.”
보통의 경우는 봉작에 있어 아내와 어머니에 한해서만 수여가 되고, 품계가 3품 이상은 올라가야 할머니에게도 봉작이 수여되었다. 남은 또 하나의 경우는 큰일을 해서 큰 공을 세운 경우 혹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만들 만한 일을 이루어서 할머니의 봉작을 청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고청운이 관련 규정을 뒤져서 찾아낸 것으로, 현재의 그는 아직 그런 것을 이뤄낼 수 없었다. 그의 할머니는 실망했을 것이었다. 며느리에겐 봉작과 훈장이 수여되었지만 시어머니인 자신에게는 수여되지 않았으니, 이런 일로 두 사람 사이에 간극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평소 인품을 생각한 고청운은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