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귀향 (2)
“아버지, 다 외웠어요.”
소석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몇 번을 보아도 그 넓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구나.’
고청운은 창가에 서서 눈으로는 바깥의 바닷새들이 날아다니는 바다를 보고 있다가 소석의 말이 들리자마자 고개를 돌려 맞장구를 쳐주었다.
“맞게 잘 읊었구나. 한 글자도 빼먹지 않았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청운의 말을 들은 소석은 희고 보드라운 볼이 붉어졌고, 깜빡이는 두 눈은 놀라울 정도로 빛이 났다.
그 다음에 고청운은 책 중에서 몇 단락을 골라내어 소석에게 그 뜻을 설명하게 하였다. 이 내용들은 소석이 서당에서 한 번 배웠던 것들로, 고청운은 지금 아이를 도와 복습을 하는 것일 뿐, 아이에게 새로운 내용을 배우게 하려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이번 여정에서 소석을 가르치게 되면서 아들이 자신보다 학문적 자질이 더 뛰어남을 깨닫고 자긍심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도 느껴졌다.
그는 방자명을 떠올렸다. 예전에 두 사람이 부학에서 함께 공부할 때, 같은 공부를 하였는데도 그는 두세 번 보는 것만으로도 전부 외울 수 있었고, 뜻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빨랐다. 심지어 많은 시간을 놀러 다니는데 소모하기까지 했었다. 반대로 자신은 뜻을 먼저 이해하고 열몇 번은 읽어본 다음에야 한 단락씩 외워 나갈 수 있었다.
고청운은 공부하는데 있어 방자명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야만 하였고, 그보다 몇 배나 되는 근면함으로 부족한 재능을 겨우 보충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과거 시험에서, 그의 석차가 방자명보다 순위가 앞섰던 것은 천문학 문항 하나 때문이었다. 만약 방자명이 그 문제를 맞혔다면 자신과 석차가 비슷했거나 오히려 앞섰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아주 작은 실수 하나가 격차를 심하게 벌린 것이었다.
고청운은 지금 와서 자신의 아들을 지켜보니, 아이가 기억력도 좋고 이해력도 좋아 보였다. 고청운은 자신의 사촌 동생들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소석이 학습적인 측면에서는 간미 집안의 유전자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난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우선 이거면 되었다. 아들이 총명한 것이 아무래도 우둔한 것보다 낫지.’
그는 소석의 단점도 발견해 냈는데, 이 아이는 매번 어떤 내용을 배워도 바로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배웠던 내용을 다시 복습하는 일이 매우 적기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도 매우 빠른 편인데, 전반적으로 기억력을 관장하는 능력이 견고하지 못한 것은 모두 어른들이 재촉한 탓이었다.
이번에 귀경한 후에 그는 바로 이런 점을 바로잡으려고 생각하였다.
“아버지, 저는 다 외웠는걸요. 왜 하루건너 한 번씩 되돌아가서 책 내용을 다시 보라는 거예요?”
소석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반문했다.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책을 읽었단다.”
고청운은 품에 안겨 있는 소석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배웠다고 해서 잊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얘야, 너는 자주 복습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내용을 확실히 기억할 수 있겠니? 아니면 이렇게 해보자꾸나. 여기 몇 권의 책 중에서 네 마음대로 내용을 골라 이 아버지에게 문제를 내 시험해 보거라. 아버지는 모두 외우고 있단다.”
여기 있는 이 <삼자경>, <천자문>, <유학경림> 그리고 사서 등등의 책들은 그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버지께 시험 문제를 내요?”
소석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흥분되었다.
‘나도 아버지께 시험 문제를 내볼 수 있다니?’
이에 소석은 고청운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아버지에게 암송을 시킬 부분을 찾아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를 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소석의 부릅뜬 눈이 점점 더 커져갔다. 결국 그 아이는 고청운을 숭배하며 책을 내려놓은 후, 그의 품에 다시 안겨서 외쳤다.
“아버지, 정말 대단하세요!”
“너는 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냐. 나중에 너도 아버지만큼이나 대단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책을 잘 읽어야겠지.”
고청운은 아이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부드럽게 격려했다. 기왕 아들에게 이런 학문적 재능을 발견한 이상, 그는 아들이 공부 쪽으로 발전할 수 있게 도울 것이었다. 아이의 흥미나 취향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직은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나이가 어릴 때에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가 예전에 그렇게 목숨 걸고 열심히 공부한 데에는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만약 자기 혼자만 진사에 합격하고 뒤를 이어 관직에 나가는 후계자가 없게 되면, 그의 집 재산을 이후에 어떻게 보존해서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겠는가?
그는 고대 사회에서는 권력이 있어야만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규율을 알고 있었다.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가 얼마나 큰 재산을 가질 수 있는지를 판가름했다. 만약 쥐고 있는 권력이 없다면 아무리 집안에 금은보화가 넘쳐난다고 한들, 번화가에 돈을 잔뜩 가지고 서 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를 노리겠는가?
그는 고씨 문중을 생각해 보았다. 온 친지들을 다 헤아려 보면 70~80명쯤 될 것이다. 집안에서 가장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인데, 지금 갑자기 그가 세상이라도 하직하게 되고 인척들의 도움까지 없게 된다면, 남들은 그가 경성에 가지고 있는 재산과 가업들을 노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아버지,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책을 열심히 잘 읽을 거예요.”
소석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청운은 매우 밝게 빛나고 있는 아들의 두 눈을 보았다. 하하, 이 꼬맹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지금이야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겠지만, 7, 8년을 기다리면 각종 반항을 할 것이었다. 그때 가서는 자신이 너무 엄격하게 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자신이 지금처럼 이렇게 커보이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고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럴 시기가 도래하려면 아직 멀었으니 아직은 아들의 공경 어린 눈빛을 맘껏 즐겨야겠구나.’
* * *
배는 고향집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에서 보낸 지난 한 달 동안 고청운은 소석과 <삼자경>부터 사서까지 모두 복습하였는데, 특히 사서의 내용을 제일 중히 다루었다. 현재 소석은 아직 일정 단락의 내용을 개괄하여 풀이하는 수준의 경지는 완전히 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소석에게 사서 뒤에 잇달아 배우는 오경은 아직 가르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보통 다른 아이들도 7, 8세는 되어야 사서의 내용을 다 배울 수 있는데, 소석은 이미 또래보다는 진도가 빠른 편이니 조급해할 것 없이 천천히 기초를 닦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었다.
특히 좋은 학습 습관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만약 학습 습관을 잘 들인다면, 나중에 그만큼 공부에 쏟아야 하는 시간도 줄어들게 될 것이었다. 예컨대 그는 장수원이나 방자명 등보다는 가지고 태어난 자질 면에서 못했지만, 스스로 진취적인 야망을 갖고 운명을 바꾸겠다는 각오로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과 공부법을 개발하여, 과거 시험 결과에서도 크게 뒤쳐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청운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탓에 소석의 귀향길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고되었다. 소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놀고 즐기는 동안, 소석은 훨씬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고청운은 어린 소석의 정신적인 면모와 건강 상태도 끝까지 유심히 봐 주었다. 그가 너무 피로하거나 무리하지 않게 조절했고, 잘한 만큼 물건을 사 주며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그 덕에 소석은 배 위에서 공부하면서 보내는 기간이 괴롭기도 했지만 또 즐거운 일도 많았다.
* * *
마침내 군성에 배가 정박 했을 때, 고청운은 낯선 부두를 보고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제 곧 집에 갈 수 있구나!’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조정으로부터 고명(*诰命: 봉건 시대에 부녀에게 봉호를 내림)을 받아 고명부인으로 책봉되었는지도 궁금했다. 그는 자신이 한림원 편수직으로 승진하자마자 책봉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을 기억했다.
동료가 상소문을 올리는 것을 그도 직접 보았다.
고대에는 ‘부인의 영광은 남편과 아들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이 있었다. 봉처음자(*封妻荫子: 공신의 처는 봉전(封典)을 받고, 자손은 대대로 관직을 세습 받다. 즉 고위 고관의 몸을 가르키는 말)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하 왕조에서는 문관으로 말하자면 관료의 가족들 역시 남편 관직의 품계에 따라서 신분의 높고 낮음이 정해져 봉작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품 고관의 부인에게는 1품부인(一品夫人)이라는 직위가 하사되었고, 2품에는 부인(夫人), 3품은 숙인(淑人), 4품은 공손인(封恭人), 5품은 의인(宜人), 6품은 안인(安人), 7품은 유인(孺人)에 봉해졌다. 8품 이하의 사람은 그냥 마님(*太太: 아내, 마님, 댁)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 1품에서 4품 관리의 처에게는 고명을 수여하고, 5품에서 7품 관리의 처에게는 칙명을 내린다고 하여 그 둘을 따로 구분하였다.
이들이 바로 ‘외명부(外命妇)’에 속하는 부인들로, 그 반대로 황궁에 있는 비빈들은 ‘내명부(内命妇)’에 속하였다.
현재 고청운은 정7품 관리이니, 간미와 소진씨에게 유인(孺人)직에 봉해지도록 상소를 요청하였다. 소진씨는 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같이 봉작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후에 다른 사람들은 공식 석상에서 그녀를 ‘태유인(太孺人)’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며, 간미는 ‘유인(孺人)’으로 불리게 될 것이었다.
명부는 모두 증서가 발급되는 절차가 있었다. 이부에서 취급하는 일이었는데, 증빙서류상에 글을 기재하는 일 역시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봉작을 수여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한림원의 편수 몇몇이 문장을 쓰는 일을 돕게 되었다.
품계가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죽어서도 품계에 따라 빈소와 발인 의장 등이 정해졌는데, 이 모든 것은 함부로 참월(*僭越: 순서를 지키지 아니하고 차례를 뛰어넘음)해서는 아니 되었다.
고청운은 이 세계에서 산 지 여러 해가 되어 가면서, 참월에 대한 죄를 엄히 다스리는 것을 몇 번인가 보게 되었다.
관료 역시 품계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봉작에 있어 일정 조건을 요구하였다. 그 최소한의 요구란, 관료가 해당 관직을 최소한 1년을 수임해야 하며 부정부패 등 비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해당 관료의 어머니와 아내는 봉작을 받을 수 없었다.
이 밖에 봉작을 받을 여성들 또한 반드시 중매인을 통한 정식 혼사를 거행한 이들이어야 하며, 양호한 집안의 출신이여야 한다는 등의 자격조건을 갖춰야 했다.
규정은 이러하나 통상적으로는 관료가 직접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설령 치적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일정 기한만 채우면 모두 봉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조정이 우호적인 인심을 조성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너무 엄격하게 통제하여 규칙을 운용하지는 않았다.
특히 이렇게 관료들에게 봉작이 내려져도 조정에서 소비하는 돈은 많지 않았다. 조정에는 부인들이 남편 녹봉의 3분의 1을 받는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고청운의 연봉이 36냥이라면 간미와 소진씨 역시 매년 12냥씩의 녹봉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이는 기타 녹봉 외 가봉 등의 돈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조정이 져야 하는 부담도 크게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