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미래
육훤은 고청운의 첫 번째, 진정한 의미의 제자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일전에 아이의 인성과 잘못된 습관을 다잡아 주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었는가. 고청운은 정말 심혈을 기울였었다.
특히 몇 년간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아서 그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정 간의 교류도 덩달아 이뤄졌기에, 육훤의 자신에 대한 존경과 의존도를 느낀 고청운도 육훤을 각별히 좋아하게 되어 늘 지켜보게 되었다.
이미 자신이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던 육훤은 고청운의 집을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스스로에게 진정하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고청운의 품에 안기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절로 나 버렸다.
“스승님, 저는 늘 스승님이 그리웠습니다.”
두 사람이 서글픈 감상에 젖어 있었을 때 즈음,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그들의 재회를 방해하였다.
고청운과 육훤이 고개를 돌리자, 소어가 문어귀에 붙어선 채 새카만 눈을 빛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어는 바로 옆집의 방택에서 충분히 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꼬맹이 녀석이 육훤을 바라보는 눈초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 아이는 황급히 손발을 놀려 높은 문턱을 넘어오더니, 짧기만 한 두 다리와 두 팔을 휘청대며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요 꼬맹이의 걸음이 한없이 느리기만 했는데 오늘 보니 이렇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역사는 항상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반복된다며, 고청운은 탄식했다. 그는 2년 전에는 소석이 육훤을 안아 주지 말라며 으르렁댔던 일을 떠올렸다.
‘영량이가 많이 자라서 이제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세상에나 이번에는 소어가 똑같이 굴 줄이야.’
홧김에 아버지를 꽉 끌어안고 있는 소어를 보며, 고청운은 다시금 은근한 한숨을 쉬며 육훤에게 말했다.
“이런, 여기는 소어라고 한단다. 소석이의 남동생이지. 내가 서신에서 말했던 녀석이란다. 소석이는 소보 형아 기억하지?”
마지막의 말 한마디는 수줍음을 타는 큰아들에게 한 말이었다. 소어는 얼굴 한가득 적의를, 소석은 얼굴 한가득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석은 익숙한 듯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생각을 좀 해보고는 생각나는 바가 있어 다급히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읍하였다.
“소보 형님.”
육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예를 갖추어 답례를 하며 “그래!” 하고 말했다.
“소석이는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기억 안 날 수가 있나요? 소보 형님과 저희는 계속 서신을 주고받았잖아요.”
소석의 얼굴에 기쁨의 웃음이 나타났다. 그의 놀이교구 중 일부는 육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고청운은 옆에서 이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상당히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육훤은 소석을 보고, 다시 스승님을 쳐다보았다.
“스승님, 제 기억으로는 소석이도 예전에 똑같이 했던 것 같은데요. 하하, 소어랑 소석이는 생긴 것도 정말 서로 많이 닮았네요.”
고청운은 소어의 매끈한 볼을 문지르며 웃으며 말했다.
“그 이유는 두 녀석 다 나를 닮았기 때문이지. 남자형제 둘이서 늘 함께 어울리다보니, 성향도 서로 비슷해지는 것 같더구나.”
소어는 아주 즐거워하며 고청운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고청운의 큰 손을 잡고 놀다말고 육훤을 한번 노려보다가, 고청운을 한번 보고 갑자기 꺄르륵 웃으며 통통한 얼굴 가득 득의양양한 빛을 띠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포옹하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소석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소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 동생의 표정 좀 보세요…….”
소석은 아버지가 방금 언급한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2년 전 너도 그랬단다.”
육훤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웃으며 마저 말했다.
“그때 표정이 더 의기양양했었는걸.”
심지어 육훤이 야유하는 표정을 지어보이기까지 하니, 소석은 깜짝 놀랐다.
순간 작은 얼굴이 붉어진 소석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매만지며 헤헤 웃었다.
어렸을 적 일을 다 기억하기에 소석은 너무 어렸다. 그는 4살 이후의 일은 대부분 대략적으로 기억할 수 있기는 했는데, 간간히 고향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하였다. 아버지가 자신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등을 잊어버릴까 봐 집에서 틈날 때마다 고향에 갔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 주셨기에, 그 이야기들을 줄줄 외운 것도 있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당초 귀경했을 때 숯 같이 변모했던 이야기로 늘 놀려댔었다.
육훤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육훤이 워낙 급히 들른 것이기에 고청운은 소석에게 소어를 데리고 후원으로 물러가게 하였다. 소어가 있으면 아무래도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소어는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일단 고청운이 얼굴빛을 어둡게 하자,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형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밖으로 따라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소어는 계속해서 아쉬운 지 밖으로 나가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보았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고청운은 그런 아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꼬맹이는 애교를 휘두르는 능력이 소석과 똑같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애교를 더없이 능숙하게 사용해서 늘 사람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고는 했지만,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육택이 귀경하여 복직한 직책이 어떤 직급인지 따로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황제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더 높은 직위가 따로 내정되어 있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고청운은 육훤의 학습 현황과 생활 방면에 관한 일을 두루 물었다.
“스승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월성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제게 승마와 말을 타고 활을 제대로 쏘는 법을 알려주시고는 하였습니다.”
육훤은 고청운 옆에 앉아 자신의 그간 생활을 천천히 이야기해 나갔다. 생각이 나는 대로 대화를 이어가느라 간간히 말의 순서가 뒤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고청운은 천천히 듣고 있다가 말고, 육훤이 눈썹을 펄쩍 요동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육훤이 한 말을 토대로 추론해 본 결과, 고청운은 그 집안에 새로운 막내아들이 태어난 후로는 육택의 주의력이 온통 육훤에게만 쏠려 있던 예전과는 다르게 약간은 분산되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래도 육훤이 장남이기에 아직까지는 그를 제일 신경 써 주고 있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육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그들 가족은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화기애애하게 자애로운 어머니와 효성 지극한 아들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육훤이 무심코 입 밖에 내비친 말 속을 들여다보니, 그는 동생과 함께 있을 때마다 아버지가 그쪽 가족들에 속해서 그 세 명만이 단란한 가족 같이 느껴지고 자신은 따로 떨어진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육훤은 예전보다 훨씬 명랑했고, 성미도 강인해졌기에 금세 화제를 돌려 고청운이 다른 위로를 해주거나 감정적인 중재를 해 보일 필요가 없게 행동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청운은 육훤이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여겼다. 평상심을 유지하여, 질투로 인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고 이대로 지내면 되었다. 필경 육훤은 몇 년 만 더 자라면 장성하여 장가를 가게 될 것이고, 처를 맞이하고 아들을 낳아 후계를 보게 될 테니 그간의 수많은 혼란 끝에 좋은 결말을 맺게 될 것이었다.
“사실 동생은 좋아요. 걷는 모양도 아장아장 뒤뚱거리는 게 꼭 작은 오리 새끼 같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사랑스럽기까지 해요.”
육훤은 고청운의 귓가에 대고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도 제가 동생에게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으세요.”
그는 월성에서 다른 어린 벗들과 교제하면서, 본처가 나은 자식과 계모가 낳은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매우 대범하게 군다고는 하나, 매번 주위의 많은 무리들은 긴장한 채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동생이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그러는 것인지, 아님 다른 연유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매번 연출되는 그런 장면들이 매우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소석과 소어가 함께 지내는 것을 보니, 가지 않으려 버티는 소어를 형인 소석이 손바닥을 때려가며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표정을 보니 스승님은 이 같은 행위를 보시고서도 못 본 체하고 있었다.
심지어 소어도 울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형의 뒤를 쫒아 나섰다.
고청운은 육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를 담아 말했다.
“그건 잘된 일이구나. 네 정신과 체력은 학업에 기울여야 한단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신경을 기울이지 말거라.”
그는 이 뒤에 덧붙이고자 했던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육훤이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 헤헤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안심하세요. 제가 어디 그리 아둔한 사람입니까? 아버지가 계실 때만 동생에게 더 잘해 주는 거예요. 어차피 동생한테 잘해 줄 것이긴 하지만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들은 그렇게 상경하면서 만나온 사람들과 사건들 이야기들을 하다가, 뒤이어 미래의 발전 향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고청운은 현재 천하가 태평한 시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무장한 무사들이 육지에서 설 자리가 많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스승님, 수상에서 활용 가능한 능력을 키우라는 말씀이신가요? 앞으로는 수군 쪽이 조금 더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이시군요?”
육훤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는 죄다 기마궁술이니 하는 것들인데…….”
고청운은 웃으며 읊조렸다.
“폐하께서는 아주 현명하시지. 요 근래 육지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영토는 이미 각기 다른 나라들이 점유 하고 있는 실정이야. 초원의 북쪽이니 서쪽 오랑캐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으냐. 내 생각이지만 폐하께서 이제 바다를 향해 눈을 돌리시어 발전을 도모하실 것 같구나. 물론 이건 그냥 내 예측일 뿐이니, 아주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단다. 네가 집으로 돌아가 나리께 의중을 여쭈어보렴.”
그도 자신의 의견이 어느 정도는 허무맹랑하게 생각되었다. 육훤의 미래의 발전 방향은 자신이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요즘 들어 발간되는 관보의 내용으로 보나, 주변에 들리는 다른 관리들의 의논 주제로 보나 아마도 황제가 암암리에 사람을 조직해서 바다로 출정할 것 같았다. 비단과 도자기, 찻잎, 포목 등의 특상품을 넉넉하게 갖추고 바다 밖으로 나가 외부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요즘 한림관들 중 몇몇은 명령을 받아 고서가 보관되어 있는 서재 창고에서 종일 고서 더미 속에 남겨져 있는 전 왕조의 출항 기록을 뒤지고 있었다. 이에 전후 사정을 대입해 보고 이런 저런 생각을 엮어 황제의 의중을 알아챈 것인데, 스승님에게 물었더니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청운은 그동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의 중국은 이민족이 통치하는 시대도 아니었고, 쇄국정책도 시행하지 않았으며, 변강 쪽에도 큰 우환 거리가 될 만한 일은 없었다. 또한, 조정에 이렇게도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 출항이 의도에만 부합해 주어 재미를 볼 수 있다면 평행시공에서 일어났던 3백 년 후의 치욕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그간 봐온 책들을 통해 추산해 본 결과, 자신이 현재 속해 있는 공간의 연대는 전생에서의 청나라 초기에 해당되었다. 서구 영국의 제1차 산업대혁명은 18세기 60년대에나 시작되니,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는 지금, 그들의 하 왕조가 서구의 발전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연대별로 제대로 잘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전생에서 받은 교육 덕이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었던 어린 시절,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역사적 시기 등 그 모든 것을 다 적어서 기록해 두었다.
육훤은 이 바다라는 이야기에 귀경 때 탔던 배를 떠올리며 눈이 번쩍 빛났다. 만약 자신이 그런 커다란 배를 진두지휘한다면 얼마나 위풍당당하겠는가. 특히 그 깊이가 이루 비할 데 없는 그 해양이라는 미지의 세계라니…….
그는 돌아오는 길에 탔던 배 위에서 아주 커다란 해양 생물을 목격하였는데, 선장의 말로는 이 생물은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이 없으며, 간혹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기까지 한다고 하였다.
방금 고청운에게 이 일을 말해 주니, 고청운은 그 생물의 이름이 ‘돌고래’라고 알려 주었다.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육훤은 얼른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아버지께서 수군 쪽의 고위 군관들과도 친분이 있으실까? 집으로 돌아가서 바다에 관한 서적들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