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오랜만의 재회
“잘한다-! 최고다!”
이때 공연장의 특별관람석 밖으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소리가 들려왔고, 귀청이 터질 듯한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에 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공연이 끝난 건가?”
고청운은 주변이 시끄러워서 소리를 아주 크게 높여 말해야만 겨우 말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오늘 그들이 보고 있던 공연은 바로 고청운의 작품을 각색한 <매화 반지>란 희곡이었다. <매화 반지> 공연은 상연되자마자 온 경성을 휘어잡았는데, 만약 사장정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특별석은 고사하고 일반 좌석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번이 두 번째 관람이었다. 이미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번 극단의 연출이 대단히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소 연극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원작자라 이야기에 더 몰입되어 그랬을 수도 있었다.
고청운은 곁에서 다른 관중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한껏 흥분해 있는 소석을 바라보았는데, 이 녀석이 연극을 제대로 이해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 끝났군.”
이미 몇 차례나 봐왔는지 횟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던 사장정은 하도 많이 본 덕에 연극수순에 대해서는 아주 훤히 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전과 은자, 향낭이나 선물이 들어있는 주머니 등을 무대 위로 던지고 있었다. 신분 있는 사람들은 몸종을 시켜 직접 상을 내리기도 했는데, 고청운은 문득 자신이 원작 사용료를 너무 적게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 시대의 규범이 그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엔 원작 사용료 같은 개념이 약하여 받을 수 있는 비용도 적었는데, 그나마 원작 사용료라고 받아 챙길 수 있었던 은자도 실은 사장정이 최선을 다해 쟁취한 결과였다.
* * *
연극을 보고 나와 보니 이미 정오가 다 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극장 옆에 위치한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하기로 하였다. 고청운은 사장정과 함께 출판과 관련된 일을 마무리하자, 한시름 놓였는지 밥맛이 좋았다.
“자네는 언제 새 화본을 쓸 계획인가? 소재는 좀 찾았는가?”
사장정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고청운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그들이 밥을 배불리 먹은 것 같자, 주점의 점원이 차를 가져왔다.
고청운은 소석의 빵빵하게 볼록 솟아오른 배를 만져 보았다가 아이의 코를 건드리며 넌지시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배불리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아. 6~7할 정도만 배부르게 먹는 것이 좋단다.”
소석은 헤헤 웃으며 아버지의 품에 안겨 머리를 묻고는 어리광을 피며 말했다.
“아버지, 기억할게요.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오늘 나온 식사가 입맛에 잘 맞았는지, 소석은 실수로 평소보다 좀 많이 먹어버렸다.
고청운은 아들의 아랫배를 잠시 문질러 주고 난 뒤, 그제야 사장정의 말에 대답했다.
“아직 적당한 소재를 찾지 못해서 잠시 미뤄야겠네. 또 다음 달이면 귀향길에 오르는데 왕복에만 3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될 텐데, 지금 집필을 시작했다가 귀향길에서 어찌 하라고 그러는 겐가.”
사장정은 방자명과 같이 노상 빨리 글을 시작하라며 자신을 재촉해댔다.
사장정은 고청운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머리를 푹 숙인 채 의기소침해졌다. 온몸이 나른하니 힘이 쭉 빠진 모양새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에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거늘. 지금 막 물이 올랐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건만.’
사실 고청운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영감은 받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다음번에도 역시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구상하고 있었는데, 이 쪽 방면의 이야기 진행이 더 순조롭게 잘 써졌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항주에 위치한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풍경을 언급하다가 백 낭자와 허선의 전설에 대한 영감이 문득 떠올랐었다. (*白娘子和许仙: 중국의 4대 민간 전설 중 하나로, 여러 해 동안 수행을 쌓아온 두 뱀 요괴 백소정(白素贞)과 소청(小青)이 항주의 서호를 방문해 봄비가 내리자 젊은 서생인 허선(许仙)에게 우산을 빌리게 되었다가 인연이 되어 허선과 백소정은 부부가 된다. 후일 법해라는 승려에게 뱀 요괴라는 것이 들통이 나서 기슭의 뇌봉탑에 갇혔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천년에 얽힌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다.)
그의 조사 결과, 백소정과 허선이라는 민간 전설에 대해 항주에 사는 사람들은 꽤 많이 들어봤으나, 화본 등으로 엮은 적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전생의 기억은 거의 다 잊은 지 오래였다고는 하나 드라마 <신백낭자전기(*중국의 백소정 허선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36부작 드라마)>에 대한 기억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글을 쓰려니 쉽지 않아, 현지인 몇 명을 더 만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만 할 것 같았다.
이것은 그의 초기 계획에 불과했다. 언제고 집필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 가서 자세한 상황을 다시 고민해 볼 요량이었다.
사실 이런 요괴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소재는 이미 많은 문인들의 손을 거쳤었다. 고청운이 더 잘 쓴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시도는 해 볼 만 하였다. 그가 집필한 <장군전기>만 해도 이야기 속에 그가 원문과 다른 형식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중 잘 인용했던, 그리움에 대한 십계라던가 하는 내용은 사람들이 기존의 고전적인 시 짓는 형식을 좋아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소수의 사람들에게 거론이 되고 있었다.
또한, 간미가 쓴 시 몇 편도 현재 일세를 풍미하는 중이었는데, 요즈음 간미는 뭇 모임에 나갔다가 매번 크게 기뻐하며 돌아왔다. 그때마다 이따금 고청운은 의기소침해지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간미가 지은 시가 무엇보다도 향간의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는 자신이 쓴 그리움의 십계만 해도 원래 전생의 기억에 기대어 그 당시의 서식을 따라 어렵사리 완성한 시라서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내려준 운명을 따르지 못하는 것인가 싶었다.
고청운은 예전에야 조금 가볍게 후속작을 시작하는 것이 괜찮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일침황량’이라는 필명의 명성이 높아졌기에 다음 화본은 좀 더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워 집필할 생각이었다.
만약 후속작의 질이 떨어진다면, 고청운이라는 자기 자신의 진짜 이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이 필명에는 분명 해가 갈 것이었다.
그 후, 고청운은 사장정과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 소석에게 장난감을 사 주려던 사장정의 행동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 그래, 그렇지. 우리 량가아는 이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가 아니겠구나. 이미 글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그럼 내가 나중에 책을 사 주어야겠네.”
사장정은 문득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아이는 문인의 자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맞지. 역시 이런 집안은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기도 하고, 또 열심히도 시킬 테니 말이다.’
고청운은 곁눈질로 그를 흘겨보았다.
‘아들이 비록 이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6살짜리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는 그런 것을 딱히 반대하지 않는 주의라, 공부 때문에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집에 있는 간미와 방인소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생각하니 순간 두통이 밀려왔다.
이전에는 소석을 응석받이로 키웠던 방인소는 소석이 어린 나이지만 글공부를 시작한 이후로는 엄해졌다. 특히 요즘 들어 더욱 심해졌는데, 소석이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자 더욱 매섭게 학습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소석은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인소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 방인소는 글씨 연습을 촛불을 켜야 할 정도로 밤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시켰다. 고청운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너무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면 몸이나 눈이라도 상할까 봐, 방인소와 이 일을 의논했다. 아이에게 너무 많은 공부를 시켜서는 안 된다며, 꼭 어른처럼 야간에 불을 밝히고 시간외 근무를 하듯이 공부를 시켜야 하냐고 말이다.
고청운은 아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밤샘하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이 소석이 학문적 기초를 닦을 때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에 후일 아들이 공부하기 싫다고 울며 버티면, 그때 가서 상황을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을 것이었다.
다행히 방인소도 상황을 자각하고는 그의 관점에 충분히 동의해 주었고, 고청운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번에 그가 소석을 데리고 나온 것도 실은 아이의 긴장을 풀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라는 뜻도 있었다.
사장정과 헤어진 후, 고청운과 소석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소만, 이렇게 세 명은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며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저녁 무렵에야 귀가했다.
소석은 선명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가 기쁨에 차서 내지르는 고함 소리를 들으니 고청운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 * *
5월 초가 되면, 조시가 끝나서 20명의 서길사들이 새로이 부임할 것이었다. 육훤 일가도 마침내 월성에서부터 귀경하였다.
요 며칠 간은 업무가 매우 바쁠 것이 분명했기에, 고청운은 지금 당장이라도 육훤을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쨌든 그의 서신은 전달하였으니, 상대방도 시간이 나면 자신을 만나줄 것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 고청운이 생각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육훤이 직접 자신을 만나러 찾아온 것이었다. 육훤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로, 고청운이 막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후부의 세자가 방문을 한 것이니, 정말 귀한 분이 집안에 왕림하신 것이 아닌가. 하여 고청운과 간미는 당연히 손님을 맞으러 나갔고, 고삼원을 옆집으로 보내 아들들에게도 어서 인사하러 건너오라고 불렀다.
모두들 서로 절을 하여 예를 갖추고 나자, 간미는 자신이 함께 머물러 있으면 육훤이 불편해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후원으로 바로 돌아갔다.
육훤의 수행원들도 정방의 응접실로 물러났다.
“소보야!”
계속해서 연락을 유지해 오고 있던 터라, 오래 만나보지 못했음에도 고청운과 육훤은 서로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의 재회가 너무나도 기쁠 뿐이었다.
고청운은 육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제 10살을 갓 넘긴 나이의 육훤은 키가 10살의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훌쩍 커져 있었다. 내성적인 면모도 엿보였지만, 인사를 하고 들어 올린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고 눈도 웃느라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많이 자랐구나, 키도 많이 컸어!”
육훤의 어깨를 힘껏 두드리던 고청운은 단단한 아이의 뼈가 만져지자, 미간을 찌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살이 좀 빠졌는데, 제대로 잘 먹고 있는 것이냐?”
그는 어릴 때 육훤이 음식을 많이 가려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였다.
“스승님.”
육훤이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저는 언제쯤 스승님만큼 커질까요? 이 정도면 지금도 키가 큰 편이기는 하지요?”
웃으며 말하는 육훤의 눈에 안광이 반짝였다.
고청운이 하하 웃었다. 육훤의 키야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좀 큰 편이기는 하지만, 육훤은 장수 가문의 용감하고 건장한 후예가 아닌가. 어려서부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 왔고, 아버지인 육택의 키도 큰 편이니, 육훤도 더 자라면 분명 그 정도로는 클 것이었다.
“너는 분명 크게 자랄 게다.”
고청운은 육훤을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