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파문
“미아,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이 정말 좋소.”
고청운은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진한 입맞춤을 남기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시를 어떻게 썼는지 한 번 봐 봅시다.”
최근에 고청운은 직속상관의 생일 연회가 있었기에, 직접 시 한 수를 지어 보내야 했다.
“아빠, 엄마, 소어도 뽀뽀해 주세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소어가 큰 눈을 반짝이며 소리를 지르고는 얼른 일어나 다가왔다.
고청운은 할 말이 없었다. 매번 이랬던 것이다. 어렵사리 혼자 있고 싶어도 아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워댔다.
“량가아, 소어를 서재로 데리고 나가서, 옆집에 계신 외증조할아버지께 보내 주고 오겠니?”
고청운이 분부했다. 큰아들이 오랫동안 책을 보고 있었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도 좋았다.
소석은 고개를 들어 이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고개를 숙인 채 책을 읽으며 말했다.
“저,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어요.”
고청운은 정색을 하면서도 억지로 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간미와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두말없이 걸어가 아들들에게 뽀뽀를 해 주었다.
소어도 더 이상 조르지 않았다. 그는 뽀뽀를 좋아해서 걸핏하면 다른 사람의 얼굴에 뽀뽀를 하며 항상 사람의 뺨에 자신의 침을 남겼다. 소석이 이리 다 자란 후로는 고청운과 간미도 그에게 포옹을 해 주는 일이 드물어졌고, 뽀뽀 같은 건 더 횟수가 적어졌다.
그래서 이번에 그들이 이렇게 느닷없이 뽀뽀를 해 주자, 꼬맹이는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며 수줍어하더니 곧바로 소어를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고청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가 앞장서는 가운데 가족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뽀뽀해 주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지만, 감정발달에는 도움이 되었다.
* * *
화본의 일은 고청운이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었다.
원래 사장정은 그동안 은신하며 연극 각색에 몰두해 오고 있었다. 희극적인 결말을 만들려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고청운은 자기의 생각을 그에게 말하였는데, 그가 정말로 연극 구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연극 대본을 쓰다니!’
결국 연극의 결말은 행복한 결말로 각색되었고, 화본의 결말만이 비극으로 남겨졌다.
사장정과 안락공주가 그 일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다 올해 황후의 천추연에서 뜻밖에도 친히 사장정이 여주인공 역인 완아로, 안락공주는 남주인공을 섭문 역을 맡아 <매화 반지>를 연출하고 매우 생동감 있게 연기하였다. 이는 연극을 즐겨보는 황후를 아주 기쁘게 만들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황후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들이 매우 효심어린 공연을 헌정했다고 생각했다.
태후가 사석에서 두 사람의 연극을 헐뜯고 꼬투리를 잡아 황실에 망신을 주었다고 했는데도 황후의 기분은 변치 않았다.
황후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황제도 덩달아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사장정 부부는 큰 상을 하사받았고, 고청운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매화 반지>가 처음으로 경성에서 공연되었을 땐 경성 지역 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두 일침황량의 동의하에 각색된 연극이 시연된다는 소문을 들은 독자들은 작가가 결말을 고친 것으로 해석하고 매우 기뻐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자신의 부탁과 간곡한 요청이 일침황량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믿었다.
독자들은 이 희극적인 결말로 인해 그간의 마음고생을 덜고, 또 작품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대신 극장을 찾아와 객석을 꽉 채우는 등 열심히 일을 했다.
특히 황후도 이 연극을 즐겨본다는 소문이 돌자 더 많은 군중들이 무수히 몰렸다. 경성의 각 극단은 계속해서 각종 수단을 써서 고청운의 허가를 얻어 연극을 하고자 했는데, 사장정이 진행을 도와 고청운에게는 특별한 수입이 추가로 들어온 계기가 되어 그를 다시 한번 기쁘게 하였다.
일이 원만히 해결되자 고청운은 그동안 한동안 즐기지 못했던 산책도 나가고 밖의 바람을 쐬었다. 물론 곧 출간될 산술 서적도 화본만큼 인기를 끌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스스로도 역시 화본과 산술 서적은 분야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는 새로 집필한 이 산술 서적이 남을 돕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봐 주기만 해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청운이 산술 서적을 저술한 가장 큰 목적은 아들 소석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후일 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교재로 삼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다만 사장정의 도움을 받아 산술 서적을 인쇄하여 출판을 하는 것까지는 성공할 수 있다고 해도, 현재 자신의 인지도가 높지 않았기에 손해가 날까 걱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후 여러모로 좋지 않을 것이었다.
실은 고청운은 스스로 자비를 부담해서라도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명성을 위해 스스럼없이 자비를 써서라도 책을 출간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저술한 서적이 있는 문인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일반적인 문인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에 여러모로 고민해 본 결과, 고청운은 일단 사장정을 통해 정식 출판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기로 하였다. 그는 우선 책을 베껴 써 주는 사람을 찾아 필사본을 어느 정도 제작해 본 뒤, 만약 책이 잘 팔리면 그때 다시 정식으로 인쇄 작업을 거쳐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 * *
“산술 서적의 경우 60~70쪽으로 구성이 되어 있지? 그럼 책을 인쇄하는 비용을 좀 봐 볼까. 푸른빛이 도는 백지를 사용하고, 종려나무 자재도 추가하고, 습포를 붙여 표지도 처리해 주어야 하는데, 거기에 먹 값, 표구사에게는 인건비도 줘야 하니 이런 책 한 권을 간행하는 데에 보통 16냥의 은자가 필요할 걸세. 발행 부수가 많아질수록 원가는 낮아지지. 게다가 이런 학술 서적은 화본을 제작하는 것보다는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네. 종이를 최소한 중등에서 상등품 이상의 제품으로 사용해야 하니 말이야. 또한 제작 과정에서 불량품이 나와도 안 되는 법이네.”
고청운은 지금 사장정과 극장에서 만나 출판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장정이 천천히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해 보였다. 그도 그 원리가 이해가 갔던 것이다. 발행 부수가 많을수록 책의 원가는 낮아졌는데, 그의 화본을 예로 들면 판매량이 만 부는 되어야 비로소 정가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었다. 판매량이 뻔히 보이는 산술 서적은 판매량이 거기에 미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고청운은 자신이 활자 인쇄술을 익히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전생에 이쪽 방면의 지식을 조금이라도 익혀 두었더라면 현대의 인쇄술 혁명의 혜택을 받아 조금은 싸게 책을 출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정식으로 인쇄를 하시게. 정식으로 제작한 책과 손으로 베낀 책은 다르다네.”
사장정은 한사코 그에게 출판을 종용하면서 말했다.
“내 명의로 된 작업장이 있는데, 밖에 가서 다른 사람을 찾는 것보다 훨씬 싸고 편리할 것이네. 이렇게 좋은 조건을 두고 뭘 주저하는 겐가? 제작하는데 고작 이 정도의 비용은 많은 편이 아닐세.”
사장정은 고청운이 학문 쪽으로도 인지도나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화본이라는 것은 결국 곁에 작게 난 지름길 같은 것이었다. 화본 덕에 아무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들, 문인들이 쓴 시집이나 경전에 주석을 달아 놓은 경주문집 같은 서적들로 성공하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얼마 전 일도 그랬다. 황후가 일침황량의 정체가 도대체 누구인지 물어온 적이 있었으나, 사장정은 혹시라도 고청운에게 민폐를 끼치는 상황이 오게 될까 봐 사실을 고하지 못했었다.
산술 서적은 시집이나 경주문집보다는 못하지만, 요즘에는 과거 시험에도 산술 과목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전보다 학문적 위상이 높아진 정통 학문 서적에 속하였다.
고청운은 그와 오랫동안 벗으로 사귀어 왔기에 당연히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정식 출간을 권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그간 예기치 못했던 수입인 연극 극본 값으로 벌어들인 은자만 2백 냥이 넘었다. 이것은 의외의 기쁨이었다.
‘그래, 그간의 수입도 있잖아. 내가 화본을 집필하기 시작했던 것은 생활고에서 탈피하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래, 그럼 정식으로 출판을 해 보겠네. 500부를 간행하세. 내게는 50부를 주고 나머지는 자네가 상황을 보아 해결해 주겠나?”
고청운과 사장정은 이를 악물고 원가를 잘 셈하여 따져보았는데, 100냥 정도에 간행이 가능할 듯했다. 고청운은 이 정도 돈은 지출할 여력이 되었다.
“서점에 비치해 놓고 팔면, 분명히 팔려 나갈 것이네. 경성에는 문인이 많으니 말이야. 게다가 자네의 산술 서적은 원시를 준비하는 응시생을 겨냥한 것이 아닌가. 수재에 합격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서적이라면 분명히 사들일 걸세. 한 부당 몇백 문의 가격밖에 되지 않으니 기꺼이 사갈 것이네.”
사장정은 크게 기뻐해 주었다. 그는 이미 부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친한 벗이자 생명의 은인의 능력이 출중한 덕에 덩달아 빛을 보게 될 터였다.
사장정이 직접 사귄 호족과 친구들은 모두 다 권문세가의 부잣집 도련님들이었는데, 이들은 오직 은음에만 의지하여 벼슬에 나가니 크게 출세할 방도가 없었다. 고청운과 같은 정식 진사 출신은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었기에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해 올라갈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미 한림관이 되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훨씬 더 전도유망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사장정은 부마의 신분이었기에, 어지간한 일로 고청운에게 부탁을 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친한 벗이 출중하여 출세를 하게 되면, 공주 앞에서 체면이 크게 서게 되었다! 허리도 더 곧게 펼 수 있고, 공주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부군의 벗들 때문에 체면을 구긴다.’ 라는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자, 사장정은 하하 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편, 고청운은 자신의 지갑이 또다시 쪼그라들자 속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는데, 사장정 이 녀석이 눈앞에서 헤벌쭉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남들 몰래 눈을 치켜떴다.
이 작자는 일전에 돈이 별로 없었을 때는 100냥 남짓한 은자도 많다고 여겼으면서, 지금은 일순 부마로 급부상하여 100냥이 넘는 은자 정도는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재력이 굉장해졌다.
“얘야, 해바라기 씨를 너무 많이 먹지는 말거라. 그러다 열 오를라.”
고청운은 연극을 보면서 해바라기 씨를 까서 먹고 있는 소석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오늘 사장정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던 고청운은 문을 나서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발각되어 버렸다. 두 아이는 집에 틀어박혀 지낸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기에, 함께 나가서 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고청운은 어쩔 수 없이 소어는 아직 너무 어리니, 큰아들만 데리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스승님이 소어를 데리고 나가 놀아주기로 하였다. 그 약속이라도 없었다면, 소어는 고청운의 다리에 아직까지도 죽자고 매달려 있었을 것이었다.
소석은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앞에 놓인 탁자 위에 해바라기 씨 껍데기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순간 그는 작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아버지를 보고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들은 이만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앞에 있던 해바라기 씨 접시를 사장정 앞으로 내밀었다.
“이 장정 숙부가 있으니 걱정 말고, 뭘 먹고 싶든지 말만 하려무나!”
사장정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내 그는 종과 연결된 끈을 잡아당겨 종업원을 불렀으나, 고청운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간식 몇 접시만 겨우 더 주문할 수 있었다.
고청운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디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이던가? 무엇 하나 대충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바깥 음식을 먹을 때는 주의할 것이 더욱 많았는데, 아이들이 많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면 아이에게 적당량 이상을 초과하여 주지 않도록 더 신경을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