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분노한 사람들
고청운은 소년이 자신과 말을 섞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옆으로 소년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1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으로, 얼굴은 여려보였으나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턱에는 눈에 띄는 거뭇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끔씩 들추어 보는 정도긴 하네만.”
고청운은 조용히 한마디를 되뇌고 계속해서 방명록을 뒤적거리다가, 안의 기재된 내용들이라고는 대동소이하고 대부분이 위협적인 말들인 것을 보고는 탄식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위험했다. 이 독자들은 기분이 너무 격동되어 있어, 정말 충동적으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염려될 지경이었다. 고청운은 그저 그들이 입씨름만 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걸 끝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인, 관료도 화본을 다 보십니까? 하하, 알고 보니 황량 선생님은 역시 최고인 듯합니다. 돌아가서 아버지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면, 아버지께서도 분명히 저를 더 말리지 않으실 거예요. 관료 나리들도 다 보시는 것인데, 왜 저만 볼 수 없다고 하시는 걸까요? 아버지께서는 늘 남을 욕하시는데, 아버지 자신도 몰래 훔쳐보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소년은 실눈이 되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즐거워했다.
고청운은 소년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아직 관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소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이 화본을 볼 수 있는 건 이미 진사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지. 네 아버지는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으셔도 되니 보셔도 될 것이고, 너는 아직 합격하지 못했으니 아직은 안 되지 않겠나. 사실 가끔 심심할 때 들춰보고는 있지만, 독서의 본말이 전도돼선 안 되는 법일세.”
소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입을 실쭉거리며 심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진사 출신의 관료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반박할 수 없이 인사하고는 시무룩해져서 문을 나섰다.
그의 집 하인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고청운을 한 번 보고는 도련님을 급히 따라갔다.
고청운은 언짢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입꼬리를 살짝 치켜들었다.
고청운은 방금 방명록을 집어 들고 글을 뒤적거리다가 소년이 적어둔 글귀를 보게 되었다.
그 아이는 ‘황량 선생님, 제가 <장군전기>를 보니 거의 결말부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극적인 결말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의 감흥을 해친다면 선생님께도 좋지 않을 거예요. 한 단락정도 내용을 더 덧붙여 섭문과 완아를 환생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라고 적었다.
행서체로 쓰인 그 글은 고청운도 최근 1년간 연습한 글씨체였다. 글쓴이의 필법이 앳되긴 했지만, 문장력도 뛰어난 것이 분명 명사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이 소년은 분명 문인일 것이었다. 또한, 그는 뜻밖에도 이 방법을 생각해서 스스로 독자의 화를 진정시키는 법을 가르쳐줄 정도로 이성이 있는 소년이었다.
고청운은 아까 소년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방명록에 그저 악담이나 써 갈겼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 어떤 사람들은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명록에 그의 조상을 포함한 열여덟 대를 저주하는 등 엄청난 내용들을 적어두기도 했던 것이다.
그중 일부는 진짜 독자들이었지만, 어떤 이는 경쟁사에서 찾아와 물을 흐려 놓은 것이라고 사장정은 추측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일침황량’이라는 간판을 달아둔 방명록이라도 자신들이 부셔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아까 그 소년의 이름을 알 수가 없어 꽤 실망했다. 방명록을 자세히 보니 그 아이가 이름은 남겼으나 못 알아보게 써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아이가 제시한 건의는 그래도 합리성이 있었다. 비록 그도 진작 이런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은 다만 그의 머릿속을 우연히 스쳐지나가듯 휙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고청운은 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 * *
4월 15일은 또 3년에 한 번 있는 회시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아침부터 하겸죽은 일어나 있었고, 온 사람들이 모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원래 휴가를 얻어 함께 성적을 기다리려 했지만, 하겸죽이 고사했다. 하겸죽은 자신이 여기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폐를 끼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청운에게 다시 휴가를 받으라고 하는 것도 그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더구나 고청운은 갓 승진한 터라 휴가를 내기가 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고청운은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고 하겸죽의 이런 면모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일 하겸죽이 겸손만 부리고 실상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휴가를 내어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너무 큰 압력을 줄 뻔 했을 것이 아닌가?
고청운은 권법을 몇 차례 수련하고 몸을 움직인 후 하겸죽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1월에 그가 경성에 온 후, 고청운은 집에서 그와 함께 아침 식사를 먹었고, 간미는 가끔씩만 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녀는 집에서 먹는 것보다는 더 자주 방택에서 식사를 하였던 것이다.
“청운이, 나는 이따가 하씨 아저씨랑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갈 예정이네.”
하겸죽은 죽 한 사발을 먹고 나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고청운은 그의 까만 눈 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현장으로 직접 가는 것이 성적을 좀 일찍 알 수 있을 거예요.”
하겸죽도 진사에 합격해 다들 경성에 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밥을 먹고 난 후, 고청운은 후원에 돌아가 일찍 일어나있던 간미와 몇 마디를 나눴다. 그는 아들들이 자신의 침상에서 쌕쌕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소석이를 조금 더 일찍 깨워주셔야 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고청운은 학당에서 축국 경기가 있어서, 소석에게 어젯밤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자고 약속했던 것이다.
꼬마는 봄소풍을 다녀온 후부터 축국을 좋아하게 되었다. 집 안 면적이야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고청운은 소석 틈틈이 연습할 곳을 찾아 주었다. 한편, 소어는 형이 자신을 무시하고 미끄럼틀을 함께 타주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이 쌓였는지, 어젯밤에 또 울며불며 고청운에게 하소연하였다. 하필 소석의 이유도 매우 정당하여 고청운이라는 심판을 꽤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휴, 집안에 기력이 왕성한 사내아이 둘이 있다 보니 참 고민하게 만드는구나. 우리의 다음 아이는 순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네.’
이때 간미는 부자 사이의 일을 듣더니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아들이 뒤늦게 그들과 이름에 대해 정중히 상의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났다.
아들의 당시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둥글둥글한 작은 몸, 볼록한 볼과 까만 눈동자에 정색을 담아 이야기를 건네는 통에 부군과 한참이나 웃었다.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을 테니, 안심하렴.”
고청운은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자기 체면을 차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특히 큰아들과 벌써 이런 상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이 진지한 아이의 의견을 따라주기로 동의하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경성 사람들의 관례를 따라 소석의 본명인 고영량(顾永良)에서 마지막 한 글자를 따와서 이제부터는 소석을 ‘량가아(良哥儿)’라고 불러주기로 약조하였다.
* * *
간미의 볼에 뽀뽀를 하고 뺨을 붉히는데 성공한 고청운은 기분 좋게 말을 타고 출근했다.
그는 요즘 방인소와 함께 출근길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는 젊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방인소답지는 않았지만, 그는 관가의 노인이라 너무 늦지만 않으면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도착해도 되었다.
이날 한림원에서는 물망에 올랐던 후보를 놓고 합격자 발표를 했는데, 고청운이 한참 동안 방청을 했음에도 하겸죽이라는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사실 방자명과 자기들이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겸죽이라는 이름을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올해는 한미한 집안 출신의 합격자가 또 얼마나 될지 모르겠네.’
고청운은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있다가 점심시간 무렵에야 겨우 진사 합격자 명단을 받았다.
‘없구나, 없어!’
고청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리 훑어보아도 하겸죽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또 시험에 떨어진 것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방자명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 둘의 운에 비하면 하겸죽의 운은 너무 크게 떨어졌다. 그의 평소 활달한 성격을 생각한 고청운과 방자명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친한 벗은 낙방했다고 해서 하늘을 탓하고 죽음을 자초하는 짓을 벌이는 것은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하겸죽이 낙담한 심정에서 약간 되살아나자, 고청운은 그에게 경성에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진사인 그와 방자명이 있으니, 이 이상 좋은 교육적 여건도 없었다.
학문을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은 학식을 더욱 발전시키는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 하겸죽은 현재 그림도 배우고 있어 남들과 더 많은 대화와 교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겸죽은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경성에 더 남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고향에서 나와 있었으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뿐이었다.
결국 고청운은 더 권유할 방법이 없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고청운은 그에게 그저 서신이나 여러 통 더 보낸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은 하겸죽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는 일을 도우며 그저 섭섭하게 그를 다시 떠나보냈다.
* * *
하겸죽을 고향으로 보내고 나니 잠시나마 떠들썩했던 집안이 또다시 조용해졌다. 며칠간 잠잠하던 터에 5월 1일 이번 화본의 마지막 책 판매가 시작되었다.
고청운은 고삼원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는 정말이지 아연실색하였는데, 지금 송죽서재의 문 앞에 썩은 달걀과 썩은 야채 잎이 던져져 한가득 쌓여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독자들이 방명록에 말만 남길 뿐 무슨 행동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정말로 이런 행동을 실행에 옮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까지 과장되어 몰입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야? 그냥 심심풀이로 즐기는 화본이 아니었던가.’
“이제 우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들은 지금도 서재를 둘러싸고 떠들고 있어요. 서재는 문을 닫았고, 부마는 이틀 전부터 공주와 놀러 다니고나 있으니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고삼원은 문제의 화본이 고청운의 작품이라는 것이 알려질까 봐 급히 서둘러 말했다. 만약 누군가 사실을 알고 찾아오면 어떡하지? 이 집에는 가솔이 겨우 몇 명밖에 없어서, 분노한 사람들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완곡하게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쓰시지 말라고 다들 그렇게 말렸는데, 지금은 다 끝났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분노하고 말았어요. 숙부께서 모두의 감정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고삼원이 원망 섞인 말을 꺼냈다. 실은 열렬한 독자였던 그도 사석에서는 여러 차례 비극적인 결말만은 피해 달라고 애원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고청운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고삼원을 위로하며 말했다.
“비극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 후부터는 원고 제출할 때마다 매번 조심 또 조심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쓴 것임을 짐작하지 못할 게야.”
사장정이 연기력을 섞어 더욱더 짙은 연막탄을 설치해 두었기에, 다들 지금 일침황량이 중년 사내에 초라한 수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도유망한 젊은 진사 나리가 작가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