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31)화 (231/504)

231화. 두려움

“신지, 자네 이리 좀 와 보게.”

그날, 소추의는 궁에서 돌아오자마자 고청운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대인.”

고청운이 들어와 물었다.

“무슨 분부라도 있으신지요? 제가 무엇을 필사하면 될까요?”

“오늘 아침 본관은 자네가 타고 온 말을 보았네. 아주 좋은 말이더군. 은자로 몇 냥이나 되는가?”

고청운은 그가 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매우 이상했다. 어쨌든 그는 이미 말을 타고 출근한 지 상당히 오래되어서 처음 본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군대에 있다가 퇴출된 말이어서 소생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고청운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소추의의 배경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한림원이라는 곳은 돈이 돌지 않는 기관이라 별다른 재미를 볼 수 있는 직무가 없었다. 심지어 소추의는 가난한 집안 출신임에도 기루에서 소일하기를 좋아했기에, 첩 서너 명에 가족 수십 명, 직계와 서자를 모두 포함하면 집안에 아이가 10명이나 되어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고청운은 소추의가 타고 다니는 말을 본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볼품이 없었다. 아마도 그의 것보다는 몇 배나 싼 그런 말일 것이었다.

이 시대에서는 말이 현대의 승용차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사내들끼리는 몰고 다니는 말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였고, 좋은 말을 만나면 모두들 부러워했다. 고청운은 자신의 말이 겨우 중등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왜 갑자기 주제가 이런 곳으로 빠지게 된 것인지, 지금 소추의의 질문은 무슨 뜻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 몰랐다.

소추의는 그냥 물어본 것인 듯 다른 대화를 이어갔다.

“자네의 해서 솜씨가 요즘 많이 늘었다지? 본관이 듣자하니, 수사관의 임 대학사가 너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군.”

“하하, 그건 임 대인께서 소생을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임 대인께서 가르침을 몇 수 주신 덕에 글씨가 겨우 좀 늘었을 뿐입니다.”

고청운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무던하게 웃었다.

임 대인은 역사서 편찬에 참여하는 대학사 중 한 사람으로 서예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고청운은 수사관에서 허드렛일을 할 때 늘 그를 도와주었었다. 차를 따라주고 책상을 닦는 것부터 하여간 그의 몸이 지나는 곳이면 다 살뜰히 돌 본 덕에 결국 임 대인으로부터 서예에 대한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확실히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고청운은 자신의 서예 실력이 청년 세대에서는 으뜸이나, 남과 함께 나란히 서 보니 임 대인의 수준이야말로 본 왕조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너무 겸손해할 것 없네. 자, 이것이 방금 폐하께서 초안을 잡아주신 밀조라네. 자네가 지금 막 서예 쪽으로 성취를 거두고 있으니, 이번에는 자네가 작성을 해 보시게. 본관이 곁에서 봐 주겠네.”

소추의가 상냥하게 굴었다.

‘조서를 쓰라고?’ 

솔직히 말해서 고청운은 순간적으로 설레었다. 자신의 글씨 솜씨를 황제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한림원에 들어간 지 어언 7~8개월, 몇 차례 이곳에 들어와 보았음에도 그는 단 한 번도 황제와 말을 해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어차피 조서 작성도 그의 업무의 일부로 직책을 따르는 행위 내에 속해서 할 수 있었다. 그는 전에 방자명하고 이야기할 때, 잠 시강이 방자명에게 조서를 한 번 써보라고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연습을 해 봐야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붓을 든 고청운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소추의의 첫마디를 따라 쓰려다가 깜짝 놀랐다.

“대인, 이것은 밀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고청운은 그가 입에 담은 두 글자를 떠올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분명히 ‘밀조’라고 말했었다.

‘시작부터 좀 이상한데, 너무 애매하잖아…….’

황제의 밀조는 국가 기밀이었다. 먼저 황제의 인가가 있어야 작성이 가능한데, 보통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아서는 아니 되었다. 설령 고청운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추의는 무표정한 얼굴로 붓까지 내려놓은 고청운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본관이 그만 그것을 실수로 잊었구나. 그럼 먼저 나가보시게.”

“예,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청운은 몸을 숙여 뒤로 물러났는데, 이때 소추의의 웃음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더 이상 상냥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다는 말이 진정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었다. 

‘신중을 기하지 않고 조서를 써 내려갔더라면, 날 기다린 건 무엇이었을까?’

고청운이 자신의 필적을 남겨가며 그가 부른 내용을 따라 적었더라면, 황제의 승인 없이 밀서를 작성했더라면, 그것은 밀서 유출에 해당되는 죄목이 될 터였다. 소추의에게는 무슨 죄목이 돌아갈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확신한 것은 자신이 유죄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율법을 익히 숙지하고 있던 고청운은 밀지 누설죄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목임을 알고 있었다.

이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고청운은 자신의 등이 흠뻑 젖었고 두 발이 아직도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짧은 거리를 오는 동안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다니!

‘소 대인은 왜 갑자기 이런 함정을 파서 나에게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퇴근한 후, 고청운은 집에 돌아와서 방인소에게 이 일을 말했지만, 그도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두 사람은 앞뒤 위아래로 곰곰이 따져 보았으나,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고청운은 자신이 어찌해도 소추의의 미움을 산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매번 꼬박꼬박 챙겨주며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왔다.

이 일에 대해 지금 소추의에게 뭐라고 따지거나 언급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이미 자신이 실수한 것이라고 얼버무렸던 것이다. 고청운은 그의 심보가 음흉하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고청운은 궁금한 것이 생겨도 좀처럼 소추의에게 묻지 않고, 사사로이 방자명과 장수원에게 물어 궁금증을 해결하면서도 소추의에 대한 경계를 늘려 만반의 상황에 대비 하였다. 

* * *

그때 이후, 소추의는 평소대로 지도를 하고 그에게 일을 명하였고, 두 사람은 애써 태평한 상태인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다만 소추의는 자신이 작성하던 문서를 일부 가져와서 고청운에게 다시 필사하게 시켰는데, 한 번은 연속해서 5, 6천자의 문장을 필사하게 시키는 바람에 고청운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필사에 매달려 손목이 다 붓고 나서야 통과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야 고청운은 자신을 시켜 쓰게 한 그 글이 한시가 급해 당장 꼭 써야 했던 문장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수법은 너무나도 은밀하여, 다른 사람들은 고청운이 소추의의 요구에 맞지 않게 베껴서 오래 글을 붙잡고 있었다고 여길 뿐, 소추의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한동안 소추의의 계속된 꼼수에 고청운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고청운은 한 번 황제의 하문에 답을 한 일이 있었는데, 모두들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틀리지 않고 정확히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소추의마저 이때 잠시 수그러졌다.

다만 그때 얻은 교훈은 그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두려운 것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소추의의 의중에 넘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쩐지 스승님께서 관직 생활이란 독사가 모인 곳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시더니, 범인(凡人)이 아니면 내가 범(犯)하도록 함정이 수두룩하게 놓여 있는 곳이었어.’ 

그 일 이후로 고청운은 사람됨이 더욱 신중해졌다.

* * *

이때 방자명이 이 사건을 다시 기억 밖으로 꺼내니, 고청운은 조금 불쾌해졌다.

“휴가 내는 일은 잘 성사되었어?”

방자명은 그의 아픈 곳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서길사 발표만 끝나면, 고향집에 돌아 갈 수 있을 듯합니다.”

고청운은 이번 귀향길에는 방자명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모두 한림원에 있었기에, 휴가를 얻어 다녀올 때는 돌아가며 정해진 순번을 지켜야 했다.

“그래, 못 갈 이유도 없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방자명은 주위에서 아무도 그들을 주의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의 결정을 존중해. 화본의 결말이 네 선택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청운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요 며칠 동안 왜 자꾸 나를 괴롭혔던 거지?’

“흠, 복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게 누가 나에게 그리 오래 숨기라 했나.”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방자명이 가볍게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나한테는 아무래도 좋지만, 부마께는 큰일이잖아. 만약 그가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다면 조심해야 할 거야. 참, 당분간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면서 다음 화본을 준비하는 것이 살 길일 거야.”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고청운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화본은 단지 저의 취미일 뿐이고, 한림원 편수야말로 저의 본직입니다. 새로운 화본은 아직 적당한 주제를 찾지 못해 쓰지 않을 예정이고요.”

방자명은 그 말을 듣고 매우 실망한 듯 꽤 낙담한 채 말했다.

“그럼 언제 다시 쓰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니?”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영감이 아직 떠오르지 않은 것을요. 자, 당당한 대 하 왕조의 관원으로서 방 형의 관심사는 이것이 아니어야 할 겁니다.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지요.” 

고청운이 방자명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방자명과 함께 지내는 게 이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감수성이 더 민감한 방자명은 한림원 울타리 안에서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휘저으며 다른 부처 사람들과도 금세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이때 고청운의 말을 들은 방자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난 더 강요하지 않을게. 하여간 요즘 해야 할 일이 많긴 하니까 말이야.”

어차피 중은 절에서 도망갈 수 없는 법이었다. 

‘청운이만 곁에 남아 있으면 되지. 그 다음에는 내가 제일 먼저 화본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방자명은 다른 사람들이 아직 최신 내용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은 내용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강렬한 자만심이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하하, 생각만 해도 좋군.’

방자명은 그렇게 될 때까지 만족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청운이 더 압박을 느끼지 않도록 더 이상 그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 * *

방자명과 작별을 고하고 고청운은 자신의 새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번에 그는 다른 사람과 단 한 칸의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한림원 편수직은 정해진 정원이 없어 매년 많게 늘어나기도, 적게 들어오기도 해서 현재는 16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집무실을 사용하는 자는 공교롭게도 담자례였다.

고청운은 상대방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방이 크지 않아 두 사람은 절반가량 공간을 나눠 가졌는데, 고청운이 들어섰을 때 담자례는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묵묵히 일하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