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소란
간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당신도 참. 이 아이와 몇 살 차이도 안 나시는 분이 이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언사를 하시다니요.”
“아니, 그래도 일단 우리는 촌수가 다르니 말이오.”
고청운은 하하 웃었다. 풍겨오는 죽의 향이 갈수록 더 진해진 것을 보니 다 익은 모양이었다. 고청운이 화로 안을 들여다보니, 팥, 표고버섯, 갓 따온 산나물, 절임육 등이 들어있었다.
‘어째 좋은 향이 솔솔 풍긴다 했네.’
고청운은 아들들을 바삐 먹였다.
두 꼬맹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서로 손을 맞잡고 집중해서 언덕 위의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그네를 타기도, 혹은 연날리기, 줄다리기, 닭싸움 등을 하고 있었는데, 짙푸른 잔디가 평평하니 빼곡히 깔려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가 특별히 손질해 놓은 것 같았다.
현재 푸른 옷과 흰 옷을 입은 소년들이 편을 갈라 축국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는 광경이 꼭 천혜의 축국장을 방불케 하였다.
“아버지, 저도 축국을 하고 싶어요.”
소석은 아쉬운 듯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하고 싶어도 아버지가 허락지 않을 테니 그저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돌아가면 축국공을 하나 사자꾸나. 먼저 연습을 좀 해 보고 다시 벗들과 함께 경기를 해보아라.”
그의 작은 몸을 보고 살이 좀 찐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고청운은 소석이 운동을 좀 더 많이 하면 살이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통통해서 귀엽다고는 하지만, 만일 나중에 커서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사전에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그들은 색안경을 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아들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성장환경을 조성해 주었는데, 비만이 이를 망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 * *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잠깐 쉬기 위해서 고청운은 천으로 사방을 둘러쌌다. 둘러싼 안쪽에는 노란 야생화가 무성히 자라 있었기에 벌레를 쫒는 웅황분을 뿌리고 나서 네 식구는 담요를 깔고 잠을 청했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고청운은 소석을 끌어안았는데 매우 편안했다.
‘이것이 진정한 답청이지. 앞으로 매년 날씨만 좋으면 몇 번이고 와야겠다.’
고청운은 푸른 하늘의 흰 구름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트이고 머릿속이 정리가 잘 되자 오후 내내 화본의 뒷이야기들을 거의 다 구상해냈다.
고청운 일행은 이날 야유회 자리에서 마음껏 노는 동안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아쉬워도 운하 변을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 * *
집으로 돌아온 고청운은 산관 고시의 결과를 기다리면서 얻게 된 모처럼의 여가 기간을 활용하여 화본의 결말을 포함한 10만 자를 모두 다 탈고해냈다.
그날 아침, 그는 고삼원을 불러 준비된 모든 원고를 한꺼번에 다 사장정에게 넘기라고 시켰다.
이제 곧 황제의 교지가 내려올 텐데, 지방이나 다른 부서에 배치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 부임한 직위의 업무가 바쁘면 더 이상 화본을 쓸 시간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2년 넘게 연재해 오고 있었으니, 이제 완결을 낼 때도 되었다.
고청운은 자기가 일으킨 연재에 관련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였다. 예전에는 작가들이 그와 같이 한 달에 한 번씩 나누어 글을 연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보통은 한 번에 원고를 모두 다 작성하고 나서 몽땅 필사를 하여 출판에 돌입했는데, 이때까지는 오직 고청운만이 여러 분기로 나누어 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청운이 그렇게 연재를 하고 난 후로 다른 유명 작가들은 고청운처럼 여러 번에 나누어 연재를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발표하였고, 오직 아직 무명에 머무르고 있는 이름 없는 작가들이나 한꺼번에 일회성으로 탈고하여 작품을 발표하는 기류를 형성하였다.
이날 오후, 고청운은 자신이 완성한 산술 서적을 검토하고 있었다. 서당에서 막 돌아온 소석은 서재 한 구석에서 이 책으로 산술 공부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다시 자세히 책을 검토해 보았음에도 아무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산술 서적은 출판할 수 있을 것 같네.’
원래 그는 좀 더 나중에 책을 편찬하려 했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쓰인 책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이 일을 좀 더 앞당긴 것이었다.
‘전 왕조의 황제는 타임 슬립자인 것 같은데 왜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음, 아마도 이 숫자들을 알게 된 내력을 충분히 설명할 길이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
고청운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차근차근 천천히 준비를 해서 우선은 산술 학계에서 이름을 좀 떨치고 난 뒤 다시 계획을 보강하기로 하였다.
그가 원고를 막 다 정리하고 나자, 바로 곡우가 들어왔다. 부마 나리가 찾아오셨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고청운은 조금 놀랐다.
‘이제 곧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다니?’
이곳 사람들은 보통 오전에만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관습이 있었다.
‘화본에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건가?’
그는 산술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소석을 한번 보고 앞마당으로 나섰다.
* * *
서재 입구에 막 도착하자, 고청운은 갑자기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조금 겁이 났다.
‘그만두자. 그가 뭐가 그리 두렵다고.’
사장정의 꽃 같기만 한 외모를 떠올리니, 고청운은 몸싸움이 나더라도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고청운은 한 번 헛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알린 후 발걸음을 무겁게 내딛었다.
“장정이, 날 찾아왔는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고청운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사장정은 지금도 원고를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고청운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만에 달려 나와 고청운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찌 날 이리 괴롭힐 수가 있는가!”
사장정은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말은 마친 사장정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천천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청운은 깜짝 놀랐다. 사장정이 이 늦은 시간에 방문을 해야만 했던 연유에 대해 사전에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해 보기는 했지만, 그가 이런 행동까지 보일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었다!
“장정이, 사람 놀리지 마시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고청운이 사장정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이 눈물이 가짜 눈물은 아닌 듯했다.
“어째서 내 충고를 들어주지 않았는가? 아! 진즉 이렇게 끝날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작품의 결말을 어떻게 이런 비극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비극일 수가! 이 화본을 비극으로 끝낼 수는 없네! 흑흑, 자네가 이 결말을 고쳐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독자들이 날 찢어발길 걸세!”
사장정은 울면서 고청운의 옷의 넓은 소매를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눈물을 닦아댔다. 고청운은 이런 사장정의 모습에 미안하기도 하고 또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기도 하였다.
“자네, 이렇게 어린아이 같이 굴지 말게. 우리 모두 이제 어엿한 아버지가 아닌가. 자네 집의 몇 개월 밖에 안 된 여자아이보다 더 울어서야 쓰겠나. 진정하시게. 그리고 내 옷소매에 이런 이상한 것들을 묻히지 말게!”
고청운은 힘껏 자기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오늘 왜 하필 헐렁거리는 소매의 옷을 입어가지고서는.’
“흑흑, 진작부터 내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네. 그전부터 이런 예감이 들었지. 그래도 난 요행을 바랐었다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무자비하지는 않을 줄 알았어……. 청운이, 자네는 정말 독한 사람일세! 나의 빙 낭자를 이렇게 죽여 버리다니! 흑흑…….”
사장정은 고청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었다. 그가 경극을 하던 공력을 이용해 울어 대는 통에 고청운은 닭살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고청운이 “흥.” 소리를 냈다.
“자네, 대화는 하지 않고 울기만 할 것이라면 나는 이만 나가보겠네!”
사장정은 고청운이 하는 행동을 보니 진짜 나가버릴 기세이자, 내키지 않았지만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울음을 멈추었다.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던 그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분노해서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 줄 아는가? 이건 우리 집 공주께서 때리신 거네! 흥, 감히 결말을 바꾸지 못하겠다고 하니, 내가 자네 집에 묵으면서 떼를 쓰고 버티는 수밖에!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네!”
당초 사장정은 공주가 심심하다고 하기에 화본을 추천했지만, 이제 와서 후회가 되었다. 그가 화본을 추천하고 나서 공주는 바로 여기에 빠져들었는데, 이 책이 자신의 수입과 관련된 것을 알고 나서는 더욱 다른 사람에게 추천을 하였다. 사장정은 한 번의 실수가 천추의 한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고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장정은 집에서 지내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특히 매번 발간된 새 책을 다 본 후 그녀가 늘 다음 내용을 더 빨리 찾아오라고 재촉해댔던 것이었다.
하늘만은 그가 어디로 찾아갈지 알고 있었겠지. 사장정은 고청운의 앞에서 아무리 좋은 말로 책의 뒷부분을 빨리 써 달라며 부탁해 봤지만, 고청운은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고청운은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매번 공주의 재촉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패하여 빈손으로 돌아갈수록 꼬집힌 상처만 그의 등허리에 늘어갈 뿐이었다. 사장정은 그간 붙잡고 밖으로 표출하지 못했던 쓰라린 눈물을 더 이상은 참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수고를 누가 알겠는가?
“내가 자네를 구해 주고는 싶으나, 이룰 수 없는 일이네.”
고청운이 한마디를 건넸다.
그는 자신을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사장정을 보았지만, 그래도 결심을 굳히고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비극이라고 진작 말해 주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결말을 다 썼네. 고치지 않을 걸세, 절대로 고치지 않을 게야. 죽는 한이 있어도 고치지 않을 것이야.”
“다른 건 더 언급하지 않겠네. 우리가 벌어들인 은전, 그 은전만 가지고 논해보잔 말일세. 생각해 보시게. 이번 화본으로 인해 얼마나 벌어들였는가? 듣자니 대흥현에 또 20묘의 땅을 사들였다지? 이 이야기가 비극인 줄 알았더라면 독자들이 달갑게 이 화본에 이런 돈을 썼겠느냐는 말이네.”
사장정은 고심을 거듭하는 모양새였다.
고청운은 그저 묵연해졌다. 이번 화본은 현재까지 고청운에게 600냥이라는 은자를 벌어다 주었다. 이 중 300냥으로는 새로 지어진 서원 근처 땅을 매입하여 마침 새 집을 지으려 준비하던 참이었다.
현 황제는 날이 갈수록 교육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올해 초 성지를 내려 교외에 서원 두 곳을 세운다고 했는데, 몽동(蒙童), 동생(童生), 수재(秀才) 등 여러 과정의 학생을 모집한다고 하였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성격이 아니라 그곳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품계 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대중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큰 파란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중 한 서원은 여성들을 입학하게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서원의 명의도 황후로 되어 있었다.
고청운은 여인이 이제는 서원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듣고는 그만큼 사회적 분위기가 개방되어 있다는 증거를 보는 것 같아 내심 기뻤다.
다만 이 조치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황제에게 성지를 거두어달라는 상소가 쇄도했고, 지금 조정은 이 일로 한창 소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