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원념(怨念) (2)
“그러게 말이에요. 황량 선생이 쓴 이 화본은 굴곡이 심해서 보고 난 후에는 숨이 턱턱 막힐 때도 있고 속이 쓰리고 마음이 허할 때도 있어요. 어쩔 때는 잠도 잘 못 이룰 지경이죠. 매번 발간된 것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이, 당장 결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니까요. 슬프게도 만일 그들 둘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저는 어찌 해야 하죠? 황량 선생은 어찌 그렇게 꼭꼭 숨어 있답니까.”
“아휴, 공주 전하께서 비호해 주고 계시니 우리가 황량 선생을 찾을 방도는 없어요. 그런 것만 아니라면 어디 잡아다 두고 계속해서 글을 써내라고 시켰을 텐데 말이에요.”
또 누군가가 탄식했다.
“아 글쎄, 저도 제가 이런 소소한 화본이란 것 때문에 이렇게 휘둘릴 지 몰랐어요. 황량 선생이 정말로 글을 잘 쓰지 않았어요? 화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이 아주 복잡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 쓴 화본과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다른 화본에는 그저 악인 아니면 착한 사람들 밖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어디 나쁘지 않고 못되지 않은 사람이 존재할 수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요. 심지어 저는 그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상식도 적지가 않아요. 아시다시피 엊그제 충용(忠勇)후부의 댁 먼 친척 어린아이가 물에 빠졌지 않았겠어요? 다들 예전 방법으로만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보려고 하니, 그 아이 어머니는 울다가 기절할 뻔했었어요. 그때 아이 형이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화본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던 인공호흡법을 시도해 보더니, 진짜 그 아이를 살려냈지 뭐예요.”
“정말? 그게 사실이었어요? 저도 듣기는 들었는데, 하인들이 함부로 날조해서 말하고 다니는 유언비어인 줄 알았어요. 근데 뜻밖에도 그게 사실이었다니! 그나저나 인공호흡이 나오는 대목이 4권이었지요?”
“맞아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바로 4권에서 빙완아(*冯婉儿: 고청운의 새 화본, 장군전기의 여주인공)가 물에 빠졌을 때, 섭문(聂文)이 이 방법으로 그녀를 살려준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섭문은 바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왜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혹시 그 사람을 살리는 동작이라는 것이…… 히히.”
“정말 못되었다니까. 말도 안 섞어줄 줄 알아요! 그나저나 작가 선생님이 글을 참 함축적으로 잘 쓰시기는 하셨네요.”
…….
천천히 말소리들로부터 멀어지자 고청운은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로부터 알게 된 정보에 정말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 화본에 적힌 내용이 어떤 사람을 도와줄 수 있었다니, 정말이지 그가 쓴 글이 매우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동생을 살린 그 형을 생각하던 고청운은 그 독자의 진중한 독서 습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비록 그가 세 번이나 살려낸 경과를 세밀히 서술했다고는 하나, 그가 묘사된 대로 제대로 배워서 거의 죽을 뻔한 동생을 기사회생시킨 것이 참으로 똑똑하고 운이 좋은 아이가 아닐 수 없었다.
고청운은 최근 자신이 집필중인 화본의 대미를 떠올렸다. 그는 비극적인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후에 남자 주인공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는 반면, 여자 주인공의 가세는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이 서로 맞지 않자 양가는 모두 그 둘이 정식 부부의 연을 맺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남자 주인공의 집안은 가장 큰 양보랍시고 그녀와 맺어지고 싶다면 그녀를 첩으로 삼을 것까지 종용하였다.
당연히 여자 주인공은 첩이 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곁에 남아 있는 가족들도 더 이상 없었기에, 그녀는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할 마음을 먹었고, 결국 남자 주인공은 그 길로 출가해 고승이 되는 내용이었다.
고청운은 홍루몽의 대미를 장식했던 내용을 모방하는 것이 그의 화본에도 가장 적합한 결말이라고 판단했다.
고청운은 이번 화본을 발표할 때 들었던 사람들의 원망을 다시 한번 들을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좀 아팠다. 그는 이번 화본이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2년이나 화본을 연재했기에, 그는 남녀를 불문하고 한동안 꽤 많은 고정 독자들을 보유한 상태였다.
게다가 요즘 방자명은 마치 자신의 작가로서의 또 다른 신분을 눈치챈 듯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는 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본 것인지, 연구를 했던 것인지, 마치 이미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글 속에서 드러나는 사상이 언제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겹쳤기 때문일 테고, 게다가 화본에는 간미가 지은 시구까지 등장하니 방자명의 의심은 이제 거의 확신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러나 방자명은 마치 기회를 엿보는 군사처럼 실제 행동에 옮기지는 않고 있었고, 그것이 고청운의 마음을 더 졸이게 만들었다.
‘그는 도대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닐까? 내 작가로서의 신분이 이미 노출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처음부터 사실을 밝히지 않고 이 지경까지 일을 끌고 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을 원망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숨 막히는 분위기였다! 고청운은 방자명의 전략이 매우 유효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오늘 답청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도 왜 감히 함께 가자고 청하지 못했을까? 그들 두 집안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늘 같이 동행해 왔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고청운은 한 무리의 소녀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고청운은 자신이 집필한 책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까지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상황들은 그에게 일종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박감을 느끼게 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글을 잘 쓰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될까 봐, 그들을 실망시키게 될까 봐 두려울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소어 좀 더 높게 들어 주세요…….”
화본에 대해 생각하던 고청운은 품속의 막내아들이 내는 애교소리를 들었다.
“더 높이 들어 주지 않을 게다. 네 옷이 너무 더러워서 아버지는 너를 어깨 위에 앉게 해 줄 생각이 없구나.”
고청운은 아들의 부탁을 거절하고 주변을 눈여겨 둘러보았는데, 바로 맞은편에서 몸이 건장한 젊은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어깨 위쪽에는 2살 정도 된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침이 고이게 웃고 있었고, 키가 큰 아버지도 아들을 따라 활짝 웃고는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고청운이 그의 옷차림을 눈여겨보니 평범한 평민인 것 같았으나 그의 얼굴 표정을 보면 잘 지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금의 황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일가견이 있으니, 백성들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게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고청운이 역사서를 두루 본 결과, 보통은 개국 이래 몇 십 년 동안에 가장 좋은 시절이 도래하였는데, 이 왕조의 사람들 역시 모두 생기발랄해 보이고 예리해 보였으며 진취적이었다. 이때의 국력 또한 가장 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계속해서 상승 추세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산관 시험을 치렀을 때를 상기했다. 그때 적어 낸 치국책을 황제가 진짜 눈여겨봐줄 지는 그도 잘 몰랐다. 한림원에서 거의 3년간 서길사로 근무해 오는 동안, 고청운은 황제를 몇 차례 알현할 수 있었고, 황제와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있었었다. 다만 모두 필요한 핵심만을 전달하는 대화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황제가 무엇을 하문하면 고청운이 어떻다고 대답을 할 뿐이었다. 황제라는 사람과 그렇게 함부로 말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아빠, 아빠, 소어도 하고 싶어요. 높은 곳에 앉고 싶어요.”
소어는 맞은편의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더니 더욱 성화를 부렸다.
고청운은 자신의 품에 안겨 뒤척이고 있는 소어를 움켜 안으며 낮게 말했다.
“너무 발버둥을 치면 안 돼. 더 이상 뒤척였다가는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게야.”
소어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히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었다. 아이는 자기의 옷 앞자락을 끌어당겨 관찰했는데, 확실히 더러웠기에 억울한 듯 입을 오므려 삐쭉였다.
강가에 사람이 점점 많이 몰리고 있었다. 모두들 무거운 솜옷을 벗어 던지고 밝은 색의 봄옷들을 입고 있었다. 젊은 소년들은 얇은 봄옷만 달랑 걸쳐 입고, 접은 부채를 삼삼오오 휘저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녔다.
고청운은 문득 위장(韦庄)의 시 보살만오수(菩萨蛮五首)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내가 비록 강남에서 즐거웠던 일을 회상이나 하고 있지만, 당시 젊은 시절 얇게 입은 옷은 품위가 있었다. 내가 큰 말을 타고 아치형 다리에 기대 서 있으면, 만루의 소녀들은 모두 나에게 손짓을 하고는 하였다(当时年少春衫薄,骑马倚斜桥,满楼红袖招).’
그는 품에 안고 있는 소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자신은 어느덧 26살이 되었다. 소년 시절의 명쾌하고 발랄했던 모습이 먼 옛날의 이야기였던 것만 같자, 그는 느닷없이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큰 나무 밑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들과 소녀들을 본 그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아직까지는 젊다며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 * *
그는 갑작스런 감상에 젖은 채 마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때 소만은 말에게 풀을 다 먹여놓은 뒤였다. 소만은 고청운이 다가오자 간미가 산언덕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고청운이 고개를 들어 언덕 쪽을 바라보니 비록 그 위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미와 일행을 아주 쉽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소어를 데리고 산언덕을 올라 거의 다가갔을 때 즈음, 은은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부군!”
간미가 단정하게 앉은 채 그를 불렀다. 자리 위에는 작은 화로가 하나 앞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선 죽이 끓고 있었다.
‘그 향기가 여기서 풍기고 있었구나.’
고청운은 준비된 조롱박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멀지 않은 곳에 냇물이 있었지만 이곳의 물로 죽을 끓이는 것이 왠지 꺼림칙해서 집에서부터 조롱박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곳에서만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붐비고 있었으니, 수질의 상태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무엇 하나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아버지!”
소석이 해맑게 뛰어와 맞이해 주더니, 손에 들고 있던 연을 내던져버리고 동생의 작은 손을 잡았다.
“숙부!”
고삼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간미와 나누는 대화가 불편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고청운은 “응.” 하며 한마디 대답하고, 그들이 선택한 자리를 둘러보았다. 개울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 자리는 들꽃이 사방으로 피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와 거리가 있어 꽤 만족스러웠다.
고청운은 어딘가 해방감이 느껴지는 고삼원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삼원이가 성혼을 하게 되면 진짜 어른이 되는 셈이구나.”
고삼원에게는 올해 초에 정혼자가 생겼다. 아내가 될 사람은 일남방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평범하고 선량한 평민 집안의 여식이었다. 고청운이 워낙 일남방으로 자주 월세를 받으러 다녔었기에 인연이 닿아 둘이 서로 알게 된 모양이었다.
고청운은 한시름 놓았다. 요 몇 년 동안 그의 혼사와 관련해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고삼원은 일전에는 전혀 혼인에 관심이 없었었다. 그 당시에 간미가 몇 번이나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었기에 스스로 밖에서 한 아가씨를 만나 인연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주변의 평판을 들어보니 나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서신으로 고향에 계신 고삼원의 아버지에게 전해서 혼사가 결정되었고, 지금은 5월에 치르기로 한 성혼식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