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답청(踏靑) (1)
화본의 성공으로 고청운은 한시름 놓게 되었고, 결국 수입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는 산술학 저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승진하려면 몇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성과, 즉 치적을 보는 것인데, 그는 현재 아직 정식 관료가 아니므로, 착실하고 고분고분하게 남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관청의 관례를 따르느라 어떤 치적을 올리기 어려우니 이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둘째는 자신의 심상을 세우는 것인데, 예를 들면 효자 같은 도덕적 본보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상적인 것이 바로 포청천 등이었다.
최근 송나라 시대의 서적을 보고 있었던 고청운은 포청천의 생애가 이것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포청천은 진사 때 이미 28살이 되었지만, 급제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난 후 부모상을 지키고, 그 상중이 끝날 때 그가 보인 효자로서의 모습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만천하에 알려져 모두가 그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효행은 당시 시대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었기에 가능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 지인의 권유로, 포청천은 다시 관직에 출사표를 던졌는데, 그의 첫 번째 관직은 바로 현령직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36세였으나 현령 때에 매우 잘 하였으므로 빠른 승진길에 올랐다.
고청운은 이런 자료를 통해 포청천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랐다.
비록 그는 승진과 관련하여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와서 현령직으로 부임하더라도 가서 관련된 일을 할 줄 모를 테니 승진이 또 늦어질 것이었다.
이 방법 외에도 또 다른 방법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는 것인데, 모두가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특히 황제가 가끔 한림원에 올 때가 바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허나 아쉽게도 황제가 몇 번을 찾아왔었을 땐 모두 정식 부주관이 마중을 나가, 남은 사람들은 황제를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고청운은 이런 방식 외에도 자신이 저술한 서적을 외부에 과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필명을 사용하였지만, 그가 집필한 여행기를 보라. 일단 자세히 따져보면, 그가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운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그는 이것이 이러한 파급력을 가진 서적이 될지 몰랐었다.
여행기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지금 산학 책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아주 깊은 이론을 다루지 않을 것이었다. 주로 갓 공부하는 사람에게 쓰이는 수준으로 서술하거나, 아니면 수재 시험을 보는 사람에게 맞는 난이도로 쓸 것이고, 거기에는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할 것이었다.
지금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지 않았음에도 해외와의 교류가 아직 번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성의 외국인들도 그 수가 극히 적었는데, 고청운은 산술에 능통한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이 책을 쓸 수 있게 되었고, 현재 내용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이런 새로운 부호를 알 수 있었을까 궁금증을 품었을 것이었다.
그는 책은 먼저 집필을 완료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 발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림원에서 한적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2년여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
* * *
지금은 3월 하순 즈음으로 이 무렵 고청운의 한림원 실습 기간은 이미 끝이 나 있었다. 어제 산관 고시를 치른 고청운은 며칠만 지나면 자신이 한림원에 남아 정식 한림관이 될지, 아니면 지방이나 다른 중앙부처에 내려가게 될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한림원에서 배운 것이 꽤 많다고 느꼈다. 물론 이는 학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처세술 그리고 관직 생활에서 지켜야할 규칙 등을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3월 30일은 때마침 고청운의 휴무일이었다. 사실 그는 산관 고시의 성적이 나올 때까지는 집에서 대기해야 했기에, 내일부터는 한시적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마침 바야흐로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간 산관 고시 준비로 너무 바빴었던 고청운은 그나마 떠나는 봄기운의 막바지라도 조금이나마 즐겨보고자, 교외로 봄나들이를 나가 기분전환도 할 겸 긴장도 좀 풀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 * *
휴일 전날 밤, 고청운은 촛불 아래서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고, 간미는 화장대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새까맣고 매끄러운 머릿결이 빗질을 따라 흩어졌는데, 어둑어둑한 방 안을 비추는 촛불의 부드러운 빛이 그녀의 머릿결을 따라 반사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아들은 담요 위에 나무토막을 쌓고, 칠교판도 가지고 놀면서 귀엽게 놀고 있었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부군, 정말 가실 거예요?”
고청운은 팔굽혀펴기를 다 하고 나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간미에게 나들이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간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물론이오.”
고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미아, 집에서 오랜 시간 동안 답답하게 지내지 않았소? 지난 상사절(*上巳节: 음력 3월 3일, 음력 정월의 첫 사일에 치르는 의식으로, 강이나 물가로 나가 액운을 쫒는 풍습)에도 내가 너무 바빠서 당신을 데리고 나가지 못했잖소. 나들이 가고 싶지 않소? 괜찮다면 내일 오전에 운하 쪽으로 갑시다. 듣자하니 그쪽이 경치가 좋다고 하오. 강물과 버드나무가 있고 또 아주 깨끗한 곳이라고 하더군.”
상사절은 매우 오래된 전통 명절인데, 고청운은 고사 자료를 통해 위진(魏晋)남북조 시대에서 상사절의 전통이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위진 왕조는 상사절을 음력 3월 3일로 정하였는데, 주로 재해와 병 등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의식을 치렀다. 물론 한(汉)나라 대에 이르러서는 난초를 뽑으며 부정한 기운을 없애는 등의 풍습이 사라진 대신 물가에서 연회를 갖거나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하는 등의 풍습으로 그 의식이 점차 변화되었다.
이 풍습들은 다시 진(晋)나라에 이르러서는 유상곡수(*曲水流觞: 굽이치는 곡수에 둘러 앉아 술잔을 띄워 놓고, 술잔이 흐르다 멈추면 그 앞에 앉은 사람이 술을 마시는 놀이)와 시를 지으며 음주를 하는 방식으로 변천되어 왔는데, 왕희지(王羲之)의 작품 <난정집서(兰亭集序> 역시 상사절을 보내며 만들어진 것이었다.
상사절의 풍습은 그 이후로도 변천을 거듭하여 본 왕조에 이르러서는 상사절에 교외로 나가 물가를 거니며 산보를 즐기는 행사, 즉 답청(*踏靑: 당ㆍ송 시대 이후 중국의 풍속, 청명절 등에 교외를 산책하며 화조를 즐김)으로까지 변모했다. 또한, 이 시대에서는 그 날짜 역시 꼭 음력 3월 3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3월 중으로만 하면 되었다. 그 이유는 3월이면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때여서 물가를 거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일전에 고청운이 회시를 치렀던 3월 달이 얼마나 추웠는지를 기억하면 될 것이었다.
올해 거행되었던 시험의 경우, 고청운이 참가했던 해처럼 춥지 않았었는데, 심지어 시험 기간 중의 며칠은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 속에서 시험을 치렀다고 하니, 그들보다 한 회차 먼저 시험을 지른 응시생 입장에서는 이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당연히 가고야 싶지요, 다만…….”
간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 운하 변에는 미혼 남녀들이 거닐고 있을 텐데, 저희는 대각사(大觉寺)로 가는 것은 어떨지요? 그곳에서 예불을 드리고 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고청운은 멍하니 있었다. 요 근래 몇 년간 황후가 직접 연회를 주최하고 공개 석상에서 발언을 하는 등 여성에 대한 사회적 구속이 서서히 완화되면서 그 효과가 민중의 의식 개선으로까지 번져, 지금은 거리를 나서면 예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풍토가 이어져 와 지금은 매년 3월에 미혼 남녀들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교외의 물가 주변을 답청하기도 했는데, 이는 공개 맞선과도 같은 자리라 큰 인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운하 변의 경우엔 풍광이 아주 아리따웠고, 또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니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었다.
“괜찮소. 그리고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가면 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이 대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오? 게다가 내일은 마부 한 명만 대동을 하고, 아들들은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오.”
고청운은 간미가 아들을 낳고 나서는 단 한 번도 그녀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금처럼 비교적 신경 쓸 일이 덜 할 때를 틈타 나들이라도 나서고자 했다.
<황제내경(*黄帝内经: 가장 오래 된 중국의 의학서)>에 의하면 꽃 피는 춘삼월은 물줄기가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하며, 천지가 생명을 잉태하고 만물이 움트는 시기라 하였다. 고청운은 봄날의 답청이 정말이지 좋은 활동이라고 여겼는데, 더욱이 지금처럼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야말로 특히나 더 이런 것들을 누리는 법을 익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미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흥분한 듯 보였다.
‘오직 나와 부군, 단 둘이서만?’
막 승낙을 하려던 그녀는 아들들 생각에 다시 아쉬워졌다.
간미는 오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들들을 바라봤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들은 놀던 동작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여 대화를 듣고 있었다.
생김새가 크고 작은 것이 다를 뿐 꼭 닮은 두 녀석이 조그마한 얼굴에 큰 눈을 뜨고 바라보자 간미는 깜짝 놀라 부군에게 주의를 주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미 고청운이 먼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스승님은 내일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다고 하셨지만, 아이들 외증조할머니가 계시니 이 둘은 집에 머무르게 하면 되오.”
“아버지!” “아빠!”
갑자기 외마디 이중주가 울렸다.
고청운이 돌아서니 큰아들 소석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 내일 답청하러 가세요? 저희들은 안 데려 가시는 거예요?”
소어도 눈을 깜박이며 앞에 있던 나무토막을 밀어젖히고 그대로 일어섰다. 포동포동한 작은 몸이 휘청대며 걸어와 고청운의 허벅지를 껴안고서 뽀얀 얼굴을 쳐들고 옹알대며 말했다.
“아빠, 소어도 가고 싶어요. 가고 싶어요.”
고청운은 주변을 미처 살피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탓했다. 이미 들킨 이상 더 속일 수는 없었던 고청운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내일 외증조할머니랑 착하게 집에 잘 있으렴. 아버지랑 어머니는 밖에서 일을 좀 보고 오마.”
소석은 일어나서 고청운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뻔뻔스럽게도 그의 다른 쪽 다리를 껴안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이런 것은 좋지 않아요! 볼일 보러 가시는 거 아니잖아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러 가시는 거면 저도 같이 갈래요. 나가서 연날리기 하고 싶어요!”
“연날리기!”
소어도 고함을 지르며 고청운의 허벅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고청운은 답답한 나머지 큰아들한테 급히 말을 걸었다.
“소석아, 너 공부는 다 했느냐?”
소어가 태어난 해의 5월, 소석이 만 4세가 되자 고청운은 그 아이를 집에서 30분 거리의 서당에 글공부를 시키러 보냈다.
“벌써 다 끝내고 동생이랑 놀고 있었어요.”
소석이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이제 6살이 된 그는 예전보다 키가 더 커졌지만, 몸은 아직도 꽤 동글동글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만큼 오동통하지는 않았고, 피부도 희멀겋게 돌아온 지 오래였다.
그 아이는 아주 예쁜 아가의 모습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