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장군전기
고청운의 말에 사장정은 실망했지만, 소석과의 약속이라는 말에 실망감을 억누르고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둘이 일어나 계단을 내려오려는데, 사장정의 시동생이 들어와 사장정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그러자 사장정은 희색이 만면해져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공주가 나를 찾는다니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네! 잘 가게나! 그리고 안심하게, 일정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고청운은 그가 원고 한 묶음을 집어 들고 재빠르게 뛰쳐나가는 것을 어안이 벙벙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방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실망했던 모습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방금까지도 같이 밥을 먹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더니, 공주마마께서 부르신다고 신바람이 나서 뛰어 돌아가네. 아까 외식을 안 하기로 했으니 망정이지……. 반쯤은 먹고 가겠다고 해 볼 걸 그랬나?’
* * *
화본의 일을 다 처리했으니, 고청운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가서 지금 새로 나온 신선한 화본들이 어떤 게 있는지 둘러보려고 하였다. 요즘 간미가 집에서 심심해하였기에, 그는 그런대로 괜찮은 책 몇 권을 사다 주려고 하였다.
그는 서점을 힐끗 둘러보았다. 지금은 정오가 되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책장 앞에 서있거나, 뒤쪽 의자에 앉아 책을 고르고 있어서 분위기가 그런대로 편안하니 조용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바로 화본이 있는 서가였다. 서서 보는 재미에 “하하” 하는 웃음도 간간이 터져 나왔다.
그도 덩달아 화본이 전시되어 있는 서가 앞에 섰다. 그곳엔 서로 다른 내용의 화본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필사본도 출판본도 뒤섞여있어서 질이 좋고 나쁜 것들이 함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편 화본 3작품이 아직도 팔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별히 주의해서 주의를 둘러보니 옆에 있던 부유한 상인의 모습을 한 중년 남성이 온 정신을 집중해 화본을 보고 있었고, 오른쪽의 소년 2명도 자신의 책을 읽고 있었다.
고청운은 부끄럽기도 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자신의 화본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고 또 성취감도 꽤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사장정에게 원고를 넘길 때 외에는 서재에 들르는 일이 드물었고, 들리더라도 독자 반응에 대해 신경 쓰는 일은 더 드물었다. 당시의 그는 온통 과거 시험에만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본이 놓인 서가에서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오는 것이 그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사 사장님, 일침황량 선생의 새 화본이 나왔습니까?”
고청운은 가슴이 철렁하여 눈을 들어 계산대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새로 쓰신 화본은 없지만, 황량 선생은 아직 절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사 사장은 미안한 기색을 가득 담아 웃으며, 이미 수없이 되풀이 했던 대답을 또 내뱉었다.
“만약 황량 선생께서 탈고를 마치시면, 저희가 즉시 연락하여 인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니! 왜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하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욕을 했다.
“당신들이 좀 먼저 나서서 재촉할 수는 없소?”
고청운이 그 사람을 자세히 보니, 17, 8세의 젊은 학생으로 보였다. 그의 옆에 함께 온 통통한 자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옷감이 아주 좋아 보였다.
‘오늘이 휴일이니, 두 사람 모두 국자감 학생인 것 같네.’
그들은 모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량 선생은 2년 동안 120만 자를 탈고하셨소. 그러니 지금은 좀 쉬는 게 정상입니다. 우리 서재에 군자옥(君子玉)이 쓴 <장현 출해 모험 전설>이 있는데, 이런 것도 싫다면 또 다른 신선의 내용을 다룬 화본도 있으니 보세요, 두 도련님들. 모두 황량 선생과 같은 유형의 글이랍니다.”
사 사장이 능숙하게 다른 화본을 추천해 주었다.
“됐어요.”
뚱보가 정신없이 발길질하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다 봤지만, 비슷한 아류는 더 못 보겠어요. 그 책들 중에서는 하나라도 맘에 드는 게 없더라고요! 흠, 모방하려 해도 좀 잘 쓰지, 황량 선생의 독특한 정서는 따라갈 수가 없던 것이겠지요.”
사 사장은 온화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주인 양반, 아니면 차라리 황량 선생의 거처를 나에게 좀 알려 주시오.”
젊은 학자가 눈을 깜박이며 빠르게 말했다.
“황 도련님, 그건 안 됩니다. 우리 서재의 주인님 말고는 이 늙은이도 황량 선생의 주소나 실명은 모르고 있습니다. 용모조차 도저히 알려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사 사장이 간곡히 말했다.
“사장정 그 녀석, 말 좀 해 주지. 자기만 그렇게 알고 있다니. 차라리 내가 몰래 쫓아가서 염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옛날의 사장정은 멋대로 살 때만 해도 그의 뒤로 그의 용모를 추종하는 부잣집 도련님들이 따라다녔어도, 후부의 아들이니 체면이 있어서 강하게 그들을 처리하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말할 필요 없이 완전히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이 나라 공주의 부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실질적인 관직과 권력은 없었지만, 황제의 친인척 중에서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명성이 여전히 매우 드높은 안락공주의 부마였다.
전 왕조 후기의 공주들은 지금과는 다르게 평민이나 하급 관리의 아들에게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태감이 부마감들을 선별하여 성혼을 치르고 나서 부마를 만나려고 하면 공주부의 유모를 통해 뇌물이라도 전해야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동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되지 않았는데, 하급 관리의 딸보다도 즐겁게 살지 못했었다.
반면, 본 왕조의 공주는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가 있었는데, 시회나 문회 등 여러 가지 연회를 자주 열 수 있었고, 황제와 관계가 돈독하면 그 덕을 톡톡히 볼 수가 있었다. 참담한 수준의 전 왕조의 공주들과 비교하면, 본 왕조의 공주는 누릴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 감히 사장정에게 막 대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전에 몰래 불러오던 별명인 ‘토끼 나리 (*중국에서 토끼는 무슨 일이든 오래 가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함)’조차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였다.
고청운은 옆에서 함께 책을 뒤지던 사람들도 성토하며 서로서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을 발견했다.
“군자옥이 글은 잘 쓴다고는 생각하는데, 이건 또 다른 형식의 문체라고 보오. 지금은 황량 선생의 글이 없으니, 그의 작품으로 잠시 허전함을 대체하기에는 괜찮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긴 밤을 어떻게 보내겠소.”
“나도 황 공자와 같은 생각인데, 일침황량 선생의 글은 참 보기가 좋지 않소. 마치 그 안의 인물들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고, 또 모험적인 소재도 잘 어우러져 늘 보면서도 놀랍고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맛이 있소."
“맞소, 나도 그가 쓴 모험기를 보는 게 너무 좋소. 특히 주인공이 보물을 발견했을 때 너무 짜릿했지 뭐요!”
“내가 그 주인공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보물도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있고, 미녀도 있으니까 말이오. 또 해적들과 싸울 수도 있고! 하하, 해적 퇴치할 때마다 보물이 쌓이는 것도 좋았소.”
“소생은 <수선기>를 좋아하는데, 수선문파라는 것이 실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오.”
어떤 사람이 또 얼굴에 동경을 담아 이야기했다.
“아무리 고생한다고 해도 정말 그런 것은 두렵지 않을 것 같다오!”
“헤, 제정신이 아니군. 그런 게 실존한다면 화본으로 나왔겠소? 바로 수련하러 가면 될 것을.”
어떤 사람이 그들을 놀리며 말했다.
“분명 첫 장에 이 내용은 허구라고 명기가 되어 있거늘. 수선문파가 실존한다는 환상을 품다니,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오!”
…….
이내 서재에는 저마다 취향의 화본부터 주인공, 여주인공부터 조연까지…… 모든 것을 언급하며 각각의 무리들이 모여 언쟁을 벌였다. 심지어 냉소적으로 방관하고 있던 고삼원마저 참지 못하고 이 논쟁에 껴들었다. 뒤에선 고청운이 얼떨결에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 소리가 너무 크자, 많은 사람들이 긴 책상에서 책을 읽다 말고 자꾸만 이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의 조용한 분위기가 사라지니, 다른 사람들은 사 사장을 몇 차례 불렀다.
이때 이 언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한 노인이 긴 옷을 입은 몇 명의 사람들을 매섭게 쏘아보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말했다.
“정말이지 선비를 욕보이는군, 선비들을 욕보이고 있어!”
방금 있던 논쟁에서 다른 사람과 말로 싸워 이긴 황씨 성을 가진 소년은 마음속으로는 승전이라도 벌린 듯 득의양양해 있다가 노인의 말을 듣고는 입을 삐죽거렸다.
“늙은이 같으니, 화본 좀 보는 게 또 어떻다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몰래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주변에 있던 뚱뚱한 사람이 얼른 부화뇌동하였다.
어렵게 유행하는 책을 몇 권 고른 고청운이 계산대에 다가가서 물었다.
“이런 논쟁이 매번 일어나는 것이오?”
사 사장은 그가 서재의 주인과 친한 벗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끔 책을 사러 오면 관례에 따라 최저가를 책정해주고는 했다. 그가 고청운의 질문에 답했다.
“오늘은 그나마 나은 편입죠. 황량 선생이 화본을 연재할 때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문 앞에서 밤을 새서 기다렸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붉어진 사람들이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은 정도예요. 열기가 이전보다 훨씬 덜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돈을 지불한 고청운은 고삼원에게 책을 들게 하고는 함께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 * *
한 달 후, 고청운이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방자명은 흥분하여 걸어 들어오더니 외쳤다.
“청운이, 일침황량의 새로운 화본이 나온다는 것 같아!”
고청운은 할 말이 없었다. 방자명은 줄곧 자신의 화본을 사 주었는데, 그때마다 고청운은 매우 궁색하고 난처해져서 매번 이 화제가 나올 때마다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이번에도 그는 회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드디어 나왔습니까?”
고청운이 받아보니, 역시 자기가 쓴 <장군전기(将军传奇)>가 맞았다.
사장정은 이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그 역시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보게! 내가 내기에서 이겼어. 역시 일침황량 선생은 절필하지 않고, 분명히 계속해서 글을 쓸 거야.”
방자명은 매우 기뻐했다. 그는 고청운이 자신의 추천으로 일침황량의 저서 세 편을 모두 봤을 때 성취감이 매우 컸다.
고청운은 그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머리가 또 은근히 아팠다.
‘후에 방 형이 나와 일침황량이 동일 인물임을 안다면, 그때는…… 우정에 금이라도 가는 건 아닐까?’
“새 화본은 어떠합니까?”
고청운은 닥치는 대로 책을 훑어보았다. 나쁘지 않았고, 종이의 질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주 재미있어, 필력도 예전보다 더 늘었고. 짧은 묘사만으로도 주인공의 성정을 완벽히 묘사하고 있어.”
방자명은 이미 한 번 완독했다.
“방 형은 어떻게 화본을 좋아하게 된 겁니까?”
방자명 같이 우수한 학생은 계속 경서나 고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화본 탐독이라는 고상하지 못한 취미를 갖게 된 것일까?
“넌 몰라. 어렸을 때 아버님이 늘 나를 서재에 가두고 책을 읽게 하셔서 내 마음이 어찌나 답답하던지. 그러다 한번은 무심코 화본을 보았는데, 갑자기 서재에 갇힌 생활이 더 이상 무료하지 않게 느껴졌었지. 그때부터 좋아하게 되었어.”
방자명은 마침내 자신이 화본에 빠진 이유를 말해 주었다.
“여러 해를 봐 오고 있지만, 난 역시 일침황량의 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건, 주는 것이 있어야 얻는 것도 있다는 점이야. 그의 책에는 아무 노력도 안 기울이고 거저 성공하는 주인공들이 하나도 등장하질 않아.”
그가 또 말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작품을 봐온 지 7~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일침황량 선생이 계속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군. 아, 이 책은 다시 돌려주고, 너도 한 권 사서 봐. 그럼 나는 먼저 돌아가 볼게, 집에서 만삭의 출산을 앞둔 여인이 있어서 어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방자명은 이 말까지 마치자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 나갔다.
고청운은 자신의 텅 빈 손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이 몇 마디 하려고 온 건가?’
왠지 모르게 고청운은 온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가 일침황량임을 폭로했을 때의 겪게 될 비참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