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구상 (3)
고청운이 송죽서재 2층에 오르자, 먼저 일찍 와 있던 사장정을 발견하였다.
“장정이, 내가 너무 늦게 온 겐가?”
고청운이 급히 사과했다.
“내가 일찍 온 것일세.”
사장정은 그를 보기만 해도 매우 흥분한 듯했다.
“자네가 나와 화본에 대해 상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네.”
고청운은 사장정을 자세히 관찰했는데, 그의 정신 상태나 의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이 보였는데, 예전보다 한 층 강해진 사내다운 풍모를 풍기는 것이 이제는 누가 봐도 사내다워 보였다.
‘혼인이 역시 사람을 다르게 바꿔주는구나. 공주께서 사람을 정말 잘 다루시네.’
둘이 막 자리에 앉자마자, 가게 점원이 차를 올려주었다. 사장정이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물었다.
“자네, 진짜 속세로 나오기로 한 것인가? 나를 속인 것은 아니겠지?”
사장정은 말을 마치고는 고삼원이 들고 있는 앙증맞은 책 상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갈망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고청운은 책 상자를 넘겨받고, 고삼원을 1층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렇게까지 방정맞게 굴 필요가 있는가? 좀 냉정해지게. 어쨌든 나라의 부마가 된 사람이 아닌가.”
사장정은 직접 책 상자를 가로채서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두툼한 원고지 한 묶음이 들어 있었는데, 익숙한 글씨체를 보자 사장정은 마침내 만족해하며 얼른 꺼내들고 펼쳤다.
“자네의 글씨가 또 한 단계 발전했군!”
그의 글씨를 눈여겨본 사장정은 손을 맞잡고 칭찬을 금치 못했다.
“그전과 별반 차이 없네. 그저 한림원 장서루에서 두 권의 적당한 습자본을 발견하여 그동안 조금씩 연습을 해왔을 뿐이야. 어때, 좀 나아졌는가?”
고청운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사장정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정말 진지한 모습으로 원고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고청운은 차를 마시면서 책을 집어 들었다.
“자네 지금 부마로서 조정에 들어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부마 역시 관직이 있었는데, 듣기 좋은 명성만 가진 한직으로 그저 그에게도 직장이 있다는 걸 말해 줄 뿐이었다.
사장정은 그를 외면하고 진지하게 원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청운은 개의치 않고, 그가 골똘히 몰입해서 원고를 읽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고청운은 책 속 줄거리와 함께 표정 변화가 일어나는 사장정의 모습을 보니, 자신의 이번 화본 역시 시장성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고청운은 기다리면서, 찻잔 속의 녹찻잎이 개화하듯 활짝 펴지는 모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소동파(苏东坡)도 ‘총래가명사가인(*从来佳茗似佳人: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차는 시인과 같다, 차란 모름지기 좋은 사람과도 같다).’ 라며 녹차를 두고 이와 같은 명언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고청운은 차를 잘 마실 줄 몰랐다. 찻물은 그에게 있어서 주로 갈증을 해결하는 용도로나 사용되는 것이었다. 그와는 또 다르게 한림원 동료들의 경우엔 거의 모두가 차에 대해 연구를 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다도 이야기만 나오면 각자가 다 일정 경지에 통달해 있어 자신만의 색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는 세대 차이도 존재하는 것일까! 고청운은 방인소를 따라 몇 번이나 차를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말하는 다도에 대한 경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선 정말 너무 얕게 느껴졌다.
사장정에게 5만 자는 꽤 많은 분량이었는지, 고청운이 책 전체를 다 뒤적거리고 난 후에나, 그는 마침내 원고를 다 보았다.
“아주 좋네.”
사장정이 하얀 얼굴에 홍조가 띠며 흥분해서 말했다.
“어차피 나는 어떻게 평론하는 것이 옳은 지 잘 모르는 사람이니, 그저 내가 느낀 대로만 표현을 하겠네. 이 글이 나를 엄청나게 끌어당기는 것이 확실하네. 흡인력이 있어서 계속 보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하더군. 자네가 모든 화본의 줄거리를 한꺼번에 다 써서 주었으면 좋을 정도일세. 청운이, 자네는 여전히 이렇게 글을 잘 쓰는군.”
고청운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좀 편해져서 되물었다.
“자네 생각에는 이번 화본이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서, 여성 독자들에게만 읽힐 것 같지 않은가?”
그가 이 글을 써서 간미에게 보여 주었을 때, 그녀는 확고하게 이번 글이 더 좋다는 티를 냈었다.
사장정은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닐세, 어쨌든 이 원고는 딱 내 마음에 드네, 나는 이번 소재가 매우 사실적이라고 생각이 드네. 심지어 마치 실제 이런 일이 발생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묘사를 잘했어. 솔직히 말해 보게, 이번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사건이라도 있었던 겐가?”
“아니, 소재는 내가 직접 정한 것일세.”
고청운은 매일 일기를 쓰면서 그날의 일들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록해 왔던 자신의 좋은 습관에 다시 한번 만족했다.
그는 화본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더 의식적으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그간에 전해 들었던 모든 이야기들은 현재 그의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최소한 그의 필력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글은 대화, 언어, 풍속을 묘사하는 방면에 매우 뛰어났는데, 특히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켜 묘사하는 부분이 매우 생동감이 있었다.
“내가 바로 사람을 시켜서 인쇄를 들어가야겠네. 일단 한꺼번에 많은 분량을 찍어내야 원가를 낮출 수 있을 것이야.”
사장정은 책을 어떻게 팔 것인가를 흥미진진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가 가진 공주의 남편이라는 부마의빈(驸马仪宾)이라는 직함은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아서 그는 평소에 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시간도 많으니 직접 가서 감독할 수 있었다.
“자네 서재에 화본을 쓰는 사람이 또 있는가?”
고청운이 급히 물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화본 시장 쪽에 관심을 갖지 못했었다.
그러자 사장정의 흥이 식었다.
“일침황량의 존재 덕분에 많은 문인들이 이쪽 시장에 유입되어 작품을 써댔네만, 자네 이야기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했네. 내 보기에는 화본 특유의 재미가 느껴지질 않았지. 그중에서도 잘 팔리는 화본도 있었지만, 자네의 작품과는 달리 누구나 그 책을 거론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풍조를 일으킬 만한 건 없었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말끝에서 조금 다른 내용으로 새어 버렸다.
“또 다른 서점가에서도 이쪽 시장에 끼어들어서 지금은 많은 책방이 다 이쪽에서 옥신각신 하는 형국일세. 제일 큰 3대 책방에서는 화본에 대한 이윤에 관심이 없지만, 경성의 다른 책방들은 모두 끼어들어 있는 셈이네. 지금은 네 곳의 서점에서 비교적 출중한 작가를 보유하고 있네.”
사장정은 눈을 빛내며 고청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렇다면 안심일세. 참, 이번 원고료는 일전처럼 배분해서는 안 될 것 같네. 내 의견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나는 화본을 쓰지 않을 것이야.”
고청운은 스스로 오래 고민을 하고 있던 문제를 꺼냈다.
“자네의 서재에서는 여러 사람의 급여를 책임져 주어야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인맥 같은 것도 좀 다져야 하니 영업비도 들 것이고. 이에 자네와 나의 이익을 나누는 비율을 좀 조정을 해야겠네. 2대8 정도의 배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해.”
사장정은 당연히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청운은 이치에 근거하여 강력히 논쟁하였다. 그는 현재의 대다수 서점에서 원고료를 지급할 때 1회성으로 금액을 지불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장정처럼 수입의 비율을 정해 함께 지속적으로 수입을 배분해 주지 않았다. 사장정만이 목숨을 구해준 값이라며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문제들을 사전에 정리를 해 두고자 하였다.
사장정은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대해서 이미 수년간 많은 것을 통해 충분히 갚아왔다. 고청운이 받은 것만 해도 이미 충분히 많았다. 명절 선물만 해도 매우 푸짐했는데, 특히 공주와 성혼하고 보내는 첫 중양절 선물은 고청운과 간미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매번 후덕한 선물을 보내오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일까? 비록 사장정은 답례에 신경을 안 쓴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안 보낼 수도 제대로 안 챙길 수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사장정의 신분이 있기에, 그 후 고청운네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 시에는 그가 사장정을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요 몇 년 동안 그가 보낸 물건은 이미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고청운이 물에 뛰어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장정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출되었을지도 몰랐다. 결국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죽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 몇 년 동안 고청운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사건을 마주했다. 그중에서 그는 본디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을 중시해 왔기에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을 도와주고, 또 되는대로 한두 사람을 더 구해 주기도 했었지만, 그 사람들은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사를 표한 직후 왕래가 없거나 사건 당시에만 말로만 감사를 표시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는 하였다.
같은 일을 겪었어도 사람마다 은혜를 갚는 법은 다른 법. 비교를 하자면, 사장정이 해 온 일은 고청운에게 매우 큰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지금 다시 화본을 출판하는 일로 이런 비율을 고수하면 너무 민망했다.
사장정은 고청운을 설득하고자 언변을 늘어놓았음에도 끝내 그를 꺾지 못했고, 논쟁에 졌음을 승복하고 고청운의 의견을 따라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침내 동의하자, 고청운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고청운은 속이 다 후련했는데,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사장정이 자신에게 너무나 잘해 줘서, 고청운은 꼭 그의 호의를 편취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야 평등하게 그와 우정을 교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청운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사장정과 작별을 고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급하게 집으로 가는 겐가? 내가 대접을 할 테니 우리 밖에 나가서 식사라도 하는 것은 어떠한가. 생선찜이 아주 맛있는 곳이 있다네. 얼마나 신선하고 연하다고! 자네가 즐겨 먹던 것으로 기억하네만.”
사장정은 자못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청운은 몸서리치면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될 것 같네. 아들에게 집으로 귀가해서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왔어. 아들이 어제 좋은 일을 몇 가지 하였는데, 그 보상으로 오늘 같이 시간을 보내겠다고 했거든. 그리고 모처럼의 휴식이라 밖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가 않네. 요 근래 한림원에서 계속 점심을 가게를 찾아다니며 해결하느라 이젠 밖의 음식이 지겹기도 하고.”
현대였다면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었을 때 오히려 집밥이 훨씬 더 맛있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대의 음식과 푸성귀는 오염되지 않은 무공해의 음식이었고,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기름을 사용하는데 아낌이 없었고 맛도 일반적이었다. 규모가 큰 술집에서는 식사도 요리도 맛있게 만드는 편이었으나, 그 가격도 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으면 그만이지, 매일 같이 먹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그동안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동료 및 지인들과 어울릴 때 쓰는 사교비 명목의 지출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과거 합격자 동기들이나 아니면 그들의 아들 혹은 딸의 명의로도 계속해서 돈이 들어갔다. 30일 잔치, 돌잔치 선물 등등 들어가는 항목도 종류별로 있어 일일이 모두 선물을 해야 하니, 그는 머리가 계속 아파왔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 문회나 몇 번 나갔던 시절과는 다르게 자주 만나던 벗 몇 명 외에도 많은 관계에서 간혹 밥을 사는 일이 있었고, 또 세 사람이 한 끼 식사하는데도 한두 푼의 은전을 썼는데, 이는 일반 농가의 몇 달치 순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어쩐지 사람들이 경성에서 거주하는 것이 녹록치 않다고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게는 자기 집이 있어서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집세가 나가는 사람들보다야 좀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