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06)화 (206/504)

206화. 상경 (1)

육훤이 떠나고 난 뒤 고씨 부자의 마음은 저조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일이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바로 패방을 세우는 일이었다. 

고백산과 고계산은 이 일을 위해 바삐 돌아다녔고, 가까스로 길시에 맞추어 도착한 패방용 비석을 세우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 절차에 있어서는 고청운이 준비할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패방을 세우는 날에만 출석하면 되었다.

이 진사 패방은 결국 마을 어귀에 세우기로 결정되었는데, 임계촌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을 사람들도 이를 큰 행사로 여겨 동성(同姓)이 안 붙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자처하여 스스로 찾아와 일을 도와주었다.

고청운은 비석 위에 그의 생년월일, 이름, 본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느 해의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석차가 몇 등인지 제대로 잘 적혀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 확인하였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높이 솟은 비석과 주변 마을 사람들의 흥분과 자부심에 휩쓸려 고청운도 들떠 있었다.

20년 동안 쏟아부은 그의 노력이 마침내 이러한 광경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 * *

패방을 다 세우고 나자, 고청운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열흘이 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날 고청운은 고청평과 고청안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청운이 고향에 돌아와 머무르는 시간 동안 이 두 형제는 모두 현성의 서당에서 공부를 하는 듯하더니, 며칠 만에 한 번씩 돌아와 그에게 질문을 하거나 문제의 답을 청하였다.

그 후 숙모 이 씨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청운이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보이자 아예 서당에 휴가를 내고 두 형제 모두 이끌고 찾아와  고청운의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

고청운은 별 이견 없이 그들이 배우고 싶다면야 기꺼이 가르치려고 하였고, 배우고 싶지 않다면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시(詩)>에서 말하기를 ‘군자가 기뻐하면 재앙이 곧 가라앉고, 군자가 분노해도 재앙이 곧 가라앉는다.’ 고 하였다. 자,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설명하마.”

고청운은 담 모퉁이의 물시계를 한 번 보고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고청안은 그 소리를 듣더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의자에 여전히 푹 파묻혀 말했다. 

“형님, 형님께서 저희를 계속 가르쳐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형님께서 알려 주신 내용들은 정말 이해하기가 쉬워요. 스승님이 알려주신 내용들은 한참 걸려야 겨우 이해가 가는데 말이에요.”

고청평이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몹시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청운은 그런 그들을 한번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너희들, 나를 따라 함께 경성으로 갈 테냐?”

두 사람은 얼떨떨하여 서로 쳐다보다가 즉시 외쳤다.

“아니요, 경성……. 거긴 저희에게 너무 먼 곳이에요!”

고청운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고청평의 진도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이미 사서오경을 다 배워두었고 내용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드문드문 외우지 못한 부분들도 있었다. 셈은 그런대로 할 수 있는 정도였으나 융통성 있게 운용할 정도는 못 되었다.

운이 좋으면 내년 동생 합격까지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시험 문제가 너무 편파적으로 나오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허나 고청평은 한마디로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 고청운은 고청평이 분명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건만 무슨 까닭인지 공부 효율이 고청안보다 매우 낮자 이상함을 느꼈다. 

어릴 때는 고청평이 고청안보다 훨씬 활달했었는데, 자라면서 두 사람의 성격이 반대로 변할 줄 몰랐다.

고청운은 숙부와 숙모의 기대가 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준 탓으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 자신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은 그저 참조의 대상으로만 삼았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남동생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너무 남을 부럽게 해도 매를 버는 일이 되고는 하였다. 

손윗사람에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고청운은 숙부와 숙모에게 두 아이에게 너무 부담을 지우지 말라고 말하기로 하였다. 

매일 그들은 자신을 억누르고 집에서 공부만 해야 했는데, 밖에 나가 돌아다니거나 놀고 싶어도 재차 부모에게 부탁을 해야 하고 그나마 허락을 구해도 한정된 시간 동안만 겨우 제한해서 놀 수가 있었다. 숙부와 숙모는 후세의 어떤 학부모들보다 더 많이 그들을 구속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결국 공부만 알고 세상일에는 어두운 책벌레 둘을 양성하는 꼴일 것이었다. 

남몰래 속으로 궁리하던 고청운은, 지금 현성에 있는 고이하와 이 씨 역시 형제의 공부 문제에 대해 의논 중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 * *

“여보, 도대체 아들을 청운이를 따라 경성으로 보내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이 씨는 식사하러 오는 이가 없자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그랬어요. 청운이가 설명해 주는 것이 보다 쉽게 이해된다고요. 그렇다면 애들을 경성으로 딸려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 씨는 여기까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성이라니, 황제 폐하께서 사시는 곳이 아닌가!’

자신의 아들은 그곳에서 한 바퀴 바람만 쐬고 돌아와도 남들과는 사뭇 다른 태가 날 것이었다.

물건을 챙기고 있던 고이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문했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경성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오? 그렇게 먼 곳은 한 번 왕복하는 데만 두 달이 넘게 걸리고 우리 아들이 아직 어린데 그렇게 먼 곳으로 보내면 마음을 어찌 놓고 산다는 말이오?”

“그럼 우리도 따라가면 되잖아요!”

이 씨는 대놓고 속마음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경성에서 청운이는 관리 나리잖아요! 임산현보다 대접이 더 나을 텐데, 거기 가서 작은 음식점이라도 차릴 수 있을 거예요.”

그녀도 고청운 일가가 자신들을 부양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우리의 음식 솜씨는 그저 보통 수준일 뿐이오. 이런 실력으로 경성에 가는 것은 안 되오. 조카에게 우리를 부양하라고 떠미는 셈이 될 텐데, 당신은 체면치레하지 않는다고 한들 나는 체면이 구겨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소.”

고이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쨌든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굴지 좀 마시오. 청운이는 관리로서 경성에 가는 것이오. 큰일을 하러 가야 하는 사람한테 평평이와 안안이를 딸려 보내면 청운이의 뒷다리를 잡는 꼴인 것을 모르겠소?”

그는 그녀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카가 문중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의 발목을 잡아야 쓰겠는가? 고청운이 건재해야만 그의 가게도 집도 평온할 것이었다. 그가 건재해야 임산현에서 그 누구도 자신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었다.

“뭐가 뒷다리를 잡는다는 거예요? 모두 같은 형제끼리인데.”

이 씨가 중얼댔다. 

‘아들이 형을 따라 공부만 해봐라, 진사에 합격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일은 없을 텐데.’ 

그날 고청운의 진사 합격을 축하해주는 연회에 찾아온 부인들의 소진씨를 향한 추앙과 아첨들만 생각하면, 그녀는 마음에서 참을 수 없는 쓰라림과 질투를 느껴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

“친형제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요.”

고이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평이가 내년이면 바로 시험을 치를 텐데, 몇 개월 남기고 경성으로 따라간다 한들 뭘 얼마나 배울 수 있겠소? 게다가 시험을 치를 때가 되면 누가 그를 여기로 다시 보내준다는 말이오? 수재가 되는 시험은 본적이 있는 지방에서만 시험을 치를 수 있단 말이오.”

이 씨는 그 말을 들으니 김이 빠졌다. 그녀가 눈을 데굴데굴 돌려보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안안이 보고 가라고 하죠. 그 아인 몇 년은 더 있어야 시험을 치를 수 있잖아요. 요즘에 우리 집안에서 진사가 나왔다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임산현보다는 경성에서 우리 안안이가 더 잘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이 씨의 말을 듣자, 고이하는 멍해지고 말았다.

“여보, 도대체 동의를 하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이 씨는 고이하의 침묵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밀쳤다.

한 걸음 물러난 고이하는 그릇과 수저를 다시 잘 정리해 놓은 후,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오, 청운이는 지금 막 벼슬길에 나서게 되어 분명 매우 바쁠 텐데,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을 놔두고 평평이와 안안이까지 떠맡게 하는 것은 옳지 않소.”

그는 일순간 마음이 동했었지만, 남아 있는 이성으로 이 매혹적인 생각을 겨우 억눌렀다.

“아이들 중 누구라도 거인까지는 합격하고 나서 청운이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도움이 될 것이오.”

고이하는 잠시 생각해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청운이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해서, 그 집에 기대서 우리 것이 아닌 이익을 편취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는 자신의 가게를 한번 둘러보고, 세를 받고 있는 다른 저택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사람이 너무 탐욕스러워서는 안 되었다. 사람이 너무 탐욕스러우면 되레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었다.

때때로 어떤 것을 강렬히 원할수록, 다른 사람들은 더욱더 그것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가 필요하지 않게 되고 나서야 오히려 그것을 손에 넣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살아오면서 터득한 이치였다.

그는 현청 부두에서 이렇게 장사를 하며 여러 해를 보냈는데, 이곳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부모님과 큰형 그리고 형수님도 이런 일은 말릴 것이었다.

“거인…….”

이 씨는 남편의 얼굴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는 함부로 보채지 못하고, 그저 옆에서 중얼대기만 했다.

“임산현에는 거인도 별로 없는데, 어느 세월에…….”

“경성만 가면 다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청운이의 말을 생각해 보시오. 그곳의 물가가 얼마나 높고,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자칫 사람들 눈 밖에 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경을 치게 될 것이오.”

고이하가 한마디 더 했다.

이 씨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힘껏 탁자를 닦기 시작하였는데, 꼭 탁자의 껍질을 벗기려는 것 같았다.

고청운은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경성의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가족들을 보고 그간의 생활상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는데, 경성의 좋은 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점까지 모두 객관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었다. 

이 씨는 이제 와서 고이하까지 이렇게 말하니 경성이 무슨 기회의 땅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람들도 너무 많아 아이들이 책임질 만한 잘못을 하더라도 지금 막 진사에 급제한 청운이는 경성에서의 기초가 그다지 번듯하지 못할 테니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을 것 같기도 하였다. 

‘확실히 지금 당장은 경성에 가는 것이 제일 적기는 아닐지도 모르겠어.’ 

“무슨 꿍꿍이나 작당은 생각도 하지 마시오.”

고이하는 그녀의 거동을 보고 있다가 필시 무슨 한이 서려 있다는 생각에, 사방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운이의 인품은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우리는 거사를 함부로 망치지 않고 그 아이와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오. 나중에 좋은 일이 있으면 설마 우리 차례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오? 형수님에게는 아들이라고 하나뿐이고, 우리 평평이하고 안안이는 청운이의 가장 친한 형제들이니 앞으로 청운이가 더 출세한다면 반드시 우리도 그 덕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즉, 당신이 지금 그 아이의 발목을 잡아 작은 일로 그들을 크게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오.”

이 씨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십여 년 동안 집안을 관장해온 남편의 판단력이 떠오르자, 이 씨는 그래도 남편 말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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