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추억 (2)
“아 참, 후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지?”
고청운은 육훤의 생활, 특히 계모와 잘 지내는지, 그녀가 육훤에게 잘 대해 주는지 궁금했다.
육훤은 포도를 쥐고 있던 손을 일순간 움찔했다가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포도를 입속으로 집어넣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일은 없어요. 다만 어머니 배 속의 동생이 너무 들떠있는지 태동이 심해요. 어머니께서 외숙부가 진사에 합격해 기뻐하시자 동생의 태동이 더 심해졌었어요.”
이 일 때문에 육훤의 방문이 며칠 더 늦어진 것이었다.
‘회임을 했다고?’
고청운이 좌우를 둘러보았는데, 지금 안방에는 그들 세 명밖에 없었다. 아까 고청운의 부모님은 귀가해서 육훤과 몇 마디 말을 섞은 후에는 안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고청운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는 하나 소석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선뜻 물어보기 어려웠다.
육훤은 그런 고청운의 생각을 눈치챈 듯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잘해 주세요. 이렇게 계속 잘 지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말인즉슨, 표면상의 모자 관계만 유지할 수만 있어도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고청운은 그의 말을 듣고 말을 잇지 못했다. 계모 노릇이 어렵다고는 하나, 계모를 둔 아이도 사실은 행동하기 어려운 점이 매우 많을 것이었다.
지금이야 육택의 마음이 육훤을 향하고 있었기에 육훤을 계승자인 세자로 책봉을 하고 난 뒤에 계모와 혼인을 치렀지만, 사람의 생각이란 참 빨리도 변하는 것이라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육택의 세자 책봉에 대한 생각이 앞으로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었고, 이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스승님, 안심하세요. 1년 동안 아버지를 따라 공부를 계속 해왔어요. 아버지께서 제게 다른 스승님을 알아봐 주셔서 공부를 시켜주셨거든요. 저는 틈나는 대로 역사책을 읽었는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정말 많은 도리를 알게 되었어요.”
육훤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다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청운을 바라봤다.
고청운은 그의 윗니 하나가 빠져 검은 구멍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보였지만, 얼굴색조차 바꾸지 않고 마치 못 본 척했다.
“그럼 스승님한테 잘 배우도록 하거라. 아버지께서 모신 스승님이라면 분명 학식이 뛰어날 거야.”
육훤은 속이 조금 편해져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냥 괜찮은 정도예요.”
사실 육훤은 속으로 새로 온 스승님이 고청운보다 한참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매번 수업 때마다 자신을 나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업시간이 매일 한 시진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더 긴 시간 동안 수업을 했더라면, 육훤은 답답해 어떻게 되어버렸을 수도 있었다.
같은 거인끼리 무슨 차이가 그렇게 큰 걸까? 예전에 고청운의 강의는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어서 그에게 많은 지식을 자연히 배우게 하였고, 어떤 관점은 매우 참신한 편이었다. 후에 모신 이 스승님은 책에 나온 대로만 가르침을 전하였는데, 말하는 내용 대부분이 실제 상황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만약 자신이 앞으로 병법 책에서 배운 대로만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게 될 것이었다.
고청운은 소석이 말없이 포도를 입에 가득 넣고 과즙을 줄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닦아주다 말고 물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말을 타고 오기가 얼마나 불편한데, 내가 갈 때까지 좀 기다리면 될 것이지. 아버지께서 어떻게 혼자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하셨느냐?”
“그냥 마침 집 안에만 있기가 너무 무료해서 일찍 스승님을 만나 뵙고 싶었어요.”
육훤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임서부가 여기서 얼마 안 멀어서, 아버지께서 길이 안전한지 확인하시고 허락해 주셨어요. 날이 밝기도 전에 출발하니 벌써 이 시간에 도착한 것을 보시면 아시죠? 말을 타고 오면 금방이에요. 게다가 직접 말을 몬 것이 아니고, 오문 아저씨가 태워주시는 말을 타고 왔어요. 중간에 쉬지 않고 왔는데도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아빠, 드세요.”
한쪽에 있던 소석이 고청운이 닦아주어 깨끗해진 작은 얼굴을 들어, 포도 한 알을 똑바로 들고 고청운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고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한입 먹고는 웃으며 말했다.
“소석이가 착하네. 음, 아주 맛있구나. 아버지는 이 포도가 좋구나.”
소석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다가 고개를 돌려 육훤을 한 번 보았다.
육훤은 소석의 눈에서 빛나는 득의만면한 모습을 보고 화가 났지만, 생각을 고쳐먹고는 포도송이를 들어 고청운에게 건네며 말했다.
“스승님, 좀 드세요.”
멍해 있던 고청운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 같이 먹자꾸나.”
그러고는 두말하지 않고 포도를 다 먹어 치워버렸다.
비록 보통의 포도 한 접시에 불과했지만, 세 사람은 그래도 나란히 모여 앉아 매우 즐겁게 먹었다.
대화를 통해 육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고청운은 그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좋구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줄곧 이렇게 좋게 유지되는 한, 계속 안정되어 갈 게다.”
고청운은 여기 보이는 이 육훤이란 아이가 정말 많이 변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특히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면모가 보였던 것이다.
여리고 약간 자폐적이기까지 했던 작은 꼬맹이 녀석이 오늘날 겉으로는 참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깊은 생각과 기개를 가진 알찬 어린이로 변모하다니. 고청운은 복잡한 가정 상황에 떠밀려 누군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티 없이 맑게 자랄 수만은 없었던 눈앞의 제자가 안타까웠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눈앞에서 히히 웃고 있는 소석을 연거푸 바라보았다.
‘집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갑자기 몇 개월 후에 태어날 동생 때문에 독차지하던 관심을 덜 받게 되면 이 어린 것이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는 소석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설명을 해두긴 했지만, 과연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잘 알겠습니다.”
육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은 못 먹겠구나. 너희들도 아직 밥 먹은 지 얼마 안 되어 배부르지 않니? 이제 좀 쉬자꾸나.”
고청운이 육훤에게 먼저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였다. 그가 아무리 오문과 한 말을 타고 왔다고는 하지만 피곤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육훤은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쉬러 갔다.
* * *
저녁 무렵 돌아온 고대하 부부는 육훤을 보자 기뻐하면서도 조금 어렵게 생각했다. 하지만, 육훤이 그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고계산을 포함해서 다들 그에게 천천히 익숙해져 갔다.
육훤은 5일간 임계촌에 머물면서 고청운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고 소석 친구들과 함께 동네에서 뛰놀기도 하였다.
물론 오후나 돼야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허락되었다. 오전 시간에는 두 사람 다 또다시 고청운을 따라 책을 읽고 글을 배워야 했다.
고청운은 이제 더 이상 육훤의 글공부 스승은 아니었지만, 누가 되었던 공부를 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배우고 있던 진도에 맞춰 공부를 시켰다. 소석은 시를 외우고 글자를 계속 익히고 있었다.
육훤에게는 도시의 아이가 시골로 내려간 형국이었기에, 어딜 돌아보나 하나같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 예로 이곳의 아이들은 분명 밖에 나가면 물고기를 사는 것이 아주 쉬운데도 불구하고, 굳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강에 가서 고기를 잡겠다고 하였다. 물론 사고가 날까 봐 고청운과 오문은 기슭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활쏘기, 나무타기, 새알 줍기, 물고기 잡으며 물장구치기, 닭싸움……. 두 아이들은 미친 듯이 놀면서 사이가 더 좋아졌다.
고청운은 두 사람의 나이 차가 5살이나 나는데다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적대적이었음에도, 며칠 만에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처럼 되어 있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소석은 육훤을 퍽 흠모하게 되어 곧잘 ‘소보 형아’라고 불러대며 눈을 반짝였다.
육훤도 소석을 좋아하는 듯 어딜 가나 이 작은 소석이를 데리고 다니며 아이의 숭배를 온몸으로 누리고 있었다.
육훤의 활을 쏘는 실력과 학업은 모두 지난 1년 동안 매우 열심히 연마한 태가 날 정도로 전보다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육훤의 집안은 무관 출신으로 그 역시 가풍을 따라 무술을 연마하여 몸놀림이 매우 좋았는데, 나무 타는 것만 보아도 아주 민첩한 것이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빨랐다.
오문은 마치 애늙은이처럼 굴던 세자가 원숭이처럼 돌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어리둥절했다.
* * *
결국 헤어지는 날이 다가왔다. 육훤에게는 처음부터 머무를 수 있는 날이 5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시일을 지키지 못했다가는 육택이 부대를 이탈하여서라도 직접 데리러 올 것이었다.
육훤에게는 아직 마쳐야 할 학업과 연마가 있었기에 여기서 놀 수만은 없었다.
육훤은 이별할 때 소석의 손을 부여잡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고청운이 그와 한참 더 말을 건네며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취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육훤의 어두웠던 얼굴이 비로소 조금 밝아졌다.
육훤이 막 떠나려 할 때 소석이 다시 달려와 울먹이며 손을 내밀었다.
“소보 형아, 소보 형아 가지 마…….”
육훤은 오문의 품으로부터 고개를 내밀어 뒤를 보고 소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소석아, 나를 기억해야 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이 탄 말이 멀리 떠나갔다. 여섯 마리의 말들이 서서히 검은 점으로 변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 * *
오문은 임계촌을 떠나와서도 말에 빨리 채찍질하지 않고 앞에 앉은 육훤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세자, 너무 슬퍼 마세요.”
그도 그저 이런 위로 말고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육훤도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그저 ‘응’하고 답했다.
그는 5일간 임계촌에서 머물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근심 걱정 없이 스승님과 소석과 놀았고, 스승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은 모두 상냥했다. 마을 꼬맹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몰랐기에 함께 짓궂게 놀 수도 있었다. 아, 임계촌의 산과 강도……. 모든 것이 아리따웠다.
그러나 그는 평생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의 집은 여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귀가하면 장군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분명 많이 보고 싶어 하고 계실 거예요.”
오문이 다시 한마디 했다.
육훤은 아버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다짐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갈고 닦아야지. 스승님 말처럼 내가 제대로 배우고 갈고 닦은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을 테니 말이야. 내 능력이 뛰어나면 작위가 없어도 다른 공훈을 또다시 세울 수 있을 거야. 능력만 있다면 마음이 안정되고, 가진 것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지 않아도 되겠지.’
그는 그들과 함께 했던 이 며칠을 또다시 회상했다. 세 사람이 늘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스승님은 진사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몸을 단련했으며 저녁에는 글쓰기를 연습했다.
이를 보면서 육훤도 깨우친 바가 있었다.
오문이 다시 ‘이랴!’ 소리와 함께 채찍을 휘두르자, 준마가 질주했다.
뒤따르던 친위대 5명도 덩달아 속도를 내면서 말이 굉음을 울리며 지나가자, 맨땅에 연기만 자욱하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