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203)화 (203/504)

203화. 낯익은 목소리

고청운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들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먼저 스승님을 부축하였다.

“스승님, 사모님, 요 며칠 소석이가 얼마나 쏘다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저 노느라고 하루 종일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소만에게 분부하여 소석을 꼭 붙잡아두고,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지켜볼 수 있게 하였기에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소석을 보고 싶어 했다. 그의 하얗고 통통한 얼굴만 보면 여인들이 특히 거리낌 없이 주물러 대거나 뽀뽀를 해댔기에, 소석은 이제 그런 것이 귀찮아져서 매일 아침 일찌감치 밖으로 뛰어나가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 배고프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청운도 어제 볼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는 소석을 보니 고생을 시킨 것 같아서 스스로도 마음이 아팠다. 소진씨도 소석의 그런 모습에 더 속이 쓰렸는지 오늘은 아예 자유롭게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어린애들은 다 그렇지.”

조 씨가 하지를 보며 웃었다. 

“우리 하지의 아이가 크면 그렇게 되겠지. 아마도 그럴 거야.”

그녀는 다시금 고청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고청운이 이 어린 나이에 진사에 합격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망했다.

‘아, 하마터면 이 사내가 우리 집안의 손녀사위가 될 뻔했었는데. 역시나 영감의 안목이 정확했구나.’ 

이 몇 년 동안, 해마다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기에 그녀는 고청운이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청운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보내오는 연례 선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처음에 이런 사람을 몰라봤었다. 물론 모든 농가의 자식들이 다 이렇지는 않았다. 

기회를 놓친 것은 놓친 것일 뿐, 조 씨는 지금 자신의 손녀사위를 떠올렸다. 그는 자기 집안과 가세와 비슷한 집안의 자제였는데, 2년 전에 막 수재에 합격하였다. 이번에 그들이 부성을 간 것은 친구를 방문하는 목적 외에 부성 부근의 읍에서 지내는 손녀딸을 보러 간 것이었다. 

어린 부부는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최근 갓 돌이 지난 오동통한 사내아이를 낳아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조 씨는 결국 이렇게 여러 해를 살아왔던지라 간간히 고청운의 소식을 마주했을 때 약간의 불쾌감을 나타내긴 하였지만, 나이도 많았기에 지나간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각자가 가진 자신의 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는 손녀도 지금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 씨는 얼굴에 웃음기가 더해져 마중 나온 소진씨에게 바삐 인사를 건넸다.

한편, 고청운은 하 수재를 부축하는 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보다 2살 어린 하지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여전히 소년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어른스러워져 있었는데, 키가 자신보다 머리 반 이상은 작았지만 어릴 때의 고운 모습을 잘 간직하여 용모가 준수한 청년으로 잘 자라 있었다. 그는 이미 장가를 들어 아이가 있었으나 아이가 너무 어려 이번에는 데리고 오지 못하였다. 

“사제!”

고청운이 그에게 인사했다. 올해 60대 초반인 하 수재는 지금도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손자인 하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는 비록 14살에 수재에 합격했지만, 그 후로 계속 운이 좋지 않아 지금까지 더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단지 서당을 넘겨받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그는 현학을 명목으로 매년 치러지는 세시에 참가할 수도 있어 가끔 수업을 듣곤 하였는데, 학업상 궁금증이 생기면 대부분 하겸죽에게 물어보았다.

“청운 사형!”

하지도 기뻐했다.

“자, 되었다. 청운이도 다른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니 우리가 더 길을 막으면 안 되겠구나.”

하 수재가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재촉하였다.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스승님, 그럼 먼저 앉아 계셔요. 계신 곳으로 곧 건너가겠습니다.”

고청운은 고청평에게 그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곧이어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이하였다. 

원래 일반적인 손님은 그가 직접 문어귀까지 나가 영접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하 수재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랐다. 그가 한때 자신의 스승이었으니,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였기에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이 맞았다. 

이번에 온 사람은 그와 같은 해에 시험에 합격한 거인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 몇 명이 다 와주었다. 

일이 생기면 축하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기에, 이런 경우에는 현지의 관료가 방문했을 때처럼 그가 직접 나가서 영접해야 했다.

이 밖에도 부성의 관원들이 사람을 보내 축하 선물을 전해왔기에 고청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 *

바쁘고 어수선하고도 즐거웠던 술자리는 고작 3일 만에 끝났음에도, 고청운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음에도 몇 마디 더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는데, 그와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 수재의 일가를 포함하여 그의 몇 벗들이 그러했다. 

고청운은 스승님을 배웅할 때 오늘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지 못해 약간의 가책을 느꼈으나, 두 집은 서로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언제든지 찾아가 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떠들썩한 뒤로 집안은 삽시간에 썰렁해졌고, 모두들 주변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저녁 무렵, 비록 매우 피곤했지만 3일 내내 이런 떠들썩한 연회를 치른 소진씨가 말했다.

“평생 아들의 풍광을 업고 살아왔으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다른 부인들이 자신에게 와서 아첨하던 것을 생각하던 그녀는 뺨이 다 아플 지경까지 웃었기에 자신이 꼭 몇 년이나 더 젊어진 것 같다고 느껴졌다. 

고청운은 소석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빗고 있었는데, 꼬맹이가 하루 종일 밖에서 놀다가 어디선가 털이 잔뜩 붙은 가시를 머리에 달고 와서 천천히 떼어 내줘야 했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고청운은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이미 기진맥진했던 소진씨는 급히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이 3일 동안 연회석이 정말 물 흐르듯 쏜살같이 사람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면서 정말로 시끌벅적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이야. 앞으로 이런 성황이 또 올까 싶구나.”

“그냥 돈이 너무 많이 들었지요.”

고청운이 한마디 거들었다. 

고청운은 조금씩 고개를 꾸벅이며 잠으로 빠져들고 있는 소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잠들지 말렴. 아버지가 너의 머리를 다 빗어주는 것을 기다려야지.”

오늘 날씨가 더워서 목욕을 한 후 바로 커다란 붉은 배두렁이와 바지만 걸치고 있었던 소석은 오통통한 팔뚝과 종아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고청운은 아무리 봐도 꼬맹이의 뽀얗기만 하던 피부가 너무 새까맣게 탄 것을 발견했다.

‘됐다, 애들이 검게 그을리는 것이 정상이지.’

“축의금도 참 많이 받았구나.”

고대하는 장부를 보고 있었는데, 계산된 것은 모두 왕순과 고청평이 계산해 준 것이었다. 

고청운은 장부에 기재된 액수를 떠올리자, 자기 집에서 연회를 갖는 것이 정말 남는 장사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군성의 몇몇 거인들이 선물을 보내오고, 일전에 빚진 돈을 겸사겸사 갚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청운은 경성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사장 바구니나 가죽옷 등을 사야 했고, 또 추운 날씨에 병까지 얻어 소지한 은전을 너무 많이 소모해 버려 어쩔 수 없이 방인소에게까지 돈을 빌렸어야 했다. 방인소는 대범하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고청운은 그 돈을 이렇게 빨리 갚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은 자신이 이곳에 있으니 당장 돈을 갚을 수는 없었다. 또 그가 돈을 빌려준 사실을 잊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번 그가 진사에 합격해서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몰랐던 사람들은 축하 선물들을 두툼하게 곁들어 보내 주었다. 

그는 받은 선물 중에 송인의 축하 선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정식으로 관계를 단절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었다. 어차피 경성에서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고, 송인은 이번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으니 더욱 올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현금화할 수 없는 물건 말고 나중에 답례할 것을 제외하고도 고청운은 5~600냥의 은자를 벌어들였다. 들어온 돈은 매우 많았고 마침 값어치도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경성에 새로 마련한 정원에서 이 돈으로 살림을 꾸릴 수 있을 것이었다. 

고청운이 자신의 연회를 마쳤으니, 이제 방자명네의 잔치가 진행될 차례였다. 이번에는 그가 방자명네를 찾아야 했다.

방자명의 연회는 그의 연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규모가 더 작지 않았다. 방자명은 예전부터 명망 있는 집안의 자제였기 때문에 인맥이 그보다 더 넓었던 것이다.

* * *

고청운은 정신을 차리고 날짜를 셈하여 보니, 자신의 휴가가 이미 보름이나 지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는데, 다들 자신의 집안에 특출 난 자제들을 데리고 와서 조언을 구하기 바빴다.

고청운은 사이가 좋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면 독서와 관련된 주제로 이야기를 하였고, 잘 맞지 않는 사람이 오면 핑계를 대며 못 본 체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그의 집안의 친척과 친구들 중에서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과거 시험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제한된 기력을 가늠하여 더욱 적절히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분배하여 사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절해야 할 사람들의 방문은 거절하기로 하였다.

모든 일정을 마친 후, 고청운은 임서부에 다녀오려는 생각을 하였다. 육훤이 아직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헤어질 때 틈나는 대로 찾아가겠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생겼으니 약속을 지키러 가야 했다.

그가 처음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석이 맨몸에 작은 바지 한 장만 걸치고 맨발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몸을 덜덜 떨며 헐떡거렸다.

“소석아!”

고청운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너 또 어디 가는 것이야? 또 물놀이 가는 것은 아니겠지? 더는 못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소석의 바지가 또 다 젖어 있었다! 지금은 한낮이라, 햇볕이 가장 많이 드는 시간이고 온도도 너무 높았기에, 고청운은 정말 햇볕에 너무 타서 소석의 피부가 다 벗겨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빠…….” 

소석은 큰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외침을 듣고 급히 안방에서 뛰쳐나온 노진씨가 작은 소석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는 부산을 떨었다.

“전자야, 아이 혼내는 것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혀야지.”

그때, 부리나케 밖에서 뛰어 들어온 소만이 소석이 안쪽으로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련님, 도련님이 너무 빨리 뛰어다니셔서 신발까지 다 날아갔습니다. 노비가 신발을 주우러 간 새에 뛰쳐나가셔서 이제 겨우 따라잡았네요.”

그의 말을 들은 고청운은 황당했다. 이 꼬맹이는 날이 갈수록 악동이 되어가고 있어, 소만이 한 명만으로는 그를 돌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만은 비록 진중하지만 영민하지가 못했기에, 고삼원 정도는 되어야 겨우 소석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고삼원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소석 옆에는 그가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벽에 걸린 등나무 매를 집어 들고 소석을 노려보았다.

등나무 매를 본 소석은 안색이 변한 채 작은 몸을 벽으로 붙여 웅크리고, 노진씨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도움을 청했다.

“증조할머니…….”

고청운은 노진씨 쪽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며 소석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가 노여움을 달래며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낯익은 외침소리가 들려와 그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스승님!”

고청운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문 앞에 언제 나타났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모두 키가 크고 건장한 말을 끌고 왔는데, 제일 선두의 키가 작은 그림자는 바로 혹시나 했던 육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공교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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