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소소한 일상 (2)
고청운은 고계산 그리고 노진씨와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소석을 안고 그들의 안채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맞은편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숙부의 모습을 보며 고청운은 되뇌었다.
“오늘 평평이랑 안안이가 정말 말이 없었네…….”
그가 기억하는 고청평은 장난기가 많았었는데, 오늘 밤 보니 고청안처럼 쑥스러움을 많이 타고 있었다. 아까 저녁 시간을 통틀어 몇 마디 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아닐 테고, 줄곧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오히려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였다.
“걔들이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게야.”
소진씨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주의력은 자기 아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지금은 그저 아들에게 궁금했던 것을 다 쏟아내기 바빴다.
“전자야, 이번엔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 거니?”
잠시 멍해 있던 고청운이 잠시 후에나 대답했다.
“한 달의 휴가를 받고 왔습니다.”
그가 소지한 문서에 기록된 상선 기록을 기준으로 시간을 셈해야 하는데, 조정을 속일 수도 없고 또 속여서도 아니 되었기에 경성에서 고향까지 왕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제외하고, 얌전하게 한 달 남짓 주어진 시간을 쉬고 서둘러 상경해야 했다.
“그렇게 짧게 있다가 가는 게냐!”
소진씨는 아들이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야 있었지만, 한 달밖에 안 된다는 걸 들으니 속이 상했다.
“한 달이면 긴 것이오.”
고대하는 그녀보다 이성적인 편이었다.
“우리 전자는 지금 조정의 관리가 아니오. 예전과는 다르니, 조정에서 정해준 것을 따라야지.”
“아버지,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저랑 같이 경성으로 올라가서 함께 사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이미 주택을 구입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고청운이 다시 한번 청했다.
고대하와 소진씨는 서로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여기 계신데, 우리가 어찌 경성으로 갈 수가 있겠느냐.”
그의 부모님은 분명 경성으로 오실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첫째인 이상 당연히 집에 남아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이때는 이미 고청운의 방 안에 촛불을 켜 놓았기 때문에 집 안이 환했고, 모기를 쫓는 향도 켜놔서 문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한 줄기 풀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고청운은 열심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소석을 품에서 내려 바닥에 내려놓고는 방을 좌우로 한 번 둘러보았는데, 자기 방은 여전히 깨끗했다. 장식은 예전 그대로였고, 탁자 위에는 먼지 하나 없어서 마치 자신이 여태 떠나지 않고 있었던 듯했다. 자기 방에만 기르고 있었던 난초 몇 개 역시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반듯반듯하게 늠름한 모양새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고삼원이 자기 짐을 가져와 벽에 걸어놓자 고청운이 말했다.
“삼원아, 집에 안 돌아가 볼 생각이야? 방금 네 아버지를 뵈었는데.”
고청운은 고삼원이 소석을 계속 안고 있어 준 덕분에 다른 사람과 말을 할 수 있었는데, 가끔씩 정신을 분산시켜 그쪽을 바라보니 고삼원의 아버지가 고삼원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줄곧 입을 다물고 상대하지 않고 있었다.
고삼원은 고청운의 말을 듣고는 다시 고대하와 소진씨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실지 짐작이 돼요. 뭐, 가서 뵙고 올게요. 아버지 뵙고 좀 있다 다시 자러 오겠습니다.”
고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하거라. 그래도 오래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었으니 한 번은 돌아가 뵙는 것이 좋을 거야.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필요는 없잖니.”
고삼원 역시 그런 도리를 알고야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아버지를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흥, 숙부께 괜한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 뭐 한 번 찾아가 보지.’
이때, 왕순과 그의 부인이 즐거워 보이는 모습으로 뜨거운 물 한 대야를 들고 입구까지 걸어왔다.
“자, 소석아 목욕해야지.”
고청운이 말 한마디를 건넸다.
처음에 소석은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벌거벗고 목욕하리라 생각하니 쑥스러웠지만, 아버지를 보고는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이 모습을 보고 고대하와 소진씨가 자진하여 소석을 목욕시키려고 하자, 고청운은 생각을 한 번 해 보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가 소석과 자신이 갈아입을 옷을 꺼내 들고 말했다.
“소석아, 아버지 혼자 욕실에 가서 목욕할 건데, 우리 소석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여기서 씻는 것을 도와주실 거야, 괜찮지?”
소석은 안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흔들림 없는 단호한 눈빛을 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이런 눈빛을 이번 달 들어 여러 번 보았기에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다.
소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고청운은 그에게 웃으며 다독였다.
“괜찮아, 아버지는 옆에 있을 거야. 금방 올 거다.”
고대하와 소진씨는 흥분되었다. 두 사람이 소석을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벌써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눈앞의 지금 이 뽀얗고 포동포동한 아이가 정말 우리의 손자란 말인가?’
초상화만을 보았던 그들에게는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아들과 7~8할 정도를 쏙 빼닮은 손자의 모습을 보자, 두 사람의 마음은 이내 녹아 흘렀다.
소석은 제 아버지를 빼닮은 덕분에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 않았기에,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모두들 고청운 일행이 방금 집에 돌아왔을 때 소석이 놀라 울 것을 염려하여 배려했는데, 만약 소석의 소리 없는 저항만 없었더라면 그들은 진작부터 소석을 낚아채 안아 들고 싶어서 성화였을 것이다.
고청운이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자 소석도 이미 목욕을 마치고는 돗자리 위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석은 고대하와 소진씨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는데 간혹 한두 마디씩 대답할 뿐 대부분은 손짓과 발짓을 할 뿐이었지만, 이런 것만으로도 고대하와 소진씨는 크게 기뻐했다.
소석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번쩍 뜨고 외쳤다.
“아빠!”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는데, 소석이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를 달래어 재우려 했다. 소석은 지금 막 목욕을 하고 나왔고, 또 시골이어서 방에 바람이 잘 통하고 그렇게 덥지 않자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소진씨는 어린아이를 어르는데 능숙한 고청운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모기장을 달아 놓고 그들은 침실에서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소진씨가 웃으며 말했다.
“전자가 아들을 이렇게 잘 다룰 줄은 몰랐네.”
‘내 마음속의 전자는 아직도 작디작은 어린아이인데, 지금 보니 언제 이렇게 커서 아버지가 되어 있다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갔구나.’
소진씨는 아들 곁에서 더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반면, 고대하는 그쪽으로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 셋은 서재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전했다. 거의 두 달에 한 번꼴로 편지를 주고받았다고는 하지만, 편지로 말을 다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이 온 것에 설렌 나머지 고대하 부부는 아들과 함께 더 지내고 싶었지만, 아들 몸이 축날까 또 염려스러워 서둘러 쉬러 갈 수 있도록 그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고청운이 침상에 누웠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가 누워 있는 이 침상은 아주 익숙하기도 한 반면 또 낯선 느낌도 주었는데, 기분만은 아주 좋아서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졌다.
‘결정했다. 내일은 늦잠을 좀 자 볼까나.’
그는 여러 해 동안 늦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잠들기 직전에야 그는 갑자기 오늘 운동, 글 연습도 안 한 것이 생각났다.
‘어쩐지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더라니.’
그는 속으로 뭔가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고향 땅을 밟는 순간부터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만 같았다.
* * *
이튿날 아침 일찍 원래 일어나던 시간에 깬 고청운은 고개를 숙여 소석을 바라보았다. 소석은 아직도 그의 품속에 틀어박혀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그는 본래 좀 늦게까지 잘 생각이었으나, 노력을 해봐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모기장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더 자려고 해도 안 되다니!’
20여 년 동안 만들어진 자신의 생체시계는 정말 무서웠다.
고청운은 할 수 없이 조용히 일어나 정원에서 몇 바퀴 빠른 걸음으로 산책 삼아 운동을 하고는, 다시 앞쪽 정원 구석에 여전히 서 있는 과녁을 향해 자신의 활과 화살을 꺼내 들고 연습을 시작했다.
이 표적은 새것인 것으로 보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예전에 쓰던 것은 풍화작용 때문에 바람과 햇볕에 삭아서 아마 벌써 박살이 나 버렸을 것이었다.
고청운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곧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이날 오전이 되자 그의 시집간 자매들은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그를 보러 돌아올 채비를 서둘렀다.
현에 면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 역시 그의 집에 방문첩을 보내오기 시작했는데, 방문첩엔 찾아뵙고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연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듯 임계촌을 오가는 우마차는 끊이지 않았다.
* * *
임산현에서 한참 떨어진 임서부(临西府)에 위치한 소용장군부(昭勇将军府).
육훤은 활쏘기와 정권 연습을 마친 후 땀을 한바탕 흘리고서야 오전 수련을 멈추었다. 그가 느릿느릿 땀을 닦고 목욕을 마치고서 막 책을 보려 할 때, 오문이 얼굴에 희색이 만연해서 걸어 들어오더니 말을 전했다.
“세자, 고 공자님의 서신이 왔습니다!”
육훤은 깜짝 놀라 기뻐하며 급히 봉투를 받아 들고서 말했다.
“스승님께서도 참, 이번 편지는 지난번보다 며칠 더 늦게 도착했네. 꼭 말씀드려야겠어요, 다음엔 그 대신 편지를 두 번 더 보내시라고요.”
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으로는 지체 없이 봉투를 잡아 뜯었다.
“스승님께서 진사에 합격하셨습니다! 심지어 전려라고 하시네요!”
육훤은 너무 기뻐서 주먹을 꽉 쥐고 힘껏 휘둘렀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오문은 비록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음에도 육훤과 함께 매우 기뻐하였는데, 고청운과 접촉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세요, 위채에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을 전해 주세요.”
육훤이 일어섰다.
장군부는 임서부의 거상이 예전에 사용하던 별장을 개조한 것으로, 매우 컸다. 육훤은 정교함이나 위풍당당한 기세는 좀 부족해도 조금만 자리를 옮겨가도 풍경이 뒤바뀌는 강남의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저택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다만, 승마장이 집안에 없어서 마궁술을 연마하려면 교외로 나가야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