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대생활 (189)화 (189/504)

189화. 조시(朝考)

이 연회의 술안주 역시 다들 예상한 바와 같이 신분대로 차례로 상이 올라왔는데, 상석, 중상석, 중석으로 구분이 되어 있었다. 앞에 두 석상에는 요리의 종류가 몇 가지 더 놓일 뿐, 모든 석상은 생선, 양고기, 국물 요리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저 중석에만 오리 요리가 빠졌고, 요리들에는 소고기가 많이 쓰여 있었다. 

고청운은 오리 요리를 보고는 그 맛이 궁금해서 사양도 않고 집어 먹었다. 입에 넣자마자 그 맛이 확실히 대단히 좋았는데, 살짝 매콤한 향과 어우러져 먹는데 조금도 느끼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왕궁의 수라라는 건가?’ 

지난 두 차례의 시험에서 먹었던 찐빵과 비교해서 지금 맛보는 이 음식들은 정말 너무나 맛있었다! 그의 상상 속의 황궁의 수라에 딱 들어맞는 맛이었다. 또한, 뜨거운 음식이 몇 가지 올라 있었는데, 식기 전에 먹었더니 다 맛이 좋았다. 

이번에는 황제가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 영원후가 빈번히 잔을 들었는데, 모두들 그를 따라 술을 마시면서 분위기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뒤에는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것이 좀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 어색할 따름이었다. 

본 왕조의 은영연은 당나라나 송나라 때에 비해 쾌활한 분위기가 덜하고 좀 더 장중한 편이었다. 

연회가 끝나자 조정에서는 모든 진사들에게 은자 30냥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 은자들로 고향에 진사 패방(*牌坊: 효자, 절부 등 남의 모범이 될 만한 행위나 공로가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기념하기 위해, 또는 미관을 위해 세운 문짝 없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은자는 비록 많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보고 꽤 흥분하였다.

‘패방을 세우다니!’ 

고대에는 패방을 세운다는 것이 매우 높은 영예에 해당했다. 세우고 싶다고 한들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패방을 세우는 데에는 반드시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절부, 효자의 패방들조차 지방 관료들이 위에 신청하고 황제가 그에 동의를 해야만 세울 수 있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어떤 관원이 탁월한 공헌을 하여 황제에게 신청하고, 비준을 받아 패방을 세워야 했다. 

이 패방에는 무슨 내용의 패방인지를 확실히 밝혀야 했는데, 진사, 절부 등으로 써야 했다.

한 가문에 권세가 있는지 여부를 보려면 그들이 사는 문중에 패방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면 되었다. 어떤 가문의 권세가 대단하다면, 그 집에는 패방이 몇 개 세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그런 집안은 우습게 볼 수가 없었다.

고청운 외 진사들도 합격을 했으니 고향에 이 패방을 세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황제가 이미 허가한 것으로 결재 문서도 받아둔 참이었다.

고청운은 받게 될 패방을 어디에 둘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은영연이 끝난 후에도, 그들에게는 아직 일련의 절차가 남아 있었다.

4월 29일, 황제는 오문 앞에서 장원 공번충에게 6품 조관, 조의, 대례복, 허리띠, 신발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모든 진사들에게 각각 은자 5냥씩과 겉과 속옷감을 한 벌씩 더 하사하여, 진사들이 스스로 관복을 더 지을 수 있게 하였다.

4월 30일, 장원 공번충이 인솔자가 되어 여러 진사를 거느리고 황제에게 사은을 표하였다.

5월 초하루에는 장원 공번충이 진사들을 거느리고 국자감 부근의 공자묘에서 석갈례(*释褐礼: 관직에 처음 임관하는 의식, 새로 진사에 합격한 자가 평민의 옷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는 행위)를 올리고 환복하였다. 아울러 예부에서 주청하여, 공부(工部)를 통해 은자 100냥을 국자감에 내려 이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제일 마지막인 이 과정이 신임 진사들을 정말 기쁘게 한 것이었는데,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그들의 공명이 확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이곳에 남아 밤낮으로 역사와 함께 빛날 것이었다.

5월 초이틀에 조시를 치르는 날이 다가왔다. 전시는 종점이 아니었고, 모두들 다시 모여서 보화전에서 조시를 치러야 했다.

만일 실제로 한림원 서길사로 선발된다면, 3년 후 그는 산관(*散馆: 한림원에 들어간 신임 진사가 3년의 기간을 채워 다시 거행된 시험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만이 한림원에 남거나 다른 관직을 맡을 수 있는데 이를 산관이라 칭함)할 때 다시 한번 시험을 쳐야 했다. 그때 서길사들의 성적에 따라 진짜 직무에 배치될 것이었다. 

그래도 고청운은 회시나 전시보다도 조시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시험이 단 하루 만에 끝나기 때문이었다.

전시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에는 어림군과 한림원의 관리들이 시험을 감독하고 있었다. 시험은 조서작성, 논술, 소통, 시, 시부 등을 쓰는 것으로, 이 모든 내용들은 한림원에서 자주 써야 할 내용들로 잡문과 시부가 상당히 겹쳤다.

한림원에서의 주요 직책은 직조(*制诰: 황제의 조령을 쓰는 것), 역사책의 편찬, 문한(*文翰: 공문 서찰을 쓰는 것)이었다. 한림학사는 그 아래에 시독학사(侍读学士)와 시강학사(侍讲学士), 편수, 검토 등의 직급을 가진 관료들을 두고 과거 제도, 공문서 정비, 황제의 고문 등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이런 한림관원이 될 수 있는 예비 자격을 가진 것이 서길사였다. 

고청운은 한림원이 바로 현대의 중국과학원(*中科院: 기초과학 및 자연과학 등의 연구를 하는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 중앙 사무국 등과 같은 인재 양성 기관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본 왕조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번 조시 시험은 한림원이 주관했고 시험문제 역시 이들이 냈다.

고청운은 잡문 문항은 전혀 걱정하지 않고 매우 순조롭게 풀었다. 그는 요 며칠간 시간을 들여 방인소가 찾아준 자료들을 한 번 둘러보았는데, 그 결과 최근 2년 동안 한림원에서 쓴 조서, 논, 소 등과 그가 이전에 배웠던 잡문의 양식을 결합하여 답안을 쉽게 완성할 수 있었다.

시부의 경우, 그는 아직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정해진 시간 내에 한 편의 시부를 만들어 쓸 수 있는 정도로는 성장한 상태였다. 수준이야 중간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나 가끔 영감을 받았을 때는 중상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물론 생각지도 못하게 근근이 합격점에 맴돌 때도 있었다. 

조시 성적은 1, 2,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시험이 끝난 뒤 고청운은 자신이 큰 이변이 없는 한 1, 2등급에 들더라도 한림원에 겨우 들어갈 수는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어쨌든 그의 복시 성적은 1등급이었고, 전시는 2갑에 드는 성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서길사 전형은 복시와 전시, 조시 이 세 번의 시험 성적을 종합하되 조시 시험의 성적을 위주로 평가하였다. 보통 4수(*복시 1등, 전시 2갑, 조시 1등급)정도의 성적이면 합격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조시 시험에서는 해서를 쓰는 서예법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서예법이 좋지 않으면 1등급으로 올라가기 어려웠다. 고청운은 자신의 서예 실력이 동기 진사들 사이에서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 * *

시험이 끝나면 남은 차례는 성적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성적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이들에게는 꽤 이골이 난 것이었다. 한림원에 들어갈 가망이 없는 진사들은 경성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만약 그들이 한림 외 관직을 생각한다면, 지방에서는 7품직에 해당하는 현령직을 얻을 수도 있었고, 경성에 남을 경우엔 겨우 정8품 정도의 관직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고청운은 어느 곳이든 상관없었다. 한림원에 못 들어가게 되면 아무 데나 가도 다 괜찮았다.

방인소도 이와 관련하여 그에게 물었는데, 고청운이 자신에 찬 모습을 보이자 더 이상 그런 말을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집에 관한 일도 언급했다. 옆집의 2중 정원 저택은 이미 황 대인으로부터 사들인 상태였다. 고청운도 이미 그곳에 가보았는데, 줄곧 사람이 살던 집이었기에 집 상태가 아주 잘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의 일부 구역이 그와 간미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손을 보기로 하였다. 

이 정원은 큰 이변이 없는 한 몇 년 동안 머물며 살다가 나중에 경성을 떠나도 함부로 팔지 않을 생각이었다. 당분간 이곳을 경성의 거점으로 삼을 예정이기 때문에, 부부 모두 자신의 생활 습관에 맞게끔 신경 써 손을 보기로 하였다.

정원의 구조는 방택과 비슷했는데, 집안의 문양 정도는 좀 고쳐 손을 보기로 하였고, 정원에 심어진 몇 종류의 화초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이라 고청운이 좋아하는 계수나무 두 그루정도만 더 들이기로 하였다. 

이런 정비들로 고청운은 수중의 500냥 남짓한 돈을 남김없이 써 버렸지만, 다행히 마지막 원고료를 다시 손에 넣어서 지금은 수중에 100냥에 가까운 은자가 남아 있었다. 

‘임대료를 빨리 받기를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혼 예물을 써버릴 수밖에 없었을 거야.’ 

고청운은 자신의 호주머니가 쪼그라든 것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소홀해진 틈을 타 고달픈 시기로 돌아가 버렸구나.’

그래도 경성에 두 채의 집이 생긴 셈이었고, 그중 한 채에서는 끊임없이 임대료가 나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집을 한 채 더 사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했다. 

본 왕조의 율법에 따라, 부동산을 사재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바로 ‘주택 환급비’ 라는 제도 때문이었다. 

주택 환급비란 원 집주인에게 오른 집값의 일부를 돈으로 주어야 하는 제도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가 팔려고 했을 때 고청운이 원 집주인에게 은자 100냥을 주고 집을 샀다고 치면, 몇 년 후 집값이 300냥으로 올랐을 때, 고청운은 정해진 일정 기한 내에 원 집주인에게 오른 집값을 보충해 줘야 하는 기회를 한 번 가져야 했다.

고청운은 자신이 이 집을 샀으니, 나중에 황 대인이 찾아와서 집값을 독촉하고 자신이 돈을 한 번 더 내야만 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고청운은 이 규정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매우 의아하게 여겼는데, 조정이 이런 방식으로 집값을 잡을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특히 경성에서 집값을 조정하는데 매우 유효하였다. 

이 규정은 외지 사람들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들 바보가 아닌 이상 돈 많고 권세가 있는 권세가들이 대량의 토지를 사들이는 등 평가절상 따위의 현상이 생겼을 것이 분명했다. 

또한, 조정에서는 한 사람이 보유할 수 있는 정원이 딸린 택지를 한정적으로 규제하고 이를 명문화하고 있었다. 만약 매입한 택지의 면적이 지표를 초과할 경우, 1묘를 초과할 때마다 곤장 10대를 맞게 되어 있었다.

계산을 해 보니 자신이 소유한 집의 대지 총면적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면적의 한계를 아직 넘지는 않았으나 거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기에, 나중에 더 살 수 없었고, 만약 사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명의로 하거나 택지가 아닌 상가나 논밭 같은 것을 사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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