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은영연(恩荣宴)
간미는 고청운이 반쯤 연주하고 있을 때 문밖에 나타났는데, 그가 이제 연주를 다 마친 것을 보고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부드럽게 물었다.
“부군, 왜 그러시죠? 기분이 나쁘신가요?”
분명히 그는 오늘 아침 내내 즐거워 보였고, 심지어 어젯밤에는 너무 흥분한 탓에 늦게 잠들기까지 했었다.
그녀는 고청운의 맞은편에서 자기 때문에 그가 한밤중에 몸을 뒤척이는 소리까지 모두 다 듣고 있었다.
고청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마음이 좀 불편하지만, 지금 한 곡 연주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소.”
조문헌은 편지에서 그간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한창 자주 술집에 갔었던 그는 의도치 않게 담자례와 사귀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조문헌은 술에 취해 입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몇 마디 푸념을 쏟아냈었는데, 그중에는 고청운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다고 하였다.
조문헌이 한 가지 생각지 못한 것은, 담자례는 눈에 거슬리면 바로 그런 태도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조문헌은 술주정을 빌어 그에게 그런 말들을 실제로 비아냥대며 쏟아낸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고청운과 담자례가 잘 지낼 수 없는 사이로 만들었다.
고청운은 이 사건의 발원지가 조문헌인 줄은 몰랐다.
고청운은 당시의 소문을 회상했다.
‘조 사형의 눈에는 내가 정말 그런 불순한 의도가 가득한 인간으로 보였던 걸까?’
고청운은 방인소에게 잘 보이고자 의도해서 그를 스승으로 모셨고, 또 스승님의 의견에 반하지 않기 위해 그의 외손녀에게 장가든 것임을 부인하진 않았다.
‘평소에 그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취중이었다고 한들 그런 진담을 털어놓았을 리가 없었겠지.’
고청운은 조문헌이 자신에게 이렇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고청운을 가장 분개하게 만든 것은 이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고청운은 자신이 이런 유언비어에 시달릴 때도 그가 이 얘기를 꺼내지 않고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게 가장 속상했다.
고청운은 자기가 조문헌의 사람 됨됨이를 그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전에 조문헌의 마음 씀씀이가 좀 좁고 쉽게 외곬으로 빠질 수 있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사람마다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고청운은 그가 그저 그런 성향을 가진 것일 뿐 나쁜 사람은 아니며, 자신이나 남을 불리하게 만들지 않으니 잘 지낼 수 있다고, 성향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하 수재의 서당에서 알기 시작했는데, 고청운은 하겸죽과 조문헌이 서로 그리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학에서 공부를 할 때도 방자명과 조문헌의 관계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는 하였다.
고청운은 이를 모두 개의치 않았었다. 적어도 그의 면전에서 그들 몇 사람은 뚜렷하게 겉으로 드러날 만큼 나쁜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뚜렷한 배척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줄곧 4명 모두 친한 친구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고청운이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자, 간미는 머리를 굴려보았고, 이내 이화목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편지 한 장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조 공자에게서 편지가 온 게로군요?”
고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간미는 그의 큰 손을 잡았고, 무심코 그가 자주 붓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고치를 한 겹 두른 것 마냥 딱딱하다고 생각했다.
“봐도 되오. 다만 편지를 읽고 화는 내지 마시오. 건강에 좋지 않으니.”
고청운은 간미가 편지를 보는 걸 반대하지 않았다. 부부는 일체라고, 그가 사귀는 벗들에 대한 사정은 간미가 모두 알아도 되는 사정들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관직 생활을 준비하는 이상 더 그러했는데, 부주의하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는 간미가 매우 총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역시 방인소가 어릴 때부터 가르쳤기에 어떤 일에 대해서는 견해가 아주 넓었다. 유일한 아쉬운 점은 그녀가 의견을 잘 피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어떤 일이든 간에 고청운은 그녀와 기꺼이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하였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네요?”
앞의 내용에 대해 간미는 대충 훑어보았을 뿐이고, 마지막 부분을 보고 나서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고청운은 복잡한 마음으로 답했다.
“그렇소. 경성에서는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없으니 차라리 귀향해서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를 더 하는 것이 좋겠다고, 국자감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능력만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진정한 거인이 되고 싶다고 하오.”
물론 조문헌은 편지에서 어머니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기도 하고 객지에서 사는 사람은 끝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법이라며, 그의 귀향 이유를 밝혔다.
고청운은 그의 편지에 담긴 사과를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했다. 별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후에도 지금과 달라질 것 없이 그대로 점차적으로 멀어지면 되었다. 사람은 한평생 살면서 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법이었다. 비록 어릴 때부터 함께 커온 벗이 한 명 줄어드는 것이었지만, 지금 그들이 이런 지경에 처한 이상, 그런 벗 하나 사라지는 건 그다지 아깝지도 않았다.
“부군, 슬퍼하지 마세요. 또 다른 벗들이 있지 않으십니까.”
간미는 다시 그에게 다가갔고,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 편지를 보니, 저도 앞으로 임 언니랑 친하게 지내기가 좀 그렇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 역시 조문헌이 떠나서 멀어지게 된 것이 어느 정도 반가웠다. 그가 첩을 둔 사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첩을 들일 때 임 언니의 돈을 사용한 것이 역겹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선 조 씨네 집안은 돈이 없는 집안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그의 부친이 분명 그들에게 재산을 남겼지만, 남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뿐이었다.
비록 간미는 일찍이 이 사실을 부군에게 말했었지만, 부군은 부분적인 것에 미혹되어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인지, 언제나 조문헌은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부군이 오랜 벗으로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단 한 번 언급한 후 이 일에 대해서 다시는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런 사단이 날 줄이야. 이제 그를 다시 볼 필요가 없게 된 셈이었다.
간미는 그저 임 언니가 좀 더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을 더 잘 보호해 가며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조문헌의 일은 이렇게 지나갔다. 고청운은 그가 내일 도화진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배웅할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부탁하여 고향에 편지나 물건을 보낼 생각도 없었다.
식구들이야 빨리 자신의 성적을 알고 싶어 할 테지만, 고청운은 무슨 일이 되었건 조문헌과 다시 접촉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게다가 그는 관청에서 고향집으로 보내 주는 소식통이 더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조문헌이 직접 가지고 가는 편지보다는 빠를 것이었다.
“부군, 어서 먼저 가서 식사하셔요. 오후에는 일이 있어 바쁘시지 않습니까.”
간미는 그가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고 재빨리 귀띔을 해 주었다.
“알겠소.”
고청운은 퍼뜩 오후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오늘 이른 아침, 그는 예부의 통지를 받았는데, 새로 부임한 진사들이 오후에 홍려사에 가서 훈련에 참가하여 내일 은영연(*恩荣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연회) 의례에서 공연을 하라는 지시였다.
그는 무기력하게 하소연했다.
‘매번 그런 식이구나.’
모두들 그들의 집단행동의 유지를 위해서 사전에 시연을 거쳐야만 했다. 이 일들은 전생의 공연을 하기 전 리허설을 연상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지금 공연을 하는 것이 맞았다.
황제 그리고 다른 대신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니, 누구나 다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을 것이었다.
* * *
다음 날, 그러니까 전구대전 이후 셋째 날, 황제는 ‘은영연’을 예부에 하사하고, 고청운 등 새로운 부임한 진사들을 모두 참석케 하였다.
은영연, 송대에는 ‘경림연(琼林宴)’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연회는 천자가 베풀어 주는 은혜였다. 하 왕조의 관례에 따라, 때가 되면 황제는 개국 공훈이 있는 무신 신분 신하를 임명하여 연회를 주관하게 하였고, 그들의 신임 진사뿐만 아니라 채점관과 전시 시험 업무를 담당했던 관료들도 참여하게 하였다.
은영연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은 조정 대신이나 신임 진사들을 막론하고 모두들 굉장한 영광으로 여겼다.
이것은 황제가 그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은혜였기 때문이었다.
고청운 외 신임 진사들은 시간을 준수하여 연회에 참석하였다. 은영연은 주로 연회 위주의 성격을 지녔는데, 사실은 먹고 마시고 또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고 감정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 연회는 실은 대신들이 사위나 손녀사윗감을 보는 자리이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황제가 부마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하 왕조 황실의 관행으로는 신임 진사가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고청운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고청운은 그저 미혼의 진사들을 약간 눈여겨볼 뿐이었는데, 그들이 수염을 아주 단정히 깎고 혈기 왕성해 보이는 것이 과연 이 연회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큰 머리 탐화 방희림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방희림은 말을 타고 장원유가를 끝내고 난 뒤 ‘큰 머리 탐화’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신임 진사든 채점관이든 모두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야 했다. 꽃 말고도 또 하나의 패를 달아야 했는데, 패에는 ‘은영연’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고청운은 이때 자신의 손에 들린 패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 패는 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꽃도 아주 생생했는데, 방금 막 어느 화원에서 직접 따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낭창거렸다. 다만 다 큰 사내들 사이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좀 답답할 뿐이었다.
‘차라리 비단으로 만든 꽃을 달아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는 문득 은식(*恩式: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던 과거)이 치러졌던 그 해의 진사 한 명을 떠올렸다. 그 해에는 합격 인원이 너무 많았고 날씨도 더디게 따뜻했기에, 많은 생화를 구할 수가 없어서 비단으로 만든 꽃으로 대체되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고청운은 자세히 보니 모든 진사의 머리 장식이 동일한 것이 아닌 걸 알아챘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역시나 장원의 장식에는 은패가 달려있었으며 머리에 꽂는 꽃과 나뭇가지 잎사귀도 모두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 다른 진사들은 다 자신과 똑같은 장식이었다.
‘장원만이 예외군.’
고청운은 조정의 장원에 대한 우대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길한 시간에 되자, 영원후(宁远侯)의 인솔 하에 모두가 의식을 거행하고 나서야 마침내 그 전설 속의 은영연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신분에 따라 자리에 착석했는데, 장원이 홀로 착석하고, 방안, 탐화가 한 상에 착석하고 나면, 나머지 진사들은 4인에 한 상씩 착석하였다.
그랬다. 고청운과 담자례는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만 할 뿐 잠시 말이 없었다.
“자례, 먼저 앉지 그러나?”
고청운이 손짓했다.
“고 형, 먼저 앉으시지요.”
담자례가 고개를 내둘렀다.
고청운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는데, 그의 석차가 담자례를 앞섰으니 이치대로라면 확실히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아도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술안주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