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책론 (1)
하 왕조는 건국된 지 이제 겨우 30년이 채 안 되었지만,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어서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끊임없이 개선되고 민심이 안정되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역사책에 따르면, 이후에 황제가 나라를 함부로 통치하지만 않는다면 건국 50년 후에는 반드시 태평성세를 이루어 국력이 반드시 최고조에 달할 것이었다.
설마 지금 황제는 첫술부터 배가 부르겠다는 것인가? 황제는 마음이 급한 사람인 것 같았다.
지금 고청운의 머릿속에는 일조편법(*一条鞭法: 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행해진 세역 제도의 일종. 지세와 징세를 은으로 납부함), 탄정입묘(*摊丁入亩: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가 행한 세금 제도로, 인두세인 정은을 토지세인 지은에 합쳐 징수하여 재산이 없는 이는 세금을 감면받았으며, 조정은 세금을 적절히 거둘 수 있는 제도), 관료와 지방 유지들에게 세금을 추납하는 등의 개혁방안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으나, 현재 하 왕조는 아직 개혁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탓에 이러한 개혁을 진행할 용기와 지혜가 없어, 이와 같은 ‘새로운’ 혁신을 도입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인과 공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언급해 보면 어떨까? 상인의 지위는 현재도 이미 높은 축에 속하며, 또한 고대에는 경제가 원만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까진 농업을 더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 더 적합했다. 공인의 지위 향상에 관해서는 확실히 쓸 수 있는 내용이 있기는 하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논점을 토지로 되돌려 농업을 부흥시키고 장려하는 교육을 제창해야 했다.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 향상되고, 기술의 발전도 일정 부분 상향되어야만 강한 국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방직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되면 효율이 향상될 것이었다. 이윤이 생겨나기 때문에 작업을 필요로 할 텐데, 그러면 작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이 갈수록 많아질 테고, 이로써 농민들은 땅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를 가리켜 ‘생산력 해방’이라고 불러볼 만했다.
방직 기술에는 많은 여공들을 필요로 했기에, 여성들이 집에서 나와 일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가계 수입이 발생하면 여성들의 집안에서의 지위 또한 덩달아 높아질 것이었다.
이런 사회적 조류에 반하여 여성들을 아직도 집에 가둬놓고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자본 상황 역시 한정적인 발전밖에는 도모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향 하나가 타고 있는 동안, 고청운은 먹을 다 갈고 나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그가 생각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점은 일찍이 정보가 매우 발달한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얻은 정보들로 인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는 있었으나, 단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내용으로 바꾸어야 하기에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청운은 자신의 행동이 도를 넘게 될까 겁이 났는데, 설령 이 왕조가 말로 인한 죄를 묻거나 기고한 글로 인해 화를 입게 되거나 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웠다.
그들이 시험 보는 자리는 회시의 석차에 따라 결정되었는지, 한 줄에 열 명이 앉았고 고청운의 자리는 맨 뒷줄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온통 수험생만 빼곡히 앉아 있었는데, 그들 중 이미 누군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이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답안지가 보이지 않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군사들에게 부정행위를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되었다.
이에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원고지에 자신의 생각을 열거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역대 왕조들은 모두 개국 시에는 정치가 투명하고 그 정치가 잘 이루어져 인심 또한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에서 수십 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는 왕조들이 왜 이런 흥망성쇠의 역사를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미리 설교하였다.
우매한 황제, 권신들 간의 자리싸움, 당쟁, 내부에서 발생한 재앙, 내적 소모, 토지 쟁탈 등은 모두 한 왕조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흥망성쇠의 원인은 모두가 다 농민들과 관련된 문제로 귀결되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농경민족이 주를 이르는 이 나라는 국가의 강성 여부가 얼마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지방통제를 가능케 하여 중앙에 권력을 집적시켜 얼마나 강성한 중앙집권 능력을 실현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농민들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한, 나라는 계속해서 존립할 수 있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날이 계속 된다면 상관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농민이 토지를 잃고 만에 하나 떠도는 도적이 된다거나 현지 유지에게 호적이 없는 상태로 유입이 된다면 국가는 농민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토지를 잃은 농민이 많아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농민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큰 열쇠는 가능한 한 많은 관리를 양성하여 시골까지도 파견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바로 농업을 부흥시키고 장려하는 교육을 제창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들을 위주로, 고청운은 되도록 가장 간결한 어구로 글을 써 내려갔다.
이후 고청운은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국가가 보유한 토지의 면적은 항상 일정하니, 늘어난 인구가 생존을 위해 경작 가능한 땅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가 마땅히 더 넓은 삶의 공간을 찾아주어야만 한다고 썼다.
육지에서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면적은 이미 충분히 넓었다. 북녘 초원의 유목 민족들을 쳐부순 지금 같은 때에는 그들의 생활반경을 더 제한하여 내륙에서 땅을 잃은 농민들로 하여금 북방의 초원에서 소와 양, 말을 키우면 혜택을 주어 국가에서 이쪽 산업을 장려하는 것도 또 하나의 살길을 마련하는 방도가 될 것이었다.
고청운은 이어 자신의 해상 발전 전략을 제시하였다. 그는 ‘제국은 반드시 바다에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밖에는 더 넓은 경작지가 있어 경작 가능 한 땅을 충분히 찾을 수 있고, 그 외적으로도 바다에는 어육(魚肉) 자원이 풍부하다.’ 고 의견을 피력하였다.
사실 석유 자원 같은 내용들도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내용들은 이 시대에서는 쓸 수 없으니 어육 정도밖에 언급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더불어 그는 전 왕조에서의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의 통치자가 태감을 서양으로 파견 보낸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전 왕조는 매우 심한 변방의 압력에 직면하여 변방의 압력에 대비하느라 중농경상(*重農輕商: 농사를 중시하고 상업을 가볍게 여김) 정책을 펼쳐 모든 물자를 징집하여 창고에 쟁여두고 남은 물품들만 소량으로 상품으로 유통시켰다. 그러다 보니, 서양으로 내려가는 교역에 필요한 상품을 지원해 주지 못하였고, 전 왕조의 수공업과 상품을 교환하자니 그 품질이 남송(南宋) 때보다 크게 뒤떨어져 서쪽으로 항해를 강행했음에도 큰 이익을 거둘 수가 없었다.
서양을 향했던 자들이 가져온 이윤이 많지 않을뿐더러 물품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에 항해와 관련된 업적은 그대로 중단되어 버렸고, 당시의 항해를 다녀온 인원들이 얻은 귀중한 자료 역시 당시의 역사적 안목의 한계를 지녔던 관리들에 의해 바로 소각될 수밖에 없었다.
고청운은 공부를 하던 당시 이 대목을 읽으면서 평행 세계의 명나라 왕조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는 것이 생각나,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다.
해금 해제에 대한 내용은 3년 전 회시 때부터 시험 문제로 언급이 되었었는데, 나라에서 해적들을 소탕한 이후 별다른 후속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동남쪽 해안 일대는 주민들이 바다에 나가더라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국가는 암묵적인 태도를 취해 당분간은 더 큰 행동에 돌입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여기까지 쓰고 나자 고청운은 벼루에 있던 먹이 다 쓰고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잠시 맑은 물을 넣어 계속 먹을 갈았다. 뒤이어 그는 구석에 놓인 모래시계를 보니 시간이 아직 일러 오시가 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계속 글을 써 내려갔다.
상품이 풍부해야만 무역에 임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 장인들이 생산하고 있는 각종 생산 장비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고청운은 여기서 물레, 소, 경작 공구, 방직 공구 등을 언급하면서, 선진적인 생산 공구 개발만이 시간과 인력을 절약해 줄 수 있으며 장인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해주어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도 언급하였다.
요는 과학기술 발전의 필요성이었다.
‘적어 내려간 내용이 다 상투적이기만 하고 너무 신선함이 없어 보이려나?’
고청운은 자신이 이런 얘기를 꺼내면 못마땅하게 여기는 문인들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그들은 기껏해야 말로 떠들기만 할 뿐 그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더 급진적인 언사가 나왔던 적은 있었다.
길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서, 고청운은 이미 어떤 것이 국가의 의도에 반하는 행위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내용을 모두 원고지에 쓴 후, 고청운은 자신이 체득한 실용적인 지식, 경험, 팁 등을 연이어 쓰기 시작했다. 전 왕조는 해권(*海權: 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무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여 군사, 통상, 항해 따위에 관하여 해상에서 가지는 권력)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줄곧 대륙에만 집중적으로 쏠려있었으며, 해양의 전략적 가치와 해상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중요시하지 않았다.
또 스스로를 천조상국(天朝上國)이라고 생각하고 바깥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다른 나라를 그저 오랑캐로 여기고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위험한 중화사상에 취해 있었다.
고청운은 이때의 사례를 통해 그가 일찍이 많은 도시에서 외국인과 교류하면서 겪은 바를 함께 기술하였는데, 뜻밖에 이곳에 떨어져 돌아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전 왕조에서부터 남아 있던 자들도 있었다며, 그들은 각자 여러 나라에서 왔지만, 또 어떤 이들은 실력도 매우 대단하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고청운은 먼저 해권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기동성은 이미 육지의 범주를 넘어섰는데, 예컨대 경성에서 자신의 고향까지 배를 타고 가면 소요되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길이 더욱 개척된다면 중앙정부의 지령이나 법령 등이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수록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은 그만큼 더 많이 늘어날 것이었다. 게다가 상함대(*商船队: 여러 척의 상선으로 묶인 대열)는 해상 군사력의 기반인데, 해권을 장악하려면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여 해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소극 방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써 내려가면서, 고청운은 혹시라도 나중에 자기의 조국이 바다 위를 활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감격스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평정심을 되찾아 글을 마저 써 내려갔다.
해상 권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국가의 역량을 결정지을까? 해양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자는 세계 강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통제하려면 강력한 해군과 이를 뒷받침할 충분한 해군기지가 있어야 했다.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은 고청운은 종소리를 듣고서야 오시가 된 줄 알아차렸다.
‘밥 먹는 시간이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내용을 훑어보았다.
‘음, 그래, 내 나름대로의 방법론은 써 놓았는데, 글자 수가 좀 많은 것 같아 보이잖아?’
이때 이들을 지켜보던 군인들이 교대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교대가 완료된 뒤에나 그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